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수도회] 복음선포를 위한 삼중의 회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22,3-16
† 복음 마르 16,15-18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바오로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 오늘의 묵상
신약 성경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대하여 세 번씩이나 전해 줍니다. 그만큼
획기적이고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생각해
보아도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그 후의 교회 역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과 지각
변동을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루카 복음사가에게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었기에, 루카는 이 사실을 바오로 자신이
갈라티아서에서 전하는 내용보다도 더 기적적인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고 바오로는 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달리 말한다면, 바오로는 회심 이전이건 이후이건 뜨거운 신앙심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고, 하느님에 대한 열성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이었기에, 어쩌면 회심한 그가 열렬한 사도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느냐고 되물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오로의 회심보다 더 어려운 것은 차갑거나 미지근한 사람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황금만능주의 등 이 세상의 쾌락과 사고방식에 흠뻑 젖어
있어서 하느님의 뜻에는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바라볼 겨를도
없이 희생과 봉사와 이웃 사랑 등과 같은 복음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고속
질주만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하고 고백하면서 나를 내어놓음으로써 회심하는 것이,
바오로의 회심보다 더 큰 기적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청동 벽 같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시고 바오로 사도에게
하셨던 이적처럼 우리 안에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오늘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맡기면 어떨까요?
- 매일 미사 -
◈ [인천] 바오로의 회심, 우리가 해야 할 마음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제1독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2,3-16<또는 9,1-22>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18
예전에 있었던 본당에서 뵈었던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납니다. 이 할머니께서는
성당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하셨고 좋은 일들을 많이 하셔서 많은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 분이셨지요. 그런데 연세가 많아지셨고 또 병까지
생겨서 이제 더 이상 봉사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해드리면서 할머니에게 여쭈었습니다.
“할머니, 전에 그렇게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이렇게 집에만 계시니까 힘들지
않으세요?”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웃으면서 “하느님께서 이제는 좀 쉬라고 하시는데요.
그래서 지금도 좋아요. 편안히 집에서 기도하잖아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원망의 목소리를 내뱉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는데,
하느님께서 제게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하지만 이 할머니께서는 병으로
누워 있어도 그 자체로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행복할까요?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때 그 일만 생기지 않아도,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만
만나지 않았어도... 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과거에 연연하시는 분들은 지금의
자리가 행복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행복의 삶을 산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신 분이었습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그로인해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고통과 시련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분명히 더 새로운 삶, 발전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큰 죄책감에
시달렸을까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 그것도 모자라 하느님을
박해까지 했으니 도저히 주님 앞에 얼굴을 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 자신의 모습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런 자신까지도
선택해서 당신의 일꾼으로 삼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는
180도 변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즉,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 말씀을 따라, 이방인의 사도로 기쁜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연연하고 후회하면서
내게 선물로 다가오는 현재를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다면 그만큼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됩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들,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것을 지금이라는 시간까지 가지고 와서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바오로의 회심, 지금 우리가 곧바로 해야 할 마음입니다.
인생에는 진짜로 여겨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수없이 많고, 반대로 알아주지
않는 진짜 다이아몬드 역시 수없이 많다.(타거 제이)
바오로 사도의 회심.
다 정답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정말로 추웠습니다. 매스컴에서는 서울의 체감온도가 자그마치 영하
24도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밖에 서 있는데 춥다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데도 어제 성지 미사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추위에 관한 퀴즈 하나가 생각나서 신자들에게 질문을 던졌지요.
“추위를 잘 견디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3위는 북극곰입니다. 2위는
펭귄이고요, 그렇다면 대망의 1위는 무엇일까요?”
잠시 뒤에 어떤 분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사람이기는 한데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답들이 쏟아집니다.
‘에스키모, 눈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 사랑이 가득한 사람, 신부님,
수녀님, 나....’
