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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수도회] 두려워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다니 6,12-28
+ 복음 루카 21,20-28
◈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의 말씀이 오늘 다니엘에게서 확인됩니다. 다니엘은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이 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
기도를 올리다가,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다니엘이 하느님 앞에서
무죄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고,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는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 생명을 얻었습니다(루카 21,16-19 참조).
그런데 오늘 독서의 결말은 다리우스가 다니엘의 하느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목숨을 건진 사건은 이교도인 다리우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알아 뵙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놀라운
기적보다는 기적에 뒤따르는 신앙 고백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어제 ‘증언’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에서,
신앙에 충실하던 많은 이가 로마의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순교록을 보더라도 무수한 순교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지만, 다니엘서에서와 같은 기적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다른 이들 앞에서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지키려고 용감하게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여 무엇인가를
포기할 때, 그러한 결단과 선택은 신앙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것을 통하여 누군가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의
‘증언’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죽음은 나를 결코 피해서 가지 않습니다.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2-28
복음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8
어제는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
동창신부의 아버님께서 선종을 하셨는데 저희 동창신부 모두가
아버님의 빈소를 함께 지켜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시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연도와 미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만 했지요.
그러다보니 새벽 묵상 글을 도저히 올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번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강이 하나 잡혀 있었고, 라디오
방송 녹음도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정표를 보니 화요일과 수요일에
아무런 일정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어있는 이 두 날짜에 강의와
방송 준비를 하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래서 월요일에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지를 향해 운전을 하고
있던 중에 동창신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 것이지요.
저의 계획이 완전하게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여행지에서 빨리
돌아와야만 했고, 강의와 방송원고 준비를 하려고 했던 시간에는 빈소를
지키고 또 장지도 가야만 했습니다. 결국 마음도 급해지고 몸도
피곤해진 상태로 일정에 임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계셨던 동창신부의 아버지셨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의 계획도 이렇게 틀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눈앞의 일도 이렇게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을 과감하게 해버리고, 이에
따른 단죄도 쉽게 내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과연 우리는 떳떳한 마음으로
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던 우리들, 특히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에 대해 ‘나중에’
만을 외치면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이웃들을 멀리하면서 과연
주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요?
화장터와 장지에 가서 죽음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인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죽음에 이르기 전에 미리미리 해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내게 있어 죽음은 항상 멀리에 있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그 준비를 게을리 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보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는 우리의 모든 사랑의 행위들이
주님을 맞이할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죽음은 나를 결코 피해서 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입니다.
우리가 터득해야 할 사랑의 기술 중 하나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생의 기쁨도, 아픔도 가까운 사람을 통해 다가온다. 우리를
쓰러뜨리는 사람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도 가까운 데 있다(강준민).
묘지에서 죽음을 떠올려봅니다.
하느님과의 인터뷰
어떤 기자가 하느님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평소에게
묻고 싶었던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인간에게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러고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는 것. 그러곤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어떻습니까?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삶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시간이 많다는 생각 때문에 오류를 계속 범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보다 주님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러한 오류를 조금씩 줄여나갈 수가 있지 않을까요?
동창신부들의 뒷모습. 화장터 가는 길에 찍었습니다.
◈ [수도회] 두려워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 -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루카 21,20-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21,28)
두려워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최종 심판의 전조로 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이들은 빠져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21,21). 서기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무려 110만 명이
죽었으며 9만7천명이 로마군 총사령관 티투스의 포로가 되어 여러
지방에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입니다(21,24).
기근까지 확대되어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졌습니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사)
사실 성전 파괴는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인간의 힘에만 의존했던 유다인들 스스로가 부른 참혹한 결말이었습니다.
누구든 이런 파멸의 경고 앞에 공포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21,25-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21,28)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며”(21,9),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21,28)
성전 파괴와 갖가지 징벌로 표현되는 나 자신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과 내 의지, 선과 악, 육과 영,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갈등과 고통을 겪곤 합니다. 무게는 달라도 저마다의
십자가와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목숨을 바쳐
속량하시려고 우리 삶에 끼어드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선택하고 따름으로서 떠안게 되는 죄와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사랑의 촉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멈추어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 하느님의 그 눈길로 자신과
이 사회를 바라봄으로써 파멸의 징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21,20).
