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천상 실체 -
☆ 2016년 다해 3월1일 화요일 [(자)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수도회] 옹졸함과 냉정함을 넘어 나누는 자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다니 3,25.34-43
† 복음 마태 18,21-35
◈ 오늘의 묵상
베드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자 했습니다. 도대체 언제쯤, 어디서 평안한 마음으로 용서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종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큰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참아 주지 못합니다. 남이 베푼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유혹입니다. 행복해지려면 이 유혹을 ‘넘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셨기에 모든 것을 ‘감사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음의 종은 동료를 ‘자신의 틀’에 맞추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대로’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분노할 수 있기에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것을
발전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기에 인간인 것입니다.
용서의 법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새겨
놓으신 계약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하신 것을 이웃들에게
베풀면서 이제 내 자신이 이 계약을 확증해야 합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나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용서
2016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25.34-43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지난 주말에 좀 피곤하게 보냈습니다. 잠을 설쳐서 몇 시간 자지도 못했고
성지에서의 일과 외부로 나가 강의를 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어서 많이
피곤했지요. 그래서일까요? 코에 아주 자그마한 뾰루지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뾰루지가 무척 신경 쓰입니다. 약간만
건드려도 통증이 있어서 씻을 때를 포함해서 일상의 삶에서 불편을 많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약간 붉고 조금 부었다는 것 정도로, 거울을 봐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거울을 보면서 확인할
정도로 코의 뾰루지가 제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문득 지난달 오십견 때문에 어깨 아팠던 것이 떠오릅니다. 어깨 아픈 것에
비교할 때, 이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어깨가 별로 아프지 않으니까 뾰루지가 더 아픈 것처럼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요.
조금만 과거의 시간을 바라본다면 지금의 상황도 별 것 아닌 생각을 할 수
있는데도, 우리들은 지금이 최고의 어려운 시간으로 생각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내가 받은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적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냐며 화를 내고 더 심해지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단언을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크게 생각해서 주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는 어떨까요? 내가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느낄 수 없겠지만, 조용한 묵상 가운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너무나도 많고 큰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은 보지 못하고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억울하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만 탈렌트라는
빚을 진 사람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는 임금님이 등장합니다. 탈렌트라는
당시의 화폐 단위를 이해하지 못하실 것 같아서 쉽게 설명 드리면,
1탈렌트는 대략 금 34Kg에 해당합니다. 요즘의 금 시세가 1g에 5만 원 정도
하니까, 엄청난 액수이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해준 것입니다. 어떻겠습니까? 정말로 기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는 100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둡니다.
1 데나리온은 당시 일일노동자의 하루 임금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현재로
환산해서 최저임금 6,030원, 그리고 하루에 8시간 일한다고 생각하면
약 5만 원 정도의 금액이 나옵니다. 즉, 그는 5백만 원 정도의 빚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역시 적은 액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금 34만 Kg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비교자체가 되지 않는 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은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훨씬 적은 액수를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어마아마하기에 자신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갚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아예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이 극복되니까 현실의 상황만
보입니다. 즉, 자기의 빚은 보이지 않고, 자기에게 빚진 사람이 눈에 보인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받은 것들이 참 많습니다. 숨을 쉴 수 있는 공기,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물,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빛과 잠을 잘 수 있는
어둠, 외롭지 말라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 어렵고 힘들 때 힘이 되는
교회 등등……. 생각해보니 정말로 많습니다. 어느 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갚을 하라고 하신다면 어떨까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실로 다가오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냥 포기할 뿐입니다. “알아서
처분하십시오.”라는 마음이겠지요.
그런데 갚을 안 하시겠답니다. 그냥 공짜로 주시겠답니다.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며, 너무나 감사하다고 생각한다면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인가요?
너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너보다 강하거나 약했다. 그가 너보다 약했으면
그를 용서하고 그가 너보다 강했으면 너 자신을 용서하라.(세네카)
어제는 동창모임이 있었습니다. 함께 저녁기도 바치는 중.
내가 버려야 할 마음의 옷
언젠가 책을 읽다가 너무 공감 가는 내용이라 스크랩 해 놓았는데, 어떤
책인지가 기억나지 않네요. 그래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그
부분을 그대로 올려 봅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옷 중에서 벗어버릴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잘못을 모르고 남에게 자기 잘못을 전가하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평가를 부당하다고만 생각한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두꺼운 옷을 벗어야 한다.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남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우울함을 자신에게 쌓아두게
된다.
셋째, 자기중심적인 사고, 이기적인 마음을 벗어버려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갖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멀어서 세상이 보이지 않거나 보여도
왜곡되게 본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이 떠나가기 시작한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려는 마음을 벗고 과감히 그런 것들을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해지고 홀가분해지며 행복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물론 가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잠시 머무는 기쁨일 뿐이다.
동창모임을 했던 소성성당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순 제3주간 화요일
2016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25.34-43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성지순례를 하면서 많은 분들이 ‘울컥’하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기도하셨던 ‘광야’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골고타
언덕’입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저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묵상하면서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삭막한
광야에는 머물 곳도, 먹을 것도 없듯이, 인생이라는 광야에서도 많은
유혹과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랐습니다.
