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왕 예수 -
☆ 2016년 다해 4월7일 목요일
[(백)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일]
[수도회] 땅에 속한 내가 건너야 할 다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5,27-33
† 복음 요한 3,31-36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성인은 1651년 프랑스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 때부터 사제 수업을 시작하였으며,
27세 때 사제품을 받았다. 성인은 특히 청소년 교육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교 설립에 일생을 바쳤다. 또한 동료들과 함께 수도 공동체를 시작하여
많은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1719년에 선종하였으며, 1900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요한 밥티스타 성인을 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공포하였다.
◈ 오늘의 묵상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를 냉정히 분석,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또한, 낯선 곳에 가서 길을
물어보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간혹 있지 않습니까? 자신도 잘 모르면서
엉뚱한 곳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정확하게 알려면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일을 알아보려면
그곳에서 오신 분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온전히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하느님에 관해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들이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막상 예수님을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증거는
오직 자신의 삶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으로써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하느님의 참된 뜻을 더욱 널리 전파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2016년 다해 4월7일 목요일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27-33
복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6
저는 아침마다 성지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성지에 무슨 문제가 없나 살피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쓰레기를 많이 줍게 됩니다. 특히 요즘에는 순례객들이
늘어나면서 버려진 쓰레기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려집니다. 그날도 성지 곳곳을 살피려고 사제관
문을 나와서 성지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떨어진 종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밤이슬에 흠뻑 젖어서 축축한 종이를 주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종이를 버리셨다고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까요? 제가 그리 착한 신부가
아니라서 아직은 쓰레기들을 주우면서 감사하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대신
약간의 화가 나면서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저 멀리에 종이가 또 떨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도 쓰레기를
버리셨구나.’하면서 주우러 갔는데, 이번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종이와 같은
쓰레기인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버려진
종이와 똑같이 밤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초봉헌함에 넣었지요.
왜 똑같은 종이인데 마지막에 향하는 곳이 다를까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돈이 아무리 밤이슬에 흠뻑 젖어서 축축하다 하더라도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이 가치를 떨어뜨려보겠다고 마구 짓밟았다고
1,000원짜리 지폐를 900원으로 쳐 주지 않지요. 이를 기억하면서 우리
인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으면 합니다. 다른 이에게 폭력을 당하고 무시를
당했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져 하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가치, 우리의 행복은 다른 이들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더 소중한
존재인지를 밝혀주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주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군가를 믿고 사랑할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사랑한다면 상대방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즉, 믿고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겠지요.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주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의 가치를 높이고 높여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귀한 내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더욱 더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혹여 잘못되거나 실패할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방향이라면 나름대로 걸어갈
수 있는 법이거든.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마지못해 걷는 길이 가장 괴로운
거지(곤도 후미에).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가치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평범한 철봉은 5달러다. 하지만 이 철봉으로 말발굽을 만들면 그 가치가
50달러다. 이 철봉으로 바늘을 만들면 그 가치가 5천 달러다. 정교한 스위스
시계의 용수철을 만들면 그 가치는 무려 50만 달러다(소천, ‘이리 찬란해도
되는 겁니까?’ 중에서).
같은 재료이지만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실제로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 할지라도 유전자로 따지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하긴
침팬지와 유전자 차이가 1.6% 밖에 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본 기억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내 가치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믿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올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만 생각할까요?
내 자신이 주님을 향한 믿음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가치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것입니다.
내 자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부활제2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4월7일 목요일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일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 3,31-36
요즘, 한국의 신흥종교에 대한 연수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삶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종교는
지치고 외로운 이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종교는 오직 인간만이 믿습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예비자 교리시간에 사이비 종교와 올바른 종교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는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아서 한 사람의 인격을
파멸의 길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바른 종교의 4가지 조건을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창시자입니다. 부처님, 예수님, 마호메트와 같이 창시자가
명확해야 합니다. 또한 그분들의 삶이 참된 지혜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창시자가 명확하지 않은 종교는 올바른 종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경전입니다. 불경, 성경, 코란과 같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경전이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경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경전을 통해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회성입니다. 종교는 독단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담아내야 합니다. 불쌍한 이웃을 돌봐야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부끄러움을 뉘우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겸손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내세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의 고통을
견딜 수 있고, 그래야 지금의 행복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사도들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어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너의 만남, 오늘날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영성의 세계에서는 다
만남입니다. 만남 속에서 성장하며, 만남에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평생
볼 수 없는 얼굴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얼굴은 직접 보지 못합니다.
거울을 통해서 봅니다.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타인을 통해서 봅니다.
우리는 4개의 창으로 서로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내가 있습니다. 열려진 나입니다.(Open)
이 지평이 넓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서로를
신뢰하였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Hidden) 오늘
제1독서에서 사두가이파 사람과 경비대장들은 제자들이 아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려했고, 제자들의 말을 이해자지
못했습니다. 이런 만남에서는 진정한 나눔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나!’
