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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5월21일 토요일 [(녹)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수도회]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품는 행복한 사람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야고보 5,13-20
† 복음 마르 10,13-16
◈ 오늘의 묵상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그 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손,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던 그 손,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일으키던
그 손을 우리 모두 만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성가시게 나서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복음 선포에 지장을 줄까 봐 제자들은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구약에서도 어머니들은 예언자들에게 아이들을 데려가서 축복해 줄 것을
청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머니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분께 축복을 청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아이들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신뢰하고 예수님께 다가가 축복을 받고자 했습니다.
“곡예사의 도약은 오로지 상대편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리라는 전적인
신뢰에 의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전적인 신뢰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비결이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맑은 믿음을 우리 모두 가져 봅시다.
- 매일 미사 -
◈ [인천] 어린이처럼 많이 웃으면서
2016년 다해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5,13-20
복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여러분은 하루에 몇 분 웃으십니까? 요즘에 별로 웃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웃음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평균 400~500번을 웃는다. 그런데 장년이 되면 이
웃음은 하루 15~20번으로 감소한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서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어린아이는 정말로
잘 웃습니다. 자그마한 행동과 약간의 재미있는 말만 해도 ‘까르르’ 웃는
것이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제가 이곳저곳
특강을 많이 다니는데, 그 자리에 형제님들이 많으면 걱정부터 앞서게
됩니다. 아무리 온 몸을 던지면서 행동을 하고 말을 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형제님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과묵하게 가만히 있는 것을 큰
덕목으로 생각하시는지, 아무런 표정 없이 저만 말없이 바라만 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표정을 보면 ’얼마나 잘 하는지 보자.‘라면서 노려보시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왜 어렸을 때에는 기쁨 속에서 잘 웃던 사람들이 기쁨을 상실한 채
웃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요? 바로 그 동안의 경험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불안과 염려가 웃음을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불안과 염려가 내 미래를
바꿔놓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을 남긴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이렇게 말하지요.
“사람이 하는 걱정 중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으로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불안과 염려로 인해서
쓸데없는 걱정을 가지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단언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노래가사가 생각합니다. 왜 예뻐질까요? 사랑하면
많이 웃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웃는 모습이 흉한 경우는 없거든요.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는 과연 사랑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면 많이 웃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기도할 때 잘 웃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갖 인상을 쓰면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과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랑하는 사람은 좋아할
것 같습니까?
어린이처럼 많이 웃으면서 사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나둘씩 내려놓으면서 말이지요. 그래야 우리의
잃어버렸던 기쁨과 웃음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것이 자기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다.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플라톤).
이렇게 웃는 오늘이 되세요.
부부의 일곱 고개(‘좋은생각’ 중에서)
오랜 세월 함께한 부부 사이엔 일곱 고개가 있다고 한다. 결혼하면 좋을
때나 싫을 때나 다음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첫째는 ‘눈물 고개’다. 신혼부터 3년 동안 넘는 고개로, 크고 작은 어려움을
울고 웃으며 견뎌 내는 과정이다.
둘째는 ‘진땀 나는 고개’다. 3~7년 동안 서로의 단점을 타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위험한 권태기를 넘기기도 한다.
상대를 어느 정도 안 다음에는 ‘투쟁의 고개’가 찾아온다. 상대를 포용하기
위해 스스로와의 싸움이 필요할 때도 있다.
결혼 15년 차쯤엔 ‘결단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상대의 장단점을 인정하고
비로소 보조를 맞춘다. 돌고 도는 시행착오를 겪느라 ‘헛바퀴 고개’라고도
부른다.
다섯째는 ‘따로 고개’로 결혼 15~20년 사이에 온다. 몸은 함께 있지만
정신은 멀리 떨어진 듯 따로따로 사는 시간이다.
여섯째는 ‘통일 고개’로 20년 넘게 산 부부에게 해당된다. 과거의 잘못을
덮고 새로운 헌신과 책임감으로 상대를 위해 남은 생을 바치는 시간이다.
마지막 단계는 ‘자유의 고개’다. 30년이 지나면 완숙의 단계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며 행복을 나눈다. ‘천국의 고개’라고도 한다.
부부가 여러 위기를 견디며 보낸 시간은 행복을 위한 과정이다.
많은 고개를 넘어가면서 만들어가는 부부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느 고개까지 넘어가셨나요? 저는 혼자라... 하나의
고개도 체험하지 못했네요. ㅋㅋ
어제 맛있는 만두국을 먹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품는 행복한 사람들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마르 10,13-16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Jesus Blessing Children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품는 행복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10,15)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영원 행복,
모두가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받아들임이요, 다른 하나는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 차지며 굶주리는
이들이 배부르게 되고, 슬퍼하는 이들이 위로를 받으리라는 행복선언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는 또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된 이들을 무조건
축복해주시는 하느님 자비의 나타남이며 희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인간에서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조건은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과 자비, 진리와
정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불행과 어둠으로 내모는
자해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유다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종종 드러나고, 사회 차원에서 보면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악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취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어떤 때는 영적 동기나 이유를 앞세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있지요.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올바른 태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거저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자기 기준에 따라 가르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알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좋은 것만을 주실 것입니다(마태 7,11).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순수한 수용, 겸손, 전적인 신뢰가 우리가 지녀야 할 신앙의 자세임을
강조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풍속에 따르면 어린이는 순명과 무가치성을 뜻했습니다.
