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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4월24일 주일 [(백) 부활 제5주일]
[수도회] 조건없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4,21ㄴ-27
○ 제2독서 묵시 21,1-5ㄴ
† 복음 요한 13,31-33ㄱ.34-35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사도들의 선교 활동으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사도행전이 보여 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십니다.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시려고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셨지요. 그러기에 내면에서 나오는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진실한 대화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랑을 언어로써 표현하지요. 사람의 생각이 말로
표현되는 만큼 마음가짐이 올바른 사람은 언어와 행동마저도 올바릅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품위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과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티끌만 한 것이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도 있지요. 문제는 ‘알고 있는 사실이나 말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정직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서로에게 신뢰심을 갖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말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무의식적이거나 부주의에서 오는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이런 행동은 남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참되고 성실한 대화만이
사랑과 신뢰를 쌓아 가는 지름길임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로를 이해하고
2016년 다해 4월24일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21ㄴ-27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21,1-5ㄴ
복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3ㄱ.34-35
언젠가 아는 지인들과 차 한 잔 마시기 위해 어느 카페에 갔다가 본 한
연인이 떠올려집니다. 저희 일행의 숫자가 많아서 꽤 넓은 자리가 필요했고,
그래서 비어 있었던 이 연인 옆 테이블에 앉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목소리들이 너무 커서, 먼저 와 있었던 이 연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제 일행들에게 우리 목소리가 너무 커서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조금만 조용히 이야기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연인 중의
남자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대화 나누세요.”
이해해주는 이 연인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광경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아주 시끄럽게 대화를 나눠서 누구나 다 들을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이 연인의 대화는 하나도 들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니 옆에서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반대로 사랑할
때에는 아주 자그마한 소리로도 충분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바로 가슴이 닫히고 열리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싸울 때에는
가슴이 닫혀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사랑할 때에는 가슴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소리가
잘 들릴 수밖에 없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가슴이 활짝 열린 사랑이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가슴을 꽉
닫아 놓고서는 사랑이 없다고, 사랑하기 힘들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5시 미사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지금 12시 50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더 힘줘서 “아닙니다. 분명히 12시 50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자들은 “아니에요. 지금 5시 25분이에요.”라고 하십니다. 저는 성당 뒷면에
있는 시계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시계에는 분명히 12시 50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멈춰진 시계의 시각을 읽는 것은 틀린 시간을 말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시계가 멈췄다고 세상의 시계가 모두 멈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시계와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역시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내 가슴이 꽉 닫혀서 사랑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주님의 사랑이 없어진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우리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세상이 아니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이 따뜻한 마음을 잃는다면 무엇보다 그 자신의 인생이 외롭다(칼 힐티).
어제 있었던 토요특강도 잘 끝났습니다.
빈 배(장자)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인 것 같아서 그대로 적어봅니다. 나의
마음이 빈 배처럼 맞서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석에 핀 예쁜 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조건없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 - 기 프란치스코신부
2016년 다해 4월24일 부활 제5주일 요한 13,31-3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조건없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
예수님께서는 이제껏 세상을 향하여 설교를 하셨으나 아무 결실 없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12,36-43). 이제 그분께서는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13,1), 당신 자신을 내어주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하시며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13,1-30).
그리고는 유다가 떠나가 버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했는지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새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거나 동포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 19,17-18)는 유다교 전통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곧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자신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는 것과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계명은 사랑의 출발점과 기준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 계명은 예수님의
조건없는 자기 봉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새로운 척도와
본질을 제시해줍니다. 그 사랑은 매우 적극적이며 모두를 사랑으로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히 하느님의 뜻, 곧 자비와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오직 인간의 행복과 생명 공동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자기 봉헌이야말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한 그분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에게 전부를 내어주는, ‘철저히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그래서 늘 자신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과 차별을 겪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돈과 명예, 권력의 추구,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 경쟁의
추구와는 무관합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공동선을 위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우선 선택하셨으며,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는데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감성적인 분노의 폭발이나 인간의 힘에 기댄 저항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실현하기 위해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서만 가능한 십자가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요. 이제 자기만 알고
손해보지 않으려 하며, 오해받고 무시당하면 발끈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해주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할 때입니다. 자존심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오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을 나의
사랑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아, 서로 앞을 다투어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15,13) 거룩한 바보의 사랑을 하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4월24일 부활 제5주일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3-34)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제서야 살아계실 때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하게 됩니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처럼 영원히 같이 있어줄 사람은
하나도 없기에 있을 동안 최선을 다해 잘해야 하는데
뭐가 그리 살기 바쁘다고 그게 잘 안되지요?
어쨌든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서 있을 때 잘할 걸~ 하고
울고만 있다고 부모님이 살아오시지도 기뻐하시지도 않을 겁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내가 남아있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잘하기만을 바라실 겁니다.
니가 정말로 있을 때 잘 못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같으면
이제는 정말 그러지 말어~ 그러시겠지요.
예수님도 오늘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내가 곧 떠난다. 그렇다고 울고불고 야단떨지 말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고들 살어~~~"
오늘 내가 더 사랑하지 못해서 아쉽고 죄스러운 마음이 있다면
그 때문에 괴로워말고 더 사랑하도록 합시다.
사랑이 부족해서 저질은 죄는 사랑을 통해서만 보속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부족해 아파하는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당신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4월24일 부활 제5주일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의미를 찾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려놓게 하는 건 우리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서 분노와 미움을 체험하는 우리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다름아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갇혀 있는 우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것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려 하셨습니다.
서로를 가리키는 시선이 판단이 아니라
진심어린 사랑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한걸음씩 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사랑이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 가장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품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사랑의 존재들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생명이 삶이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새 계명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4월24일 부활 제5주일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 13,31-33ㄱ.34-35
서로 사랑 하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에페소서 5장2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 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 놓으신 주님께서는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왜 새 계명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그런데 그 중심을 보면 ‘내 중심’입니다. ‘너 자신처럼’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으로 사랑을 시작 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예수님의 시대에 옛 계명이 다시 주어졌으니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새 시대가 주어졌는데 새롭게 살아가라. 알고 있는 것이
앎 자체가 아니라 아는 바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서로 사랑하여라.” 는 말씀 중에 ‘것처럼’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은 결국 희생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젊은이들의 혼인을 준비하면서
사랑이 무엇이냐? 고 묻게 됩니다. 그 대답은 다양하지만 ‘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다.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 싶은 것, 주어도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품’에 대한 대답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랑은 일방통행일가요? 쌍방통행일까요? 하면 대부분은
“상방통행”이라고 답합니다. 모순되는 대답을 합니다. 이 답에는‘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갈려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거룩해서, 큰 공로를 세워서 사랑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바로 그분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부족함 때문에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13절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필요충분
조건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많은 지식, 교양이 있고, 거룩한 체험을 하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제자가 됩니다. 결국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의 휘장을 달고 다녀야 합니다.
익명의 성인은“우리가 사랑하는 성인들과 함께 천국에서 사는 것, 그것은
가장 순수한 영광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성인들과 함께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매일 같이 백색순교를
요구하는 인내의 삶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인내를 가지고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하는 곳에 하늘의 문은 이미 지상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노래는 그 노래가 불리어질 때까지 노래가 아니다. 종은 그 소리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요, 사랑은 사랑이 나누어질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
(송봉모). 라고 했습니다. 입술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치매의 마지막 단계의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치매의 마지막 단계의 증상은 ‘부부사이’ 가 갑자기 좋아지는 것이랍니다.
자기 남편이,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인줄 알고 좋아진답니다. 서로 끝까지
사랑 안에, 주님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항구하게 주님 안에 머물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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