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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2월3일 수요일 [(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수도회] 경탄할 줄 아는 순수한 신앙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24,2.9-17
† 복음 마르 6,1-6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며 그분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다윗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눈에는 아주 모범적으로 보이지만,
인구 조사를 당연시하는 우리에게는 질문이 남습니다. 인구 조사가 벌을
받아야 할 만한 잘못일까요?
사람들은 몸무게를 자주 달아보면서 체중을 줄이거나 늘리려 하고, 날마다
혈압을 재면서 혈압을 높이거나 낮추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인구 조사를
하려는 이면에는, 인구를 늘려 세금과 군사력을 많이 확보해 보려는 숨은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독서의 내용에서는 생략된
3절에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요압은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불어나게 하시어,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만” 하고 완곡하게 반대의
뜻을 밝히면서 다윗의 뜻을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구를 불어나게
하는 것은, 다윗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관입니다.
다윗이 자기에게 속한 병력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까 걱정이
되어 인구 조사를 한 것일까요? 인구와 병력이 많아야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다윗이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힘을 믿은 것이 되는 셈입니다. 결국 다윗은 “당신의 능력은 수에 달려 있지
않고 당신의 위력은 힘센 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유딧 9,11)
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거나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지혜나 능력을 제대로 계측하여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계산법에
따라, 그분의 지혜나 능력을 평가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은 그저
짧기만 하여, 여기에서 머뭇거리다가 하느님의 계산법을 깨닫지 못하고
놓치고 맙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우리가 되어여 합니다.
2016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인구 조사를 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2.9-17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지난 토요일, 제가 있는 성지에는 새 식구가 생겼습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라는 종인 두 마리의 개를 키우게 되었지요. 솔직히 이제 막
태어난 어린 강아지가 아니라서 걱정이 되었습니다(2살, 5살입니다).
주인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활동적이기 때문에 조금씩 적응하더군요. 특히 좁은 집에서
살다가 넓은 성지를 마구 뛰어다니니 무척이나 신나합니다. 목줄을
풀어주면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닙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풀어줄
수는 없지요. 혹시라도 큰 몸집에 사람들이 놀랄 수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개집으로 데려옵니다.
처음에는 이 부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저한테 오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는 데에
집중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해서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켜주니 이제는 이름을 부르면 그 중 한 마리는 저를 향해 곧바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다른 한 마리도 저를 향해 뛰어옵니다.
처음에는 이름을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하고 달려옵니다. 어쩌면 저를 믿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를 통해 먹이를 얻을 수 있으며, 때로는 맛있는 간식도 먹을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런 반응에 저의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 집니다.
‘드디어 내 목소리에도 반응을 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특별 간식을
주기도 합니다.
문득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신앙을 아직 접하지 않았을 때에는 주님의 부르심에 도저히 반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삶인지, 어떤 것이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삶인지도 분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신앙을 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신앙은 접했지만 아직 주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의심하고 또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믿음
없는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가 없었다.”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까지도 덤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이, 믿음도 하느님의 은총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내 맘 같지 않은 지금.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것은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었다. 산다는 게 내 맘처럼 되지만은 않는 것. 그렇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강세형).
성지 피정의 집 벽에 붙어 있는 성경 말씀.
하지 않은 말도 듣기
한 남자가 부부싸움 후에 신부님을 찾아갑니다.
“신부님, 저는 매일 아내와 싸웁니다. 이제 그만 싸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간청에 신부님께서는 아주 간단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달 동안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십시오.”
한 달 뒤에 남자는 찾아서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신부님 말대로 하니 정말로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또 다른 과제를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아내가 하는 말뿐만 아니라, 아내가 하지 않은 말에도 귀를
기울여보세요.”
말을 듣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하지 않은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을 강하고 굳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필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이러한 믿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지 커피숍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4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정치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야기 합니다. 정치란 ‘나눔’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것을 가져다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거두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진국은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많이 거두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지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후진국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적게 가진 사람들의 것까지 빼앗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빈익빈과 부익부의 편차가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다윗의 잘못을 지적하는 나탄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양과 염소를 가진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단 한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의 양을 빼앗아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그
이야기가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닫고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누리과정 예산’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대상의
나이는 비슷하지만 관리의 주체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한쪽은 교육부의
감독을 받고, 다른 한 쪽은 보건 복지부의 감독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을 무상으로 하기로 하였고, 이는 지난번 대통령 선거의
공약이기도 했습니다. 정부도, 교육청도 아이들의 교육을 무상으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예산의 집행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교육청이 예산을 집행하라는 것 같고, 교육청은 정부에서
예산을 책정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길가에 걸려있던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한쪽은 예산을 주었다고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다른 한 쪽은 아직 예산이 오지 않았다고 전하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린아이들의
교육과 급식을 가지고 장난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교육을
볼모로 당리당략을 따지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였다고 합니다. 안심하고 자녀를
출산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움을 주는 것은 복지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선택입니다. 4대강 사업을 하고,
사드를 배치하고, 창조경제를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국민이 줄어드는
국가에는 필요 없는 정책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는 많은 이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었을
때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힘과
권위로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희생과 봉사’로 하신 것입니다.