그러다가 한 분이 조심스럽게 “여자”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정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예뻐 보이기 위해서 미니스커트 입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여자이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그렇게 많은 답이 나올지 몰랐습니다. 물론 ‘여자’라고 맞추신
분에게만 선물을 드렸지만, 모든 분들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딱 떨어지는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다 정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답이든 다 정답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싸움은 참 많이 줄어들 텐데 말이지요.
어제 같은 본당 출신 신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15-18
지난 토요일에 ‘신학교 합격생을 위한 감사미사’가 있었습니다. 가장 추운
날씨였지만 합격생들의 모습에서 추위를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합격생들과
가족들은 합격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다른 대학에
가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당당하게 신학교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신자가 아닌 선생님들은 많이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어떤 친구는 좋은
직장을 사직하고, 다시 수능을 봐서 어렵게 합격했습니다. 이번에는
외국인들도 5명이나 신학교에 지원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합격한 과정은
다들 달랐지만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합격생들 모두가 주님을 따르는 사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비록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인생의 후반부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서도 후반전이
중요합니다. 비록 전반전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후반전에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영성을
묵상하면서 우리들 또한 십자가와 수난의 영성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의 영성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 있습니다.’
(1,17)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율법과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음을 이야기합니다.(3,21)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몸값으로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했습니다. 영세를 받기 전의 우리는 죄악(원죄)의 노예로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을 운명에 처해있는 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한
나머지 우리의 몸값으로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내어 주시어 십자가상의
제물로 바쳐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예(죄)로부터 속량되어,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인인 하느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소유물인 우리를 하느님의 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 증거로서,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또한 예수님과 형제가 되게 해주시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다시 말하면, 죄를
지은 원조(아담,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하느님은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 주셔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고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죄를 없애 주시고(속량) 낙원으로
돌아가는 은총을 주시었습니다. 그 낙원은 우리가 아직 한 번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고, 마음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랑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영성을 깨닫는다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십자가를 바라보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즐겁고 기쁨에 찬 마음으로 일상을 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극악무도한 죄인이 못 박혀 죽는 곳인 십자가, 그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서 수난 받고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요, 우리가 믿는 신앙입니다. 이 십자가의 신앙은 성령의
힘으로만 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2,20)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전서 1장에서 복음 선포자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복음 선포를 우리의 머리로가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평화를
빌어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활할 몸이요, 하느님의 살아계신 성전인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속량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주님의 몸이요, 성체도 주님의 몸이요, 하나로 일치를 이루는 몸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테살로니카 전서 5장 15-18)”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사회를 흥하게 하려면 종교교육을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사회를 흥하게 하려면 종교교육을
매일 알려지는 매스컴 소식내용은 그저 끔찍하여 한심할 뿐입니다.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종교(宗敎)부지 상태지요.
양심 도덕 인심 마음 인간성의 성숙 배움이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종교는 사람으로서 배울 것 중 배울 것을 배우는 원천 배움입니다.
그래야 벌어 살고 인정 애정 욕심 등이 조절되어 인생 안정됩니다.
동물로 사는 것만 배우고 인간 원천 배움 없으면 사람은 망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코 16,15~16)”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복음선포를 위한 삼중의 회심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 16,15-18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복음선포를 위한 삼중의 회심
사울은 시리아의 타르수스에서 유다인의 자녀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자랐으며,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과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며 열심히 생활했던 뼛속까지 유다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철학, 역사, 문화, 언어 등에도 능통했고, 천막짜는 기술도
있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 율법에 대한 존경심에서 맹렬히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는데
스테파노와 다른 신자들을 죽이는 데에도 가담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다마스쿠스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눈부신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게 된 사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함께 간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에 들어갑니다. 그는 하나니아스의
도움으로 눈을 뜨고 보게 되었으며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회심하게 된
사울은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후 유다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광야로 피신하여 3년간 기도합니다. 그
뒤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타르수스, 안티오키아 등 예루살렘에서 로마,
스페인에 걸쳐 세 차례나 선교여행을 합니다. 그는 선교하면서 4년간이나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으며 죽을 위험까지 당하며 온갖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주십니다(16,15). 우리도 복음을 전하려면 바오로 사도처럼
철저한 자기 해체를 통한 회심이 필요합니다. 회심은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타협이나 중립지대와 착각, 거짓 관념 등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감상적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려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감상적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복음을 선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착각에 빠지면
감상적인 요소를 절대시하므로 하느님 체험이 불안정하게 되고 마음과
의지의 근본 변화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덕적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의지를 절대시하면서
일정한 행동을 하면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이런
착각에 빠지면 자기도취와 자기과시, 자기정당화 등 개인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며 자기 한계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려듭니다.
