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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월13일 수요일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수도회]하느님을 향한 순례 일정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3,1-10.19-20
† 복음 마르 1,29-39
◈ 오늘의 묵상
사무엘기의 제목이 왜 사무엘기일까요? 너무 엉뚱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왜 다윗기가 아닐까요?
사무엘은 사무엘기 상권의 전반부에서 주로 활약하고, 사무엘기 하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무엘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내용은
다윗 이야기입니다. 열왕기 첫 장은 이미 고령이 된 다윗의 뒤를 이어서
솔로몬이 임금이 된 사실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인물 다윗의 이름으로
된 책은 없고, 대부분이 다윗의 이야기인 이 책의 제목은 오히려
사무엘기입니다.
성서 신학적인 이론은 덮어 두고 나름대로 생각해 볼 때, 사무엘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첫 임금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사야서가 아하즈와 히즈키야 임금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이사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책이기에 제목은 이사야서이고,
예레미야서가 여호야킴과 치드키야 임금 등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 책의
제목이 예레미야서인 것과 같지요.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로서 왕정 수립의 중재 역할을 하고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운(집회 46,13 참조) 사무엘은 이 시기의 역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임금들 곁에는 예언자들이 함께 있으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릇된 길로 들어설 때마다 하느님의 대변인으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자주 무시를 당하겠지만,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현존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이 세상에도 하느님의 예언자, 하느님의
대변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뿐이지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임금과 사제들과 지도층이 늘 그러했듯이, 우리도 우리 가운데서
쓴소리를 하면서 진언하는 이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지, 더욱이 박해하지는 않는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행하고 계십니까?
2016년 다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3,1-10.19-20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세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긴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모두 땅 속에 묻혀 있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살아 있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만이 아무런 문제없이 살 수
있습니다.
패션모델들의 몸매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많은 모델들이 자기
몸매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식증으로 삶을
마감하는 모델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생각해보면 전혀 문제될 것 같지
않은데 스스로 문제라고 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키 큰 여자는 자신의 큰 키가 부끄러워 굽 없는 신발을 신지요. 반대로 키
작은 사람은 자신의 키가 부끄럽다면서 굽 높은 신발을 신으면서 힘들게
걷습니다. 누구는 자녀를 많이 낳았다고 부끄러워하지만, 반대로 자녀가 없어
부끄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에만 빠져 살아 자신의 시간이 없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일이 없어서 도저히 살기 힘들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식을 따지고 보면 과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의 등장하는 시몬의 장모와 우리의 처지는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몬의
장모처럼, 마음과 육신의 상처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요. 이때 모든 의지는 사라지고 온갖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겠지만,
사실 더 바라는 것은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위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관심을 갖고 내 말을 들어주며 용기를 불러 일으켜주는 위로의 한 마디에
자신의 느끼는 고통과 시련이 사라지는 치유의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말씀 한 마디로도
충분히 모든 병을 치유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에게는 그저 한마디 말로 치유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손을 잡아주시고,
일으키시지요.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간단히 열병을 치유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치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접 위로의
손을 내밀어 손을 잡고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일으키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위로와 힘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즉,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통해서만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해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주님 없이는 진정한 치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별히 주목할 또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시몬 장모의 행동이지요. 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안정을
위해 쉴 만도 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지요.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은 사람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행하고 계십니까? 혹시 주님께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누워만 있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 기쁨이라고 생각하면서 잠들었다가, 깨어나자 삶은 곧 책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책임을 마친 후에야 그것이 바로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다(타고르).
갑곶성지의 아침.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인터넷에서 퍼온 글)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 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가진 것은 몇 배가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 분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유혹은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 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용품들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러나
더 줄어든 양심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이제는 모든 이가 더 이상 잃어버리는 것 없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갑곶성지의 입구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 1,29-39
조나단은 한국에 온지 2개월 된 미국인 친구입니다. 한국에는 사제가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베리따스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서 의정부에 있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첫 월급을 타면 부모에게 작은 선물을 한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제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첫 월급을 탔는데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지내는 것도 힘든 일일 것입니다. 한국말을 배우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말을 배우고, 기도하는 친구를 보니
대견스럽습니다. 조나단과 함께 칼국수를 먹으려 합니다. 칼국수에 칼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면 걱정입니다. 김밥천국을 보면서 김밥 먹으면 천국
가는지 물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조나단이 열심히 준비를 해서
내년에는 외국인 전형으로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묵상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조나단의 한국생활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복음 말씀이 생각납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밭에 가서 일을 하여라.’ 한 아들은 하겠다고 말은
하였지만 밭에 가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들은 하기 싫다고
하였지만 마음을 바꾸어서 밭에 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말보다는
직접 행동한 아들이 더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마태 21, 28-32) 함께 일하는
직원, 수녀님, 신부님이 있습니다. 모두들 제가 말을 하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려고 합니다. 성격이 급하고, 모든 일을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때로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는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시편 95,7) 사무엘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온 정성을 다해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고, 주님의 말씀을 왕과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영화 ‘역린’에서 인용되어서 기억에
남은 중용 23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4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모두 함께 빵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둘째는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신분의 벽을 허물었고, 남녀의 구분도 없었고, 학력의 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셋째는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넷째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몸이
많은 지체가 있지만 한 몸을 이루듯이 교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지체를 이루어 신앙 공동체로서 마치 한 몸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될 수 있었고, 이웃의 기쁨은 또한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인생에 기쁜 소식 많아져야지요.
