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전 장사 -
☆ 2015년 나해 11월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청주] 하느님의 성전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에제 47,1-2.8-9.12
+ 복음 요한 2,13-22
○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오늘의 묵상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환시를 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넘쳐흘러, 바닷물이 살아나
물고기가 우글거리고, 물가에 있는 나무는 한 해에 열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이 이 환시를 보았을 때는 성전이 파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바로 그때 에제키엘은,
언젠가는 성전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이 이스라엘을 살아나게
하리라는 구원에 관한 희망을 봅니다.
그렇게 파괴된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뒤 재건되고, 그다음에 또
파괴되고 재건되고를 여러 차례 거듭하여,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은
성전마저 로마군이 들어와 다시 무너뜨립니다.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
말씀에 유다인들은 의아해하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현존하심을 보여 주는 그 성전은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신 하느님(요한 1,14 참조),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살아 계십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라는 무너지지 않는
성전은, 에제키엘이 내다보았던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성당은 하느님 아버지를 더욱 가깝게 만나 뵙고 그분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장소, 은총과 생명이 넘쳐흐르는 곳입니다.
또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위로와 힘과 평화를 얻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당 그 자체가 중요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생활이 중요합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멋진 성전을 내 안에 세우시길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따름 노래 “성전 오른쪽에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7,1-2.8-9.12
<또는 1코린 3,9ㄷ-11.16-17>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언젠가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거의 모두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계속해서 휴대전화에 손이 가고 눈이 가고 있으니 어떻게 대화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게임 하나를 제안했지요. 휴대전화를 자신의 앞에 놓고서는 자기 전화를
눈으로 보거나 또 손을 직접 대는 사람은 벌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받기 위해서는 손을 대야 할 것이고, 각종 메시지를 보고
응답하기 위해서도 손을 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살펴볼 때도 많지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벌금을 내자고 제안을 했고 모두가 동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비로소 대화에 집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리고,
SNS 알림 메시지가 울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쳐다봐도 벌금을
내야 하니까요) 이제는 휴대전화가 오히려 우리 모임의 방해꾼 정도로
취급되었지요.
이 게임은 실제로 있습니다. 폰 스택 게임(Phone Stack Game)이라는
것으로, 휴대폰을 테이블 한가운데 쌓아놓고 먼저 폰에 손을 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게임이지요. 이를 직접 응용해서 한 번 해보니 휴대전화가
우리 삶의 필수품이 되어있는 요즘, 대화에 있어서는 정말로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내 휴대전화로 오는 전화는 다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지요. 그래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휴대전화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전화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과의 진정한 대화가 아닐까요? 기계에
얽매이는 우리가 아닌, 사람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에 집중할 수 있을 때 배려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동참하는 참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양들과 소들을 쫓아내심으로써 성전이
시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과연 지금의
성당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도 주님의 성전이지만,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의 성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도둑과
강도, 세상 잇속만을 챙기는 장사꾼 같은 마음 모두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장사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면서, 정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당신의 새로운 몸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성전들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주님을 통해서만 새롭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님과 함께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데 노력하고 있을까요?
주님의 뜻인 사랑을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들만을 간직하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성전은 내 안에서 절대로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이 아닌 이웃에 대한 사랑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멋진 성전을 내 안에 세우시길 바랍니다.
행복이란 손안에 있을 때는 언제나 작아 보이지만, 일단 잃어버리고
나면 이내 그것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막심 고리키).
벌써 꽃이 그리워질 계절이 찾아왔네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탈출기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탈출 14,15)
지켜주던 하느님의 천사와 구름기둥 뒤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움직이자 모세는 그제야 바다 위로 손을
뻗지요. 그리고 홍해는 갈라집니다.
이 성경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길을 갈 용기 있는 자에게만 길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께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라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는 자에게만
하느님께서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포기하고 싶은 일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보십시오.
오늘 강의하러 울산에 갑니다. 가는 김에 여행 좀 하고 올게요.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1월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21)
오늘은 현재의 바티칸이 있기 전에
천년간 교황청 역할을 했던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전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기원한다는 의미랍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성전이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성전은 화려한 건물과 보물과 장식으로
거룩한 분이 계심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건축물로서 성당이 화려하고 멋지더라도
그 안에서 예배와 찬송을 드리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그 성당은 더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이 곧 성전이라 하시네요.
사도들도 "우리의 몸이 성령의 궁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물건이 거룩한 것을 담고 있다면 성물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멋져 보여도 쌍스럽고 추악한 것을 담고 있으면
그건 더이상 성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기도 하고 마귀의 소굴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주 하느님을 모시면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고
우리 안에 마귀와 마귀의 온갖 유혹을 들이게 되면
우리 몸은 더이상 성전이 아니라 악의 소굴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핍시다.
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선이 들어오게 합시다.
미움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사랑이 가득차게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영이 거하시는 아름다운 궁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구속주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성전이 되어 걸어가자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1월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월 요한 2,13-22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사랑의 성전이 되어 걸어가자.