마지막으로 지성적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는 이성으로 하느님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며, 지성 작용에 치우친 영성생활을 합니다. 이런
착각에 빠지면 신비에 대한 감각이 없고 정서적 통합과 실천이 결핍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도 삼중의 착각에서 벗어나 바오로 사도처럼 해묵은 자신을 철저히
해체함으로써 진정 모두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행복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 당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렇게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복음을 선포히려면
먼저 우리가 회심 체험을 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체험하였듯이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크게 마음을 고쳐먹는 체험을 통해 참 기쁨을 체험하여야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크고작은 회심체험이 있답니다.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수도원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의 체험,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술이나 담배, 도박을 끊게 되었을 때의 체험, 이 길 저 길을 망설이다가
기도로 길을 찾게 된 체험,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
이런 크고작은 체험들을 통해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운명이요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 사건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 됩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구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만들어 낸
기적이구나."
오늘 나에게 일어났던 작은 기적들을 한번 떠올려봅시다.
전율과 감동 속에 하느님을 찬미하고
다른 이들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에 대해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이것이 복음의 기쁨을 살고 다른 피조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참 방법이 아닐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18)
진정한 삶이 무언지를 일깨워주는 것이 복음의 기쁨입니다.
복음의 여정과 회심의 여정은 언제나 함께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또한 어렵고 힘든 회심의 긴여정을
주님과 함께 충실히 걸어갔습니다.
삶의 여정이 회심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그림자까지도 사랑하게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일 용기를 주님안에서 청합니다.
그림자와의 만남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이러한 우리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회심의 첫걸음이 되어야합니다.
복음과 회심은 결국 주님 사랑으로 돌아서는 기쁨입니다.
생명의 빛을 통해 모든 것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진실을 주님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쩔수 없는 우리의 그림자조차 사랑하게 하시며
"복음을 선포하라."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삶은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우리또한 성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의 다마스쿠스의 여정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진정한 사랑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양승국 신부의 희망 한 스푼-바닥 체험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15-18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이십니다.
원래 그는 전도유망한 유다교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배운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습니다.
이런 그의 앞에 율법을 마구 파기하는 예수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이란 존재가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 신자들 역시 못마땅했습니다.
그날도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달려가던 사울은 특별한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강렬한 빛과 동시에 꿈에도 생각 못한 낙마(落馬), 실명(失明)을 합니다.
그 순간 천둥처럼 들려오는 소리...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자존심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지만 진한 바닥 체험을 잘 견딥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울은 자신의 지난 삶이 모두 틀렸음을 고백합니다.
무쇠팔을 지닌 혈기왕성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울은 남의 손에 이끌려 치유를 받으러 가는 처지입니다.
내가 최선이며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최악이며 최하임을 깨닫습니다.
은혜롭게도 사울은 인생의 최저점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박해자에서 옹호자로 예수님의 원수에서 제자로 거듭납니다.
가끔씩 우리가 맞닥뜨리는 인생의 바닥 체험…
그 순간은 죽느니 사느니, 과연 주님이 계시긴 하냐며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바닥 체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삶의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주님을 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닥에서도 바오로 사도처럼 의연해지는 일입니다.
바닥에서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비참함을 견디는 일입니다.
바닥에서도 바오로 사도처럼 끝까지 희망하는 일입니다.
바닥에서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삶의 방향전환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월25일 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15-18
회심은 방향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아마도 지난 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 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 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 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
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 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세상에 나가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