‘겸손과 나눔’으로 하신 것입니다.
시비를 가리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검사, 변호사, 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비를 가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 제 잘못을 당신께 아뢰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고,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할 때, 당신은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예전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이
생기겠구나!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천국은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이거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계절은 이렇게 다시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야 함을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똑똑하면 뭐든 다 이겨 행복해질까요?
2016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똑똑하면 뭐든 다 이겨 행복해질까요?
아는 게 병, 헛 똑똑,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등의 말에 관심가요.
오른들이 젊은이들을 잘 못 가르쳐서 세대차라는 게 생겼다고 봐요.
임금중심, 일본에 나라 뺏기고, 6,25남북 전쟁, 공부, 돈돈 이런 거요.
이겨라! 이겨라! 는 말이 젊은 세대들의 뇌리에서 커간 결과 같아요.
동료는 물론이고 어른이건 부모건 하늘이건 뭐건 다 이기려 들잖아요.
유태인들도 배운 게 구약뿐이라 실제 오신 메시아를 죽여 버렸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
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결받지 못한다.'(마르코 6,4)"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경탄할 줄 아는 순수한 신앙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마르 6,1-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경탄할 줄 아는 순수한 신앙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자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다고 믿어 몹시
놀랍니다(1,22).
율법학자들은 그분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자 의아하게 여기며 신성모독
행위로 판단해버립니다(2,7-8).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중풍병자의 치유를 보고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2,12).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귀먹은 이와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시자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랍니다(7,34-3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많은 이들이 놀랍니다(6,2). 그런데 그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알고 있던
과거의 인간 예수와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친인척 관계뿐 아니라 율법을 배우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요 천한 노동자로 살아왔던 출신 성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문에 “저 사람이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6,2)라고
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나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에 놀랍니까? 참으로 매순간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며
놀랍니까? 아니면 외적인 것들, 세상의 변화, 내 뜻이나 기대와의 큰 차이
때문에 놀랍니까?
우리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며 놀랍니다. 선입견은
어떤 대상이나 주장에 대해 경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리 마음속에
굳어진 견해를 말합니다. 고정관념은 개인이나 사회가 지닌 도식에 따라
형성된 구성원들의 전형적 특징에 관한 신념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입견과
틀에 박힌 신념에 갇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인간적인 지식과 외적 조건에 애착을 두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우리는 인간적인 조건이나 능력, 출신 배경과
환경, 학벌과 외모 등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이들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며 경탄하고,
그 주님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나자렛 사람들처럼 과거에 매인 채 과거지향적으로 살아선 안
되겠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배고픔을
느끼자 이집트에서의 ‘고기 냄새’를 그리워하듯이 예수님의 과거 모습에
매여 있었고 굳어버린 신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머물렀기에 예수님의 현재 모습을 보지 못했고, 납득하기 어려워 놀랐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생명의 기적, 사랑의 기적을 이루실 수
있도록(6,5)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과거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창조의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경탄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마르 6,2)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학벌을 중시합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고 박사학위는 있는지 등이
지혜로운 사람의 기준지표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난사람'인지는 몰라도 '된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된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서울대 출신, 하버드 출신은 똑똑할지는 몰라도
세상의 지혜로운 스승들은 대부분이 그런 학벌과는 상관없는 분들입니다.
그런 된사람들은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 참지혜를 추구합니다.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하기보다는 세상을 깊이 바라보고 깊이 관상합니다.
말이 많기보다는 침묵을 더 많이 합니다.
나는 난사람이길 원하는지 된사람이길 원하는지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에서 지혜를 얻었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우리의 믿음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아픈 탄식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맛을 잃어버렸기에 삶의 맛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온 어리석은 시간을 내려놓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중심을 딛지않고서는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믿음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허상을 좇는 우리들을 보게합니다.
올바른 믿음은 사람들을 제대로 보게합니다.
욕심으로 가득채워진 우리 마음을 믿음으로
비워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모두는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갇혀있는 우리가 아니라 믿음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성령께 마음을 열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마르 6,1-6)
성령께 마음을 열어라.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판단력과 방향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고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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