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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0월22일 목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청주] 내 마음 안의 무질서를 미워하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로마 6,19-23
+ 복음 루카 12,49-53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이단 종파에서도 즐겨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그릇된 맹신에 빠졌을 때,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만류하고 반대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이단자들은 이 말씀을
내세우며 가족의 박해에 맞서 싸우라고 가르칩니다. 심한 경우, 자해를
하겠다고 소동을 벌이면서 가족을 위협하는 방법까지 교육시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들처럼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하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도 복음의
가르침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은
복음의 말씀이 참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복음을 몰랐더라면 세상이 옳게
돌아가는지 아닌지 묻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으면서 혼자 적당히 편안하게
살 텐데,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려면 악인의 뜻과 죄인의 길에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참조). 이러한 거부와 과감한 결단 없이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시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크고 작은 갈등과 어려움은 물론, 많은
시련과 인내, 충돌과 좌절, 급기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힘과 마음을 넓혀 주시어 쉽고 편한 길만 선택하지
않고 외롭고 고독한 길도 마다하지 않을 은총과 용기를 주시도록, 오늘도
마음을 모아 기도드립시다.
- 매일 미사 -
◈ [인천] 믿음
2015년 나해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아주 신심 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정말로 사랑하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어디를 다녀오는 동안 끔찍한
사고로 아들이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이
고통을 신앙으로 이겨냈지요. 하지만 문제는 남편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신앙심이 깊기는 하지만 심장이 좋지
않아서 이 비보를 들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이런 말을
하지요.
“당신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전에 친구가 제게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석 두 개를 맡겼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안
계실 때 그 친구가 와서는 그 보석을 돌려달라는 것이에요. 저는 너무나
아까워서 못 주겠더라고요. 어쩌면 좋을까요?”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당신은
허영심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고는 그 보석들을
돌려주자고 설득합니다. 그제야 아내는 말하지요.
“여보, 보석들은 돌려주었어요. 실은 이미 여기에 없답니다. 그 두 개의
귀중한 보물은 우리 두 아들이에요. 당신이 없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우리
품에서 아이들을 데려가셨어요.”
우리가 놓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다시 가져가시겠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꼭 움켜잡으려고만 하지요.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잃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갖는 착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늘 사랑을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뜻밖의 이야기를
하시지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 혈연으로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가족 관계까지도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윗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가족
안에서 분열을 가져오더라도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 소유를 잃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있을 수
있고, 또한 어떤 물질적인 손해를 가져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사람은 그 순간에 하느님께 대한 원망보다는
괴로워도 내어 맡길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 이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둘 수 있은 마음, 그래서 하느님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믿음. 그러한 믿음을 청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마음이 죽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것은 쉬지 않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다.
인천공항에 다녀왔습니다.
많은 능력을 받은 나
어제 공항을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가시는 신부님께서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 다녀왔지요. 신부님들의 짐을 싣고서 공항으로 가고
있는 중에 한 신부님께서 제 차 앞 유리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더니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공해 차량이네요. 그러면 주차요금이 절반이죠?”
사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습니다. 솔직히 차량을 구입할 때
저공해 차량 등록을 해주신다고 했는데 그 혜택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주차요금 50%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공항에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한 번도 그 혜택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몰랐기 때문이지요.
5년 넘게 타고 다닌 저의 차이지만 이러한 혜택을 가지고 있는 차인지를
몰랐습니다. 문득 우리 자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깨닫지 못해서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조치를 해놓았는데,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고서 그저
힘들게만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무책임하게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이 아님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주차혜택을 받았습니다.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6,22)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회개하기 전에 이런 환시를 봅니다.
"프란치스코야, 너는 종을 섬기길 원하느냐 주인을 섬기길 원하느냐?"
프란치스코는 대답합니다.
"당연히 주인을 섬겨야지요." 그러자 이런 말씀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종을 섬기려하고 있느냐?"
그제서야 프란치스코는 깨닫습니다.
"아, 내가 주인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종을 섬기고 있었구나!"
프란치스코는 기사가 되려는 열망에 어느 장군의 부하가 되려고
전장에 나가는 길이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의로움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죄의 노예(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사람을 섬기기보다 하느님을 섬기고
죄의 종이 되기보다 의로움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오늘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를 섬기고 있고 무엇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까?
