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 닭 -
☆ 2016년 다해 3월22일 화요일 [(자) 성주간 화요일]
[수도회] 사랑으로 추종하는 예수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9,1-6
† 복음 요한 13,21ㄴ-33.36-38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함께하시며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드러내실
때, 인간의 나약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나타납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배반은 동기에서나 결과에서나 사뭇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 앞에서는 너무나 약한 육신의 징표입니다. 유다의 배반이
돈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같은 그릇된 열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로 하여금 악에 대한 저주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찬 열정은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요? 열정이라면 베드로가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그 배반의 밤을 이겨 내지 못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오직 신앙으로만, 그 수난의 밤이
예수님께 영광의 밤이 되고, 십자가의 형틀이 영광의 왕좌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불가능한” 도식에 들어가야 신앙의 자락을 잡을
수 있습니다.
“때는 밤이었다.” 요한은 시간을 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유다가 이미
넘어져서 구원의 희망이 없이 어둠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알려 줍니다. 이제
밤이 되었고, 예수님의 활동도 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의 길을 살고 있을꺼요?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복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1ㄴ-33.36-38
학창시절에 선생님께서는 종종 시험문제에 대한 힌트를 주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가 너희에게 오늘 가르쳐 준 문제와 똑같은 문제를 이번 시험에 출제해도
틀리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틀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시험문제를 풀면서
‘이 문제는 바로 며칠 전에 선생님께서 강조하면서 가르쳐 주신 것이잖아?
그때 말씀하신 것처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내셨는데 과연 틀리는
멍청한 사람이 있을까?’ 라면서 자신 있게 답을 적었지요.
제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멍청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제가
과감하게 틀리고 만 것이지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답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제의
중요성만을 기억하고 있었지, 엉뚱한 답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문제만 알아서는 정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문제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 내가 아는 문제인데....’라고
아무리 힘주어 말한다고 해도 정답을 모르면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내 주십니다.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에 대해 미리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답도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정답을 모르는 척
합니다. 즉, 정답대로 살지 않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안 그러셨을까요? 그러나 그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정답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도 그렇지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정답이 아닌 오답의 길로, 그래서 예수님을 은전 삼십 냥에 넘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오답인 배반의 길을 향해 갈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을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지요. 미리 배반을
막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유다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배반할 제자가 있음을 그의 앞에서 말씀하셨고, 빵을 적셔
주면서까지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힌트를 주고 기회를 주셨음에도 그는 마음을 바꿔서 오답에서 정답의
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틀린 오답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주님께서는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하시지요.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의 길을 살고 있을까요? 정답을
가르쳐줘도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서 오답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마음을 바꿔주시길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한 사람도 얻지 못하지만 한 마음을 품으면 백 사람을
얻을 수 있다(회남자).
봄이 왔습니다.
소유가 먼저일까요? 사랑이 먼저일까요?
캐나다 토론토에 커다란 화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화재를 쉽게
진화할 것이라고 예상했지요. 더 큰 불에도 불구하고 소방관들이 쉽게
화재를 진화하는 것을 많이 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이 불은 쉽게 진화되지 않았습니다. 300명의 소방관이 투입되어 여덟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겨우 진화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어렵게 진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강풍과 복잡한 건물 구조
등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사람들이 모아 두었던
산더미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모든 물건들이 오히려 위험이
된 것입니다. 소유가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 같지만 더 큰 불행으로
이끌어주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소유가 늘어나면 늘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소유가 먼저라고 하면서 사랑을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가족 안의
사랑도 돈 먼저 벌고서 하겠다고 말하며, 이웃을 향한 봉사와 나눔 역시
충분한 소유를 갖게 된 후에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날은 과연
올까요?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애를 썼던 한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날도 열심히 직장에서 일을 하고 피곤한 몸을 끌고 집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을 반겨주지 않더랍니다. 텔레비전에만 집중하면서
자기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무성의하게 다녀오셨냐는 말만 하는 아내와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이 밀려들었습니다. 심지어 키우던
강아지가 자기를 보고는 마구 짖더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늘어나도 사랑이 없어지면 어떨까요? 뒤로 미뤄서는 안 될 것,
분명히 사랑입니다.