2016년 다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인생에 기쁜 소식 많아져야지요.
어릴 적 동네 전파사 이름이 ‘기쁜 소리사’여서 지금도 기억합니다.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고 그게 매스컴들의 일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철들면서 라디오 TV의 질을 평하는 습성이 오늘까지 이어지더군요.
복음(福音) 곧 기쁜 소식인데 뉴스나 드라마 등이 영 맘에 안 듭니다.
기껏해야 건강, 음식, 여행은 많아지지만 이런 건 시대유행일 뿐이죠.
학문 과학 문화가 발달하는 만큼 인생에 기쁜 소식은 더 많아져야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1,38)”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을 향한 순례 일정표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마르 1,29-39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8)
하느님을 향한 순례 일정표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에서 보여주신 행보는 믿는 이들의 하느님을 향한 순례
일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일상생활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순례
여정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아 세상에 자신의 전 존재를 깊이
담그시는 것으로 공생활의 문을 여십니다(마르 1,9-11).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순례도 이 세상의 소외와 차별, 고통과 불의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성(聖)과 속(俗)을 나누어 차별하는 이원론적 사고나,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나 초월을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영성생활로 착각하는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보내지시어 사십 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1,12-13).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준비피정을 하신 셈입니다.
우리도 하루를 시작하면서,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하느님 앞에 머물며 그분의
뜻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복음선포라면 나날의 준비피정은
지나칠 수 없는 것입니다.
피정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1,21-28),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가시어 안식일임에도 열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1,29-31). 그뿐 아니라 저녁에도 몰려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1,32-34).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제도와 때와
장소를 뛰어넘어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과 해방을 위해 투신하는 삶이 되어야겠지요.
복음선포는 시간과 때가 따로 정해진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거기에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담아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하든
하느님의 마음으로 할 때 성사(聖事)가 되고 복음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설겆이나 청소, 따뜻한 대화, 직장 일,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의 만남,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에 대한 생각,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절망하는 젊은이들의 얼굴을 바라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감
등 모든 계기가 바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기입니다.
다음 날 새벽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십니다(1,35).
복음선포 여정 중에 멈추어 다시 홀로 하느님 앞에 머무신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심지어 맡은 교회일도 너무 많아 ‘정신없이’ 바쁜 이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되새길 시간은 자주 뒷전으로 밀리곤 하지요. 그러나
멈추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지 않은 채 제 뜻대로 달려가기만 한다면 결국
세속화와 타락을 불러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1,38) 하시며,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1,39) 그렇게 우리의 일상도 그침 없는 복음선포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을 향한 나의 인생 순례 일정표를 다시 챙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1사무 3,9)
위대한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듣기를 잘 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성인(聖人)이란 "귀와 입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도 되지요.
기도는 사실 무언가를 청하는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예언자도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잘 듣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사무엘도 "주님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예수님도 외딴 곳으로 물러가 자주 밤새워 기도하십니다.
조용한 데서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듣기 위해서죠.
여러분은 얼마나 잘 듣는지요? 남의 말을 잘 알아듣나요?
내가 하고싶은 말이 많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지는 않나요?
사람의 말도 종이 주인의 말을 듣는 자세로 들어야 정확하게 잘 알아듣지요.
하물며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더 겸손하게
정성을 다해 알아들으려 애써야 할까요?
오늘 여러가지 경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정성스레 겸손하게 귀기울여 들어보자구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29-39)
어디를가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바쁜 발걸음속에서도 외딴 곳의 기도시간을 통해
결코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안에서 길을 만드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치유이며 생생한 선포가 됩니다.
복음의 삶이란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보이게되는 소중한 삶의 가치입니다.
봉헌의 가치는 모두를 살리는 가장 큰 삶의 가치가 됩니다.
모두를 살리는 예수님의 하루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무언지를 가르쳐줍니다.
나눔의 기쁨이며 나눔의 즐거움입니다.
나눔을 통해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나눔으로 공동체는 성장합니다.
기도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다시 회복하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떻게 우리의 하루를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사람들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기도로 다시 배우는 소중한 하루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외딴 곳으로 가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 1,29-39
외딴 곳으로 가라.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 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루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 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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