오늘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축일에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일치되어 있고,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깨닫고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또 각자의 성화 소명에 충실하고, ‘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함을 상기해야겠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집이요, 기도하는 집’인 성전으로 살아가는 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시고, 환전꾼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그들이 성전을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2,16).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정의이신 하느님이 드러나고,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 부패하고 더렵혀진 것을 지나칠 수 없으셨습니다. 나아가 그분은
형식적인 예배나 종교의식을 거부하시고 고정된 건물에 매이지 않고
성전과 회당의 안과 밖, 집안과 길거리, 호숫가, 바리사이의 집 등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2,21). 이는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회상하고 보존하며 살아내야만 참 성전이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며,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웃어주는 ‘공감과 연민’이 현저히
드러날 때 비로소 성전다운 성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께 전 인격을 봉헌하고 축성된 삶을 살아가는 나는
과연 사랑이 되어 걸어가는 참 하느님의 성전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며
(2코린 6,14),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입니다(1코린 6,19). 따라서
하느님의 성전인 내 삶은 사랑이 넘치고 영(靈)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나의 말과 행동과 표정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고 탐욕과 집착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 근심 걱정과 자기애로
차 있다면 성당에서 무릎 꿇고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신을 드러내려고 성전 건립을 위해 많은 돈을
내는 것보다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 이 세상에서 사랑의 성전을 짓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인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다른 이를 존중하고 겸손하게 대하며, 사회정의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 또한 가난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세상의 한복판에서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마저 교회 발전과 복음선포라는 이름 아래 자본의 힘에 의지하고
상업화하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교회의 상업화는 이제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병원, 학교, 요양원, 양로원, 장애인시설
등이 거대화하고 기업화하는 모습이 참 성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으로 세워지고 사랑이 실천되며 사랑이 쌓여가는 곳은 어디나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을 인간의 문제와 고통에 무관심한
채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공동묘지로 바꿔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축일을 지내며 나 자신과 세상 모든 교회가 사랑과 정의, 공감과 공생,
연민으로 가득한 참 성전이 되기로 다짐합시다. 오늘도 '사랑의 성전'
이 되어 걸어가는 행복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1월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3-22)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이웃이 되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씻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약자들을 안아주고 받아들이는 고향처럼
따뜻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진정한 행복이 하느님께 있음을
알려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더이상 팔아버리지 않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가난해지고 점점 가벼워지는 기쁨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처럼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회개하지 않는 우리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비겁하지 않습니다.
다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통해 다시 세워지는 사랑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하느님의 성전 |반신부의 복음 묵상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축일 (요한 2,13-22)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정돈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 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따름 노래 “성전 오른쪽에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7,1-2.8-9.12
<또는 1코린 3,9ㄷ-11.16-17>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지난 주 수요일에 성소후원회 회원들과 함께 ‘나바위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성지에는 100년이 넘는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이 성지가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합니다. 1845년 사제서품을 받으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3분의 성직자와 10분의 교우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제물포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1주일이면 도착할 거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는 거센 태풍을 만나서 표류하였고 제주도까지
떠밀려갔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배를 정비하고, 다시금 제물포를
향하던 배는 또 다시 태풍을 만났고, 결국 도착한 곳이 나바위
근처였다고 합니다. 태풍을 만나지 못했다면 배는 제물포에
도착하였겠지만 당시에 제물포에는 포졸들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
성직자들은 쉽게 잡혔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나바위는 외진
곳이고, 포졸들이 없었기 때문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3분의
성직자는 무사히 조선 땅에 입국하였고, 복음을 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센 태풍도 하느님이 섭리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신앙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나바위에 성당이 세워졌고, 3000명이 넘는 큰 성당으로 발전했지만
그곳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임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경이나, 군산에 성당을 세우지 않고, 나바위에
성당을 세운 것 또한 하느님의 섭리인 것 같습니다. 다른 많은 곳들은
개발과 발전의 과정에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데, 나바위 성당만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순교자들께서 나바위 성당을 지켜주신 것만
같았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만일 당신이 관광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If you enter here as a tourist, you would exit as a pilgrim.
If you enter here as a pilgrim, you would exit as a holier one.)’
지금도 그 글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나바위 성지에서 성소후원회 회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렸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십자가의
길 기도였습니다. 저는 4처를 묵상하면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부끄러움에 죄송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주교님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10년 만에 어머니를 잠시 보았는데, 이번에
포졸에게 잡혔고 다시는 어머니를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저는 건강하고, 시간도 많은데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4개의
대성전이 있습니다. ‘성 마리아 대성전, 바오로 대성전, 베드로 대성전,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로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술적인 가치와 교회사적인 의미가
있는 4곳의 대성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당은 예술적, 건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은 기본적으로
4가지의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성당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당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성당은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의
기도를 하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셋째는 성당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미사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성당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 성당은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 오는 사람들은 늘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친교를 나누는 사람, 서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진리 편에 서는 신자들
2015년 나해 11월9일 월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신성한 성전(구약)을 잘 못 관리(지도자들)하기에 예수님은 야단쳤지요.
지도자들은 무슨 권한이냐고 주인에게 따지며 대드니 한심했을 겁니다.
허물어라 3일만에 재건하겠다. 구약을 끝내고 신약시대를 선포했습니다.
신성한 국가를 빙자해서 권력과 재산을 누리려는 건 지금도 같습니다.
신성한 국가를 유지 발전시키려면 국민이 진리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현실에서 진리 편에 서는 신자들 예수님이 늘 함께 해주시니 당당합니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요한 2,16)”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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