어떤 길로 가시겠습니까?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주간 화요일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 13,21ㄴ-33.36-38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 없다고 합니다. 조직이 커지고, 구성원이
많아지면 원래 추구하던 이상과 이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곤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였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 이웃의
발을 씻겨주는 일, 친구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달콤한 열매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환호, 놀라운 치유의 기적,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서
차지할 자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집안의 어른들이 신학생 때부터 제게 들려주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사제직을 그만 두게 되면 현실의 삶에서 고생을 해야 합니다. 사제직을
그만두고 부유하게 살면 안 됩니다. 사제직을 그만두게 되면 현실의 삶에서
보속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로부터 받았던 기도를 보속으로 되갚아야
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넘치는 은총을 가난한 삶으로 되갚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받을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야 공평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배반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처절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유다는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회개한 다른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오늘 우리는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누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 민족들의 빛이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유다를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고,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의 삶이 전혀 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며 또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희망을 버렸던 유다는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다는 쓸쓸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완벽하게, 깨끗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께 꾸지람 듣지 않도록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예수님께 꾸지람 듣지 않도록
조변석개(朝變夕改)라든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결심이나 결정할 때 즉흥적으로 해버리는 습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런 습성을 인정하며 함부로 잘 난체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초월 능력자는 자유라는 콘덴서를 통과 전과 후를 동시에 봅니다.
이런 능력자 예수님의 제자로 있던 베드로는 우리대신 야단맞았잖아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꾸지람 듣지 않도록 늘 당당하면 좋죠.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7~38)”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사랑으로 추종하는 예수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요한 13,21-33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
사랑으로 추종하는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배신할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깊은 고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13,21)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아시고 ‘마음이 산란하시어’(13,21) 몹시
고통스러웠음에도 우정의 표시로 ‘빵을 적셔주십니다.’(13,26) 배반한
유다가 회개하도록 사랑을 건네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밤에 예수님을 팔아 넘겨버립니다. 어둠 속에 있던 그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참 제자로서가 아니라 탐욕과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진정 자신 전부를 바쳐 따르는 스승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욕망을 통해 비추어 본 메시아의 허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끝까지 배반한 유다의 종말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서야 뉘우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마태 28,3-5). 그는 어둠을 택함으로써 어둠 가운데 머물렀으며,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13,36) 하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이는 누구나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13,37) 하고
장담하지만, 예수님의 예언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13,38). 예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마르 14,50-51).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도 유다처럼 교만과 탐욕, 이기심을 끌어안은 채 예수님을 섬길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힘과 의지로 그분을 추종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엄청난 착각이요 영혼의 어둠과 죽음을 부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추종은 오히려 그런 것을 모두, 그리고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일시적인 감정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으로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 추종은 내 힘과 의지,
그리고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과 사랑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도 나 자신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나의 의지와 교만한
마음을 비우고, 매순간의 수고로움과 불편함, 고통과 아픔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견디는 참 제자로 살았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사 49,4)
여러분은 삶에 지쳐 힘이 다 빠져가고 있나요?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되는 것은 별로 없고
힘만 들고 지쳐 쓰러질 지경인가요?
그렇다면 나의 힘을 어디다 그리 열심히 썼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돈 버는 데. 자식 공부시키는 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데. 운동하는 데...
그런데 돌아보면 너무도 허무하지요.
지금 여기에 오려고 그 헛고생을 했나 싶지요?
살아보니 별 것도 아닌데 너무 아웅다웅하고
쓸데없이 고민하고 헛군데에 신경을 다 써버린 것은 아닌지요?
얼굴에 주름이 가득 패이고
머리는 다 빠지고 온 몸은 여기저기 병들어 있고...
사실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데는 하느님이고
그분이 내 생명의 주인이신데 헛군데 의지하며 살아온 결과가 아닐른지요.