영혼의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가려면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가고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21,21 참조). 이기심과 탐욕, 증오와 폭력,
분노와 교만에서 벗어나 세상의 불의와 차별, 박해와 탄압,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오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21,28) 하고 말씀하십니다. 파멸과 영혼의 어둠
속으로 치닫는 그 상황은 또한 영광의 주님을 만나 뵈올 절호의 기회요
더 큰 은총으로 나아갈 전환점입니다.
육의 정신에 이끌려 주님을 거스르고 어둠과 괴로움을 맛보고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보는 아픔 속에서도 "허리를 펴"
주님의 영(靈)을 호흡하고, "머리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넘어져도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까닭은 주님만이
나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것보다 넘어졌을 때 일어나
다시 시작하지 않는 태도가 주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과 교회, 사회의 아픔과 어둠 가운데서도 희망이신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카이로스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0-28)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이웃들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가장 멀리 있다 여기는 죽음이 실은 우리들 삶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 존재를 알게하는 죽음을 통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다시금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속량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속량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속량안에는 풍요로운 안식 또한 자리잡고 있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심을
십자가의 속량으로 뜨겁게 체험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바라보아야 할 십자가의 속량입니다.
십자가의 속량은 붙잡고 있는 이모든 것을 비워내게 합니다.
누구의 생명인지를 묻게 됩니다.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속량의 본질이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더 자주 머무르는
위령성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듯 죽음으로부터
속량이 드러났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9)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하신지요?
실망스럽고 죄스럽고 우울하고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쳐다보는 그런 마음입니까?
오늘 복음은 그러지 말라고 하시네요.
고개 좀 쳐 들어라고.
하늘 좀 쳐다 보라고.
잘 못 살았다고 찌질맞게 쭈그려 있지 말고 그런 우리지만
흐뭇해 하시며 자애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라네요.
그렇습니다. 오늘은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 봅시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속량해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가슴 벅찬 감사를 드립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8
지난 토요일입니다. 멀리 미국에서 한 청년이 한국으로 왔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서 멀리 태평양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불어, 스페인어를 잘하는 그 청년은 이제 한국말도 제법 배웠다고
합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영어학원 강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고, 예비
신학생들의 기숙사에 머물면서 한국말도 더 배우겠다고 합니다. 무엇이
시카고 대학을 나온 그 청년으로 하여금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청년에게 3가지를 당부했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라고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 기도를 많이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년의 앞길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은 동료 갈매기들과는 다른 꿈과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높이 날 수 있었고, 더욱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새로운 꿈을 이루려는 청년, 조나단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함께 세계여행을 떠난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심하지 않으면,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지켜 주셨던 하느님께서 그
부부의 여행길에도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입니다. 땅만 보고 걸어서는 밝은 태양과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얼굴에 다가오는 차가운 바람을 느껴보시면
어떨는지요. 바람은 극복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꼭 10년 전 겨울에 저는 캐나다에
있었습니다. 추웠고, 외로웠고, 말을 배우는 것도 어려웠고,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봄도 맞이했고,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시스템을 이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알공킨 공원도 보았습니다.
친구와 함께 오타와, 몬트리올, 퀘벡, 할리팩스까지 먼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잘한 결정이었고, 추억의 책장에 아름다운
기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친구의 모습으로, 우연인 것 같은 인연의 모습으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앞으로 10년은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품 대상자들의 교구장님과 면담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더 높은 꿈과 이상을 가지는 사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분명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조나단의 이야기에 잠시 웃었습니다. “신부님! 김밥 먹고 싶어요? 왜!
김밥 먹으면 천국 가니까요?’ 어렵게 배운 한국말로 ‘김밥천국’을
보았나 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들의 영향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중동의 역사는 성경 읽고 관광하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묘하기만 합니다.
현명 슬기 진리들을 권력 재력 무력이 짓밟는 상황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아직은 약합니다만 예수님의 저주랄까 무서운 징조 예언들! 안 그래요?
이런 날을 늦추는 데에 큰 역할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봅니다.
유엔 국제원조 민주주의 평등 나눔 평화 등이 가톨릭 선교핵심이거든요.
예수님 믿는 신앙인들의 삶이 퍼진 만큼 종말은 늦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현혹되지 마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루카 21,20-28
현혹되지 마라.
겨울의 문턱에서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관리에 마음을 써야하겠습니다.
건강한 것도 나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가 덜 한 봄을 맞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겨울에 휴식을 하며 새 생명을 준비합니다. 이처럼 인생여정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지만 그에 걸맞은 준비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간이 지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은총의 기회일 뿐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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