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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월18일 월요일 [(녹)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수도회]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한 새 영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15,16-23
† 복음 마르 2,18-22
(일치 주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 오늘의 묵상
오늘 묵상하는 사무엘기 상권의 이 단락은, 사울의 일생에서 일대 전환점을
제공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뽑혔지만,
오늘의 사건을 계기로 그는 왕위에서 배척되기 시작하였고 그의 왕조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전쟁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었기에
사울은 이른바 ‘완전 봉헌물’ 규정에 따라 아말렉의 사람들과 가축은 물론,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 하느님께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그렇게 했다고 그가 사무엘에게
변명하였지만,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하고
꾸짖습니다. 여기서 사울은 비극적인 인물이었지, 결코 악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변명에 따르면 그의 잘못도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주님의 은총과 보호를 받던 사울의 생애가, 배척을
받으면서 서서히 끝나가게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뜻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려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께 많은
것을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하느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하느님을 나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제물보다도 당신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해 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2016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5,16-23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저는 새벽에 조금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새벽 3~4시면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지요. 이런 저를 사람들은 ‘새벽형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원래부터 새벽에 잘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학생 때에는
아침 기상 시간에 도저히 일어나지 못해서 늘 제 동창이 저를 깨워주었습니다.
이랬던 제가 새벽형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새벽에 일어나야 할 이유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잘 살기 위해서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찾다보니 새벽에 일어나야만 했던 것이지요. 신학생
때에만 새벽 시간은 저와는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새벽 시간인데,
벌써 16년째 새벽을 열고 있습니다.
니체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어떤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우리 삶 안에서 내가 달라져야 할
절실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면 과연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왜
어렵냐고 여쭤보면 의지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절실한 이유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있을 때에는 단식하지 않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단식할 것이라고
답변하십니다.
참된 단식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절실한
이유가 있을 때 참된 단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훌륭한 사람의 자질을 가늠하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로 판결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절실한 이유를 가지고 합당한 단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단순히 형식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변화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희망을 느끼고 있는 그래서 행복해하는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애벌레 속에는 훗날 그것이 나비가 될 거라고 말해줄 수 있는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다(버크민스터 풀러).
갑곶성지의 50주년 기념 영성센터.
내 손 안의 손금
어느 날 한 아이는 슬픈 기색을 보이며 동네의 지혜로운 어르신께 말했습니다.
“어제 어머니께서 점을 보셨는데 제 운명은 엉망이라고 했데요. 저 이제
어떻게 해요?”
어르신은 잠깐 동안 침묵하더니 아이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손금을 조금 보는데, 어디 정말로 그런지 손을 좀 보여줄래?
음……. 이것은 감정선, 이것은 사업선, 이것은 생명선, 자아, 이제는 주먹을
꼭 쥐어보렴."
아이는 주먹을 꼭 쥐면서 말했습니다.
“정말로 엉망이에요? 제 미래가 그렇게 나쁜가요?”
어르신은 주먹을 쥔 아이에게 “얘야, 그런데 네 감정선, 사업선, 생명선이
어디에 있지?”라고 묻자, 아이는 곧바로 “바로 제 손 안에 있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어르신은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바로 네 운명은 주먹을 쥔 네 손 안에 있는 것이란다. 다른 사람의
입에 달린 것이 아니지.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네가 의지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네 운명도 바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남의 말에 따라 내 운명이 바뀐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내 운명은 바로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분명히 내가 바꿀 수 있습니다. 멋지고 행복한 운명으로
말이지요.
영성센터의 식사. 맛있겠죠? 맛있어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사랑계명은 인류에 이미
2016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예수님의 사랑계명은 인류에 이미
방침 규칙 규정 법규 같은 인간이 만든 각종 행동울타리가 있습니다,
양반상놈 남존여비 같은 유교 가르침을 오남용 울타리도 있었고요.
국회의 여야 행동규약이 있는지 몰라도 상호비방 무조건반대 맞지요?
아휴~! 해방 후부터 오늘까지 당파싸움의 대를 잇는 양상 지겹거든요.
많은 이들이 이젠 화해 나눔 사랑 평화를 갈망하는 편으로 변했답니다.
예수님의 사랑계명이 인류에 이미 압도적으로 퍼진 점 명심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코 2,1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한 새 영혼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 2,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한 새 영혼
오늘의 말씀들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말씀을 듣고, 새로운
영혼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것을 새롭게 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는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고, 그 기쁨이 사라지는 슬픔의
때, 곧 죽음을 맞을 때가 바로 단식할 때라고 하십니다(2,19-20).
바리사이들은 매년 속죄의 날에 하는 의무 단식(레위 16,29)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루카 18,12).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했던 것 같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였으나 바리사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려고
위선적으로 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마다 단식했을 것입니다.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디다케 8,1).