성주간에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나는 누구에게, 무엇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지하고 돈과 명예와 권력에 의지하는 한
우리는 헛수고만 하고 헛고생만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이 나의 유일한
방패시요 구원임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헛군데 힘 빼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힘을 얻도록 합시다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 38)
우리의 배신속에서도 함께하실 예수님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것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이렇듯 고뇌와 좌절을
맛보게하는 성숙의 닭울음 소리가 될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지만 다 포기할 수 없는 우리들의 본성입니다.
모든 걸 바치며 따르겠다는 약속또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배신과 배반은 오히려 포장된 자아의
껍질을 벗겨버리는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어느날 그렇게 가까웠던 예수님이
갑자기 낯설게 보이게하는 우리들의 완고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같은 마음이십니다.
변심과 배신의 시간을 우리들또한 거치며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함께한다는 것은
변심과 배신의 시간까지도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성주간이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믿음과 배신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우리를 정화시켜주시는 유일한
십자가의 힘을 우리는 진심으로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 13,21ㄴ-33.36-38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본격적인 수난을 앞둔 성주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도 참!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끔찍하게도 내 운명이 어디까지인가?
내 최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것을 불을 보듯이 환히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이 저녁식사가 끝나면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시간이 다가오고, 그걸로 내
좋은 시절은 끝난다는 것, 곧이어 원수들이 들이닥쳐 나를 체포할 테고,
적대자들 가운데 내가 사랑했던 제자도 한명 끼어있을 것이고...
또한 체포 후에 진행될 참혹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주먹세례, 채찍질, 비아냥, 침뱉음, 가시관, 그리고
십자가...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아무리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양이니, 아버지
뜻에 순명이니 하는 대의명분이 있다 할지라도 우선 두려움에 지레 겁에
질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묵묵히 아버지께서 준비해놓으신 그 살 떨리는
‘잔혹사’를 묵묵히 수용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을 고스란히 지니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우셨으면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복음 22장 42절)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복음 22장 42절)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다 포기하신
예수님께서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시기 직전 당신 제자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십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 앉아있던 세 제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자칭 ‘애제자’였던 요한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연인(戀人)도
그런 연인이 없습니다. “제가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요한복음 13장 23절)
참으로 특별한 상황 설정입니다. 아마도 애제자(愛弟子) 요한은 남자였지만
타고난 여성성과 감수성을 통해 벌써 짐작한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떠나실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제자들 보기 민망스럽기도
했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스승님 가까이서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끔찍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애제자가 분명합니다.
반면에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충우돌의 명수 베드로 사도를 한번
보십시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
이 밤이 지나가고 미처 동이 트기도 전에 스승님을 배신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복음 13장 37절)
또 다른 한 제자 유다를 한번 보십시오. 몸은 비록 스승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석상에 앉아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적대자들과의 미리 짜둔 각본, 긴히 쓰이게 될 사업 자금 은전 서른 냥,
적대자들과의 접선 장소 어디, 접선 시간은 몇 시...제발 이 비밀이 들통
나지 말고 잘 성사되어야 할 텐데...유다는 머릿속으로 이 비밀 작전을
성공시키려고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 작업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한 유다였습니다.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자 유다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이미 그의 본심을 꿰뚫고 있었겠다, 공개석상에서
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함구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열한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배반자였는지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막가는 인생이었던
유다의 말도 안 되는 결정까지 존중해주십니다. 끝까지 그의 회개를
기다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전례력으로 가장 정점에 위치한 성주간입니다. 죄인인 우리 인간을
향한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 바보 같은 사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묵상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배신의 죄보다 큰 사랑|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3월22일 성주간 화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 13,21ㄴ-33.36-38
배신의 죄보다 큰 사랑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 것을 보면 인정받던
제자입니다. 그가 유감에 빠져 배신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이 없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 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에 따르는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용서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제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눈에 뛰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 부끄러움이 없이 묻고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주님과
소통을 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자책으로 목숨을 건 유다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결국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과의 끊임없는 소통입니다. 주님과의 대화로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