조용한 성당 안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잡한 시장을
걷기도 하였고, 무심한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예루살렘 부인들을 묵상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를 지면서 키레네 사람 시몬을
묵상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 성녀를
묵상하였습니다. 살면서 너무나 많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야유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살면서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께 조롱과 멸시를 보내곤 했습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던 베드로 사도처럼 나 역시도 부인하고,
배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오늘도 모든 것을 품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허물과
잘못을 품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다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장구벌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선배들이
어느 날 허물을 벗어버리고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부러워하던 장구벌레들의
이야기입니다. 물속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영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물속에 있는 장구벌레들은 물 밖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배들은 물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 밖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려 줄 수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되면
반드시 물속으로 돌아와서 알려주리라고 결심한 장구벌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자리가 되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속의 장구벌레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말고, 반드시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늘을 높이
나는 잠자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세상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처벌과 제제는 법과
규칙의 문제입니다. 사회는 이와 같은 법과 규칙이 있어야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양심과 내적인 자유의 문제입니다. 처벌과
제제는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주거나,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에, 내적인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손자를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세상을 비관한 젊은이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였고, 손자는
그 차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젊은이는 처벌을 받아 감옥에 갔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손자를 잃어버린 슬픔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가족들과 함께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젊은이를
찾아가서 ‘용서’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용서를 한 후에 가족들은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 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 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늘관계 이웃관계
2016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하늘관계 이웃관계
하늘세상 주인님은 나누고 베푸는 사람에게 나누고 베풀어주십니다.
세상만 아는 사람은 나누고 베푸는 사람에게서 더 뺏으려 덤벼듭니다.
사람의 실체는 하늘나라가 고향인 영혼이며 육신은 세상의 것입니다.
세상은 도둑질 한 사람의 몸에게 죄를 묻지 않고 사람 실체가 집니다.
영원세상도 시체에게 잘잘못 안 묻고 잘잘못은 실체인 영혼이 집니다.
사람의 영혼은 세상사는 육신의 삶(인생)으로 가꿔진다고 알려줍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오 18,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옹졸함과 냉정함을 넘어 나누는 자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 18,21-35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옹졸함과 냉정함을 넘어 나누는 자비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에 우상숭배를 거부하다
불가마에 던져진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서 유배로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에게서 자비를 거두지 말아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다니 3,34-35). 그는 백성들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고,
온 백성이 희생 제물이 되어 온전히 따르게 해달라며 주님께 자비를
청합니다(3,39-40).
오늘 복음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큰 빚을 진 종은 주인에게 다 갚을
때까지 참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노동자가 안식일을 빼고
20여 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빚을 탕감해줍니다(마태 18,27). 그가
청하지도 않았으나 “가엾은 마음이 들어” 탕감해준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자비는 한이 없고 먼저 다가가 헤아려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동료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다 갚으라고 다그쳤고, 동료가
엎드려 갚을 때까지 참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8,30) 그는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입은 엄청난 자비를 까맣게 잊고 작은 빚을 진 동료를
냉정하고 옹졸하게 대했습니다. 혹시 나에게도 이런 냉정함이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죄를 짓고 영혼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비유의 주인처럼
우리가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감싸주십니다.
죄에 무감각해져 자신이 죄 중에 있는지, 또 얼마나 큰 용서를 받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입니다. 모든 것을 당연시하며 그저
그렇게 무난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1독서의 아자르야의 고백처럼 그분의 자비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세상살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공기, 땅, 햇빛,
동료 피조물들, 시간과 공간,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 어느 것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하느님 찬미는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재물과 권력, 명예, 능력을 지니게 되면 마치 자신이 주인이 된 듯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가 주인이 되어
무엇인가를 베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한없는 자비를 전하고 나눌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너그러워서 베푸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자신의 잘못에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다른 이들의 사소한 잘못에는
냉정하고 엄격한 잣대를 내미는 버릇을 버리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살 수 없고,
자비를 나누고 용서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와 용서를 나누지 않는 것은
주님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한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그 자비에 엎드려 감사드리며,
옹졸함과 냉정함을 버리고 따뜻한 자비심으로 서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18,35)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아자르야의 진실하고 간절한 자비의 기도를 바쳐보시지 않겠습니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많지요?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는 더 많구요.
만약에 하느님께서 이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마저도 마음대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없나 봅니다.
우리의 주도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먼저 내 죄를 아파하고 용서받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고 싶지 않은 사람을 용서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자기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백성사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보통 기도와 희생, 돈으로 보속하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효험이 있는 보속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가 용서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는 몇 십배, 몇 백배로
내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니 남을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몇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즉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니까요.
오늘 용서야말로 가장 큰 은혜요 축복임을 가득히 체험하는 날 되소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 3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 35)
하얀 눈 속에서 봄인사를 드립니다.
생명의 계절 3월 첫날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사랑과 생명이 하나이듯 용서와 행복은 하나입니다.
용서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오늘답게하는 가장 강력한 선물은 바로 용서입니다.
저마다 아버지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부끄러운 우리의 삶임을 고백하게됩니다.
이 사순시기는 용서의 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건 참으로 소중한 용서의 가치를
정직하게 우리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상처주고 상처받은 우리마음을 되살리는 건 언제나 진심어린 용서입니다.
용서는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서로를 살리는 것이 용서뿐임을 가르쳐줍니다.
이미 용서를 받은 우리들이 형제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오늘복음은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맡기는 것이 용서입니다.
원망으로 가득찬 우리의 자아를 맡기지 않고서는 용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당신 마음을 보여주셨듯이
용서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먼저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되돌려놓는 것은 용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용서의 시간
용서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용서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듯 용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신뢰하는 용서의 사순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3월1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 18,21-35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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