그리고 2세기 말에는 부활축일 전에 단식을 했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랑의 결핍과
부재’를 채우기 위해 단식해야겠습니다. 단식은 그 결핍과 부재, 새로움의
상실을 다시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한 영적 용트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오심으로 열린 새 시대에 그분의 신앙과 가르침에 맞는
새로운 마음과 시각과 생활양식을 지니도록 힘써야겠습니다(2,22). 또한
묵은 떼처럼 들러붙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위선, 과거 전통과 제도에 매인
폐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와 이 사회를 쓸모없고 썩게 하는 낡은 천과 낡은 부대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과 돈, 인간의 생각과 힘을 주인으로
섬기는 우상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주의, 차별을
부르는 사회주조들, 복음의 가치보다 정치이념이나 사상을 앞세우는 태도,
비합리적 사고, 폐쇄적인 태도, 고정관념과 편견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위해 새로운 마음과 순수하고
사랑 넘치는 눈길,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는 소박한 영혼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단순하게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처럼 생각하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고 명심함으로써’(1사무15,22) 낡은 천과 낡은 부대를
버리고, 주님 보시기에 좋고 우리 서로를 살리는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
복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마르 2,18)
오늘부터 그리스도교 일치 주간이 시작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일치를 위해 기도해 오곤 있지만 도대체 변화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치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기원하는 미사를 매년 6.25를 전후하여 봉헌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화해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오늘 사람들이 묻고 있듯이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일단 부정적인 것으로
나쁜 것으로 무의식 중에 규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일치란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가 되려면 뭐든지 똑같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사실 말도 안되는 논리입니다.
하늘 아래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똑같이 않습니다.
가톨릭 신자라고 똑같이 않고 신부들이라고 똑같이 않습니다.
수녀회 수가 수백 개가 되는데 수녀가 다 똑 같은 걸로 알고있는
주교님도 계시다나요. ㅎㅎ
"발가락이 닮았네"처럼 우리 인간은 뭐가 닮아도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 불리겠지요.
그런데 이념만 비슷하면 동지이고 생각만 조금 다르면 적인가요.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되지 않나요.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보고
왜 비싼 걸 안 좋아하느냐고 바보 취급할 수 있겠어요?
오늘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 봅시다.
그가 나의 적인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닌가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8-22)
들숨과 날숨 속에 단식이 있습니다.
비워야 새 것으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단식은 삶의 나눔을 일깨워줍니다.
신랑과 함께 나누어야 할 우리의 행복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신랑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그 어떤 것도 신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신랑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삶의 주인을 찾는 것이 단식입니다.
신랑을 더 사랑하기 위한 단식이 되어야 합니다.
혼인잔치의 손님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 깨끗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자신과 신랑을 위한 단식입니다.
옛 것을 떠나보내는 단식입니다.
새 것을 맞이하는 단식입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를 단식은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양승국 신부의 희망 한 스푼-지금은 축제와 환희의 때
2016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 2,18-22
양승국 신부의 희망 한 스푼-지금은 축제와 환희의 때
30년 전통에 빛나는 농구대회, 올해로 어언 50회 대회를 넘어선 특별한
농구대회가 있습니다. 저희 젊은 살레시오 회원들과 여러 봉사자들이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흘 이상 순수자원봉사로 진행되는 돈 보스코
아마추어 농구대회입니다.
우승팀에는 고작 우승 상금 30만원에 트로피, 상패, 메달 정도 수여하는
소박한 대회지만 청소년들의 참여 열기는 웬만한 프로농구 빅 매치를
능가합니다. 오랜만에 학업에 대한 부담. 진학에 대한 압박, 미래에 대한
걱정을 다 내려놓고 행복한 얼굴로, 그렇지만 목숨 걸고 경기에 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제 마음까지 행복해졌습니다.
폐막식에 참석하러 당일치기로 광주까지 내려간 김에 추운 날씨 속에 고생한
젊은 자원봉사자들에게 삼겹살을 한턱 쏘았습니다. 다들 한참 먹을 때인
젊은이들이어서 그런지 얼마나 맛있고 야무지게들 먹던지 보고 있는 제
마음이 다 흐뭇해졌습니다. 저는 고기 몇 점 먹지 않았지만 그들이 먹고 있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왔습니다.
잔치에 초대한 주인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아무래도 초대받은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겠지요.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고 정말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할 때일 것입니다. 잔뜩 차려진 음식
앞에 손님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정신 줄 놓고 먹을 때 주인도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신이 날 것입니다.
숱한 고민과 갖은 정성 끝에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차려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깨작깨작 먹는다든지, 요즘 다이어트중이라며 한 젓가락만 먹고 딴청
피운다든지, 요즘 금식기도 중이라며 아무리 음식을 권해도 고개를 흔든다면
초대한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해
준비한 풍성한 천상잔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구약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약시대는 한
마디로 잔치의 순간입니다. 축제와 환희의 기간입니다.
이토록 흥겨운 순간, 보속과 단식, 눈물과 통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흥겹게 춤추며 잔치를 즐길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우리 각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면서 즐기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단식은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 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요한복음 2장 19~20절)
잔치를 즐기고 축제를 만끽하라는데 즐길 구석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뭘
즐기라는 거냐는 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은 즐길 거리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하수(下手)에게는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겠지만 고수(高手)에게는 삶이
온통 호기심 천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자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단식의 열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 2,18-22
단식의 열매는 애덕의 실천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소신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디딤돌로
삼아 미래를 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을 쇄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소식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를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 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단식은 생색내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의 절제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사랑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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