세 번째는 나는 모르는데 남이 아는 내가 있습니다.(Blind)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은 나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나를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어떤 배우자는 남편이 다 잊어버린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고 싸움은 더욱
심각해지곤 합니다.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는 고집도 없고 나름 유하고 부드럽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내가 꽉 막히고 융통성이 없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나도 나를 모르고, 남도 나를 모르는 경우입니다.(Dark) 예전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의지대로 향하지 않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남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은 해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물을 달라!’
고 하십니다. ‘너의 갈망을 달라!’고 하십니다. 무엇인가 갈망이 있습니다.
마중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너의 갈망을 달라. 네가 너에게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 물은 네 안에서 샘솟는다. 내가
부어주는 것이 아니다. 네 안에서 샘이 솟는다.’고 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을 알고, 인격적인 하느님을 만나야 목마르지 않습니다. 삶의
자리에 복음이 없다면 외롭습니다. 영적인 샘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더불어 살면서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성이 빛을 보며, 우리는 성장해 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믿기만 하면 되도록 전해주신 성경
2016년 다해 4월7일 목요일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일
믿기만 하면 되도록 전해주신 성경
제자들 중 막내 사도요한의 상징은 독수리로 높은 시야를 뜻합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빛 말씀 아들로 참 실감나게 표현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초자연적 관계를 직설적이며 간단하게 말입니다.
다른 3복음서와는 다른 형식으로 구사한 점이 어울리며 감탄스럽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님이시고 하느님의 표현인 사랑이시라니 참.
제자들 모두가 이렇게 믿기만 하면 되도록 전해주신 점 감사합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요한 3,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땅에 속한 내가 건너야 할 다리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4월7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땅에 속한 내가 건너야 할 다리
땅에서 나 땅에 속한 인간으로서 땅에 속한 것을 말하며 살아가는(3,31)
우리가 인간다워지고 행복해지려면, 하느님을 갈망하고 ‘위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땅'과 '위',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난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으니 문제입니다. 이
거리좁힘이 영성생활의 과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땅에 속한 육(肉)의
존재요 육적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곧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자 생물학적인 욕구를 충족하며 살아가는
자연적인 존재이지요. 이 때문에 사람들은 고민하고 갈등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와 ‘위에서 오신 분’ 사이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해방되려면 ‘위에서 오시어
모든 것 위에 계신’(3,31)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며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영의 존재로 새롭게 살지 못하는 것은 시선이 ‘위’ 곧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집중하지 않기 때문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망각한 채 자신에 몰두하고 세상일에
대한 근심 걱정 속에 살아가며, 온갖 애착과 탐욕에 눈길을 둘 때 어둠을
체험합니다.
위에서 오신 분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그분께 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의식 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의 관심사, 나의 욕구
충족, 내 몸 돌보기 등 나 자신에 관한 것을 먼저 추구하며 살아가는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제 다시 시선을 위로 돌림으로써 행복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야겠습니다.
나아가 복음은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주신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3,32-34).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문자화된 말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과 삶 전부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철저히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내 영혼에 빈자리가 있어야 할 터이니 이 또한
회개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3,11) 예수님의 삶을 실제로
실행하며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8,12). 말씀이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할 때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는 말씀이지요.
우리 모두 비록 땅에 속해서 땅에 속한 것을 말하고 자주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아가지만, 이제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찾아
떠나야겠습니다. 위에서 오신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육의 정신을
버림으로써 새롭게 영으로 태어났으면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며, 애착을 끊고 자신의 욕구를
희생함으로써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땅속 어둠을 건너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건너가는 복된 날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4월7일 목요일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일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 3,32)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잘 아십니까?
누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장 잘 알까요?
성경 공부를 많이한 사람, 신학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성당에 오래 다닌 사람, 성직자나 수도자...?
글쎄요. 지식적으로는 우리보다 조금 더 알지는 모르지요.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곳에서 살아 본 사람, 거기서 온 사람이 아닐까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런 저런 정보를 가지고 연구해서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게 아니지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보셨나요?
가보지 않고 성지가 이렇니 저렇니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만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나 적어도 그곳을 몇번이나 다녀 온 사람보다
제대로 알 수는 없겠지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요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들려준 하느님 나라를 알 뿐입니다.
그분과 가깝고 친할수록 하느님 나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겠지요.
그분과 친구요 형제가 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잘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배워 알게 된 여러분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니 축복합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의 시민답게 품위있게 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요한 3,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4월7일 목요일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요한 3, 34)
최고의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시작되고 말씀으로 마감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말씀은 그 누구의 길도 아닌 우리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순종은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기에 한량없는 성령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분산되어있는 우리의 내면까지도 일치시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만나고 말씀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은총이 됩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느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충만한 순종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삶이
이루어졌음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결국 말씀이었음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4월7일 목요일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기념일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 3,31-36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다.
집회서를 보면“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6-15-17).고 적혀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신중한 처신이 요구됩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여기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의 생명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생명의 완성입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그분이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도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깨우침을 주면 계산하지 말고 먼저
받아들여야 더 큰 것을 알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위에서 오신 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고
오신 분, 아버지의 사랑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느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믿음 안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영생을 기뻐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혼자만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면 할수록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위인들 중의 한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삶을 갈망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
보다는 멸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22,14)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로 초대받았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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