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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박근혜(朴槿惠)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당선
득표율 51.6% (15,773,128표) 투표율 75.8%(유권자 40,507,842 명 중 30,722,912투표) ------------- 청와대서 부모 모두 총탄에 잃고… 2012/2/20<조선일보>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2월 청와대에 돌아간다. 33년 3개월 만이다. 신분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바뀌게 된다. 1961년 5·16 때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다음 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서울 신당동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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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 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그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사실상 대선 준비를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또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 하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됐다. '박근혜 총리 카드'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더니, 2008년 4월 총선 때 김무성 의원 등 친박(親朴)계 인사가 대거 공천 탈락하자 그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은 무소속 또는 '친박연대'로 출마해 상당수 국회로 재입성했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2009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며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0년 8월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했다. ![]() 그는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흔들리자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당 개혁을 주도했다. 4·11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84%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10월 22일에는 정수장학회의 명칭 변경과 이사진 사퇴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모 행사에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 이제 (사람들이) 아버지를 놓아 드렸으면 한다"고 했다. 지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사퇴를 발판으로 막판까지 추격했지만, 박 당선인은 국민 대통합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2012.12.19 승리했다.
가요- 여자 대통령 /김월녀 아래 영문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ZJqgET91d0A&feature=player_detail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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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구가 낳은 첫 여성대통령, 축하! 축합니다.
국제정세가 복잡하고 세계경제가 침체되어 있는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영도해야할 큰 시련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인재등용을 잘 하고 민생을 살려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5년 후 국민 모두의 박수를 받고 청와대를 나서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길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생은 우리 국민 모두의 꿈이요 대한민국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만만세입니다.
좌파 종북주의자들이 날뛰는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어 50대 이상의 어른들이 모두가 일어나서 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종북주의 자들이 생겨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시대에 복직한 전교조를 비롯한 국가관과
가치관이 삐뚤어진 교사들이 젊은 청년들을 잘못 교육한 결과로 갈등과 분열의 사회를 조장한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 만세~ 만만세----
대한민국,우리모두의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