오늘 곰곰이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 구속주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갈라진 마음을 태우는 불꽃을 피우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갈라진 마음을 태우는 불꽃을 피우며
다문화, 다종교, 융복합화의 시대에는 복음의 가치나 종교의 신성성이 더
이상 절대성을 지닌 실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신앙공동체나
수도공동체에서조차 신앙의 진리, 살아내야 할 삶의 본질 등이 각자의
생각이나 취향에 맡겨지는 현상은 이제는 일반화되어가는 듯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세속화가 가속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말씀과 종말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결정적 과업인 심판, 그리고 성령,
하느님의 보호하심, 그리스도, 박해와 환난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불’처럼 널리 퍼지기를
열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하느님의 심판을
부르는 도전으로 다가오며 그에 대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12,51)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하신
예수님께서 왜 평화를 주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의
의도인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거짓 예언자들이 꿈꾸던
(예레 6,14; 에제 13,10) 물질적이고 손쉬운 평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는 현세 질서를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갈등과 분열을 가져다줍니다. 하늘나라의 선포는
혈연에 따라 사는 가정에 충돌을 가져다주고,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질서에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 사랑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선물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심판이 되고 분열의 계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속을 인간이 알 수 없고 영이 아니고서는
영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12,50)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덮치는
심판을 언급하시면서 당신 자신에게도 영향을 줄 심판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 세례는 물로써 이루어지는 세례가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되돌리는 십자가상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구세주로서
완수하셔야 할 사명인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미리 아시고 초조해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도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는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곧,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앞세워 교만에 빠졌거나
아니면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누리는 진정한 평화 상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늘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고통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매순간 우리는 이런 분열과 갈등의 고통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는 중립 지대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분열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손길 앞에서
행복의 길로 가는 선택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랑이신 그분을 품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불꽃이 내 안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육(肉)의 정신이 아닌 주님의 영(靈)에 따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나의 이기심과 탐욕,
애착, 분노, 편견과 왜곡된 사고의 틀을 태워 사랑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주님, 제 영혼과 이 사회에 당신 사랑의 불꽃을 피우시어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품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아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53)
타올라야 할 때를 놓치지 않는 가을 숲의 단풍을 만나게 됩니다.
빨갛게 타오르며 주님을 드러내고 만나는 시간을
이 가을은 우리들에게 겸손히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생명의 의미를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 생각들 속에만 빠져있는 우리들입니다.
제 생각들속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친히
참된 평화를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평화는 우리가 사는 가장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합니다.
거짓된 일치가 아니라 훤히 드러내는 분열과
마주하는 것에서 평화는 잉태됩니다.
갈라서고 맞서는 아픔의 시간없이
평화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온 평화는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참된 평화입니다.
평화를 통해 우리 믿음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허약하고 부실하기에 우리가 만든 평화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튼튼히 하며
믿음 안에서 활활 타오르게 합니다.
타올라야 할 믿음은 바로 우리자신의 믿음입니다.
갈라서고 맞서는 우리들을 평화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우리가 진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불이 뜨거운 평화로 타올라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내 마음 안의 무질서를 미워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내 마음 안의 무질서를 미워하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 지리라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결국 각각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 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주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19-23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어제는 2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한분은 여행을 다녀오셔서 ‘과자’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다른 한분은 정성껏 담근 ‘매실’그리고 맛있는
‘감’과‘사탕’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선물이었습니다. 비록 신학적으로 깊이 아시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신학의 근본, 영성의 근본을 잘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유도 없이, 따지지도 않고 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소유하려하고, 더 가지려하고, 그러면서 남을 속이고, 마음의 평화를
깨버리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서있는 작은 아이처럼
‘사랑의 본질’을 실천하는 것이 힘겹고 어려워 보이기도 합니다.
‘시대정신’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화폐 체제 기반 사회’라고 진단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돈이 있고, 이
돈을 벌기위해서 노동을 하고, 이 돈을 소유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화폐 체제 기반 사회의 핵심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한정되어있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가 소유할 수
없고,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화폐체제의 가장 큰 가치는
이윤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은 나중에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토마스 베리 신부님의 ‘우주 이야기’와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두 책의 이야기는 인간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생태 중심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의 등장은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1년 단위로 계산을 한다면 인간의 등장은 12월
31일 밤 11시 59분 57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머니인 지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고 합니다. 공기,
물, 땅을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황폐화 시켰습니다. 인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생명들이 살아남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에서 5번의
커다란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엄청난 자연 재해였습니다.
소행성의 충돌, 빙하기, 대규모의 지각 변동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지구는 오직 인간의 출현과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생명의
대규모 멸종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다른 생명들의 멸종은 인간의 삶에도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주 이야기와 무탄트 메시지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새로운 가치와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나눔이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사람들을 세상이 가르고 하늘이 갈라놓습니다.
애기나 어릴 땐 서로 뒹굴며 함께 놀다가도 어른이 되면서 달라지지요.
재물이 갈라놓고 지위가 갈라놓듯 진리도 서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갈라지는가 하면 욕심으로 죽이면서까지 갈라서잖아요.
교회의 역사도 보면 교회나 사회가 부패해질 때 성인들이 많이 났습니다.
정치가 교회를 핍박할 때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로 교회는 더 커졌고요.
사회가 너무 속화 되니 신앙인들이 더 열심 해지려는 경향도 보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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