어린이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벌어먹지 않고 순진하게 주는 것을 받아먹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율법 준수로 인한 인간의
공로나 선행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하면 바로 제자들과 같은
몰이해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쌓은 지식과 지혜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우리는 생활의 분주함과 욕망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돌같이 차디찬 마음이 되어 버렸고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할 틈이 없게 되어
버렸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자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신비입니다.
오늘도 순수한 마음, 힘없고 보잘 것 없으며 가난한 가운데서도 자비하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겸손한 마음으로 송두리째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품어 행복한 우리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야고 5,13)
여러분의 삶은 즐겁고 행복합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때로는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겁니다.
즐겁고 기쁠 때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지요?
그 흥얼거림이 단순히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라면 더욱 좋겠지요.
기쁜 일이 있다면 내 안에만 감춰두지 말고
하느님께 찬양 노래를 드리라네요.
그건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는데
반대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을 원망하거나 힘들다고 짜증을 내거나 술을 퍼 마시면 되나요?
사도는 말하네요. 그럴 땐 기도하라고요.
훨 나은 방법이 아닐까요?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즐거울 때는 찬양 기도 드리고 괴로울 때는 청원 기도 드리고...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축제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복된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그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5)
사랑없이는 제대로 자랄수 없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깨닫게됩니다.
사랑 안에서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모든 것을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맡기는 나라입니다.
어린이처럼 맡길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우리또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처럼 단순하게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체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는 삶의 신비입니다.
삶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단순함의 신비입니다.
작은 것에 충실하고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소박함을 다시 회복하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단순함의 결핍이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어린이처럼
작아지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모든 것을 온전한
신뢰로써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단순한 믿음뿐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기에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과 보살핌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며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믿는 나라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을 온전히 믿을 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자비의 계절에
2016년 다해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자비의 계절에
귀엽게 생긴 어린 손녀를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한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손녀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두 분에게 있어 손녀는 존재 자체로
행복이요 천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손녀가 아무리 투정을 부려도 그것조차 사랑스러웠습니다. 아무리 귀찮게
칭얼거려도 한없이 너그럽습니다. 실수로 애지중지하던 골동품을
깨트렸는데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입장에서는 손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편 103장은 이러한 우리 주님의 속성과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아픔을 없애는
분이십니다. 경각에 달한 우리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우리 머리 위해 씌우는 분이십니다.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는
분이십니다. 우리 잘못을 끝까지 캐묻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분노의
원인을 제공하더라도 끝끝내 우리를 향한 화를 품지 않는 분이십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자비는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는 애끓는 사랑, 온유한 배려, 너그러운 용서로
표현됩니다.
바야흐로 자비의 계절이 도래했습니다. 아시는 바처럼 자비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주제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대? 자비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우리 가정 안에 자비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비의 선교사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자비의 결핍 시대에 우리
각자가 자비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도로 살아달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입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어느
곳이든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7주간 토요일
2016년 다해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며칠 전에 성소 후원회 지구장님들과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피정
중에는 지구장님들과 함께 미사통상문을 읽었습니다. 미사통상문 안에는
삼위일체의 신비, 죄의 성찰, 하느님의 자비, 구원의 역사, 신앙고백, 복음의
기쁨, 공동체의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성찬의
전례가 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미사를 봉헌한 것이
10,000번은 넘을 것입니다. 이번에 미사통상문을 함께 읽으면서 그동안
제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구장님들을 위한
피정이었지만 제게도 큰 도움이 되는 피정이었습니다.
미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며 시작됩니다. 우리 미사의
주인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총이 교우들과 함께 하기를 청하며, 교우들 역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은총이 사제에게도 함께 하기를 청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기위해서는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한 것들을 뉘우치고, 그런
모든 것이 바로 나의 탓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잘못은 든든한
후원자이신 성모님과 성인성녀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전구에 힘을 입어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대영광송은 구원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그분이 영광을 받으셨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제 구원의 역사는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삶의 문제들을
제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표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전의 ‘알렐루야’는 기쁨의 환성입니다. 제2독서는 이제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고난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시련이 있어도, 끝까지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신앙고백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부활하셨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들 또한 구원받을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슬기, 통달,
의견, 지식, 용기, 효경, 경외심의 은사를 주십니다.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보편지향기도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도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 아픈 이, 굶주린 이, 외로운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도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사통상문을 함께 읽으면서 제가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하는 십자표시입니다. 복음서,
이마, 입술, 가슴에 십자표시를 하면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삶을 바꾸고, 기쁨을 주는 복음서를 기쁜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마에 표시하는 십자표시는 복음서를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입에 표시하는 십자표시는 복음서를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표시하는 십자표시는 복음서를 내
마음의 양식으로, 내 삶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머리로만 알아들으면 냉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지만 냉담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입으로만 받아들이면 실천이 없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으며,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감성이
있습니다. 우주와 세상의 시작을 사유할 수 있는 오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천국을 차지하는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5월2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르 10,13-16
천국을 차지하는 사람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유대사회에서는 12세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 짓을 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온전한 의지!
어느 날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라 했더니 ‘식사 전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가정에는 18개월이 된 아이였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며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를
해 드렸는데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하면 주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 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을 할 때....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 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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