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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5월25일 수요일 [(녹) 연중 제8주간 수요일]
[수도회] 소유욕과 지배욕을 버리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베드 1,18-25
† 복음 마르 10,32-45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당신이 받을 수난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수난에는 귀를 막고 그분의 영광만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착각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우의정과 좌의정의 벼슬자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으며, 그분이 마시는 잔과
세례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주 예수님의 영광과 부활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분의 수난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회피하고 그에 대해 눈감고자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 이야기는 바로 우리 신앙인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매 맞고 조롱당한 뒤
처형당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사건
앞에 당황한 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진면모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는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생각의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2016년 다해 5월25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제1독서
"여러분은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1,18-25
복음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2-45
수면제 중에서 앰비언(Ambien)이라는 약이 있다고 합니다. 이 수면제를
복용하는 이유는 당연히 잠을 잘 자게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앰비언이라는 약은 잠을 더 많이 자게 하는 데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쎄 하룻밤 동안 고작 18분을 더 자게 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약의 효과가 크다고 믿으면서 많은 의사들이 처방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잠을 더 자는 약효는 그리 높지 않은데도
이 약의 효과가 크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약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건망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랍니다. 즉,
앰비언은 지난밤에 깊이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잠을 더
자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잠을 못 자서 피곤하다고 되뇌는 행위
등의 스스로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없애서 잠을 더 자게끔 한다는
것이지요.
하긴 저 역시 잠이 오지 않을 때, ‘지금 자야 하는데, 자지 않으면 내일
정말로 피곤할 텐데, 할 일이 많은데…….’등의 생각을 하면 더 잠이 오지
않더군요(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체험들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으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책을 펼쳐
읽습니다. 잠을 자지 못해서 뒤척이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다시 잠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생각의 변화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어려운가요? 그래서 약을 이용해서라도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까? 특히 변화를 가져오기
힘든 생각은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의 유혹에서 자유롭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도 역시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청을 드렸다고 다른
열 제자가 이 둘을 불쾌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지위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지위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생각처럼
앉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낮추고 낮춰야 주님의 영광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지요.
주님의 말씀처럼 생각의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즉, 높은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의 변화를 가지고 행동했을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내일 시작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라. 오늘 짐을 싸야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떠날 수 있다(이지성, '꿈꾸는 다락방').
주전자에서도 꽃이 필 수 있습니다.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느 날, 데레사 수녀님이 인도의 한 마을에서 다친 아이들이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인근에 살던 이웃 주민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데레사 수녀님께서 대답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성녀 데레사 수녀님의 삶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헌신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친 손에 터진 발, 주름투성이의
자그마한 할머니,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평생을 두 벌의 옷과 낡은 신발 한
켤레만 지닌 채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이 죽어가는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수녀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무엇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소유욕과 지배욕을 버리고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5월25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마르 10,32-45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Ambition of James and John
소유욕과 지배욕을 버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여행길에
제자들은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도 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곧 예루살렘에 도착하는데 거기에서 자신은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지고 사형을 선고받아 죽게 될 것이며,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할 때는 영광된
모습으로 다시 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보다는 그분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모습과 지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각각 그리스도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질투합니다. 그들에게서 드러난 것은 소유욕과 지배욕, 그리고
명예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에 집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 영광에 이르는데
따르는 고통과 모욕의 길을 제시하십니다(10,38-39). 동시에 십자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추종을 다짐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시며 섬김으로써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10,40).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10,43-44)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은 고난의 길이요, 그 길은 낮추고 작아짐을 통해서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은 남들 위에 서고, 더 많은 힘을 지니려는
나의 의지와 부단한 싸움을 해야 하는 길입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고 손해 볼 것을 각오하고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곧 죽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길을 걸어가려면 소유욕을 버려야 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소유욕을 버리려면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믿음이 필요하고 내
영혼의 빈자리에 그분을 채우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내 안에 사랑을 키워나감으로써 하느님과 동일화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으며,
가난만이 죽음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10,42-44). 다른 이를
섬기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남을 더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녀야 하겠지요. 또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을 자신의 틀
속에 집어넣어 마음대로 조절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소유에서 벗어난 가난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섬김으로써 주님의
수난의 사랑에 동참하도록 힘쓰는 복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5월25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 10,36)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가장 바라시나요?
바라고 싶은 것이 많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라시는 것을 다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자식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다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랄까요.
그런데 자식이 원한다고 무조건 다 해 줄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은 당신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두 제자를 말도 안 된다고 나무라시지 않고
그렇게 될려면 어떤 노력과 희생이 따라야 할지 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하는지도 강조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께 간절히 청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걸 얻기 위해서 나는 어떤 희생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얼마나 겸손한 마음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시험만 잘 보게 해 달라는 청은
하느님도 들어 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의 합당한 노력과 희생을 다 하고 나서
주님께 겸손되이 청할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주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분이시리라 믿습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5월25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 43)
우리의 거짓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관계의 기반은 지배와 통치 군림이 아니라 섬김에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군림하려해도 아무것에도 군림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끝내 그 어떤 것도 내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맺었던 예수님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자꾸만 굳어져가는 우리의 삶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헛된 것을 좇았던 시간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모르기에 아직도 착각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섬기는 것이 서로를 아름답게 만드는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신앙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자신입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맑은 사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화려했던 봄꽃들조차 모두 떨어져내렸듯이 사람의 아들처럼
삶의 본질이 순간순간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섬기러 오신 십자가에서 다시 삶을 배웁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8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5월25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 마르 10,32-45
1998년 청주교구장이셨던 정진석 추기경님은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오셨습니다. 전임 교구장님은 김수환 추기경님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두운 시대에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희망의 등대였다면,
정진석 추기경님은 교구의 내실을 다지는 일을 해 주셨습니다. 지구장
제도, 교구장 대리 제도를 강화하셨습니다. 시노드를 개최하셨고, 사제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두 번째 말씀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십자가에 있던 다른 죄인은 분명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회개를 하였고, 주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같은 잘못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베드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하느님의 놀라운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 루가복음 15장, 루가복음 19장에서 자비의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운동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직으로 이해했고, 조직에서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제자들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교회가 성장하고, 조직화 되면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권위와 질서라는
이름으로 퇴색되고, 가려지게 됩니다. 교회에도 돈, 명예, 권력이라는
세속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을 가진 아흔 아홉보다,
길 잃은 한분의 신앙은 잊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잊혀진다면,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하나의 추억과 그림으로 머문다면, 그분의 겸손과
순명을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또다시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세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 오 예수님, 회심한 죄수에 대한 주님의 친절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회상하게 합니다. “너희의 죄가 진홍 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 회개하는 죄수를 용서하는 주님의 말씀에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가 15,7)라고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이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 베드로 사도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한 다음에야 주님의 첫
지상 대리자로 임명된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으뜸이
되어 이끌어갈 교회가 용서를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예수님, 만일 제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면 저는 주님을 구세주라고
부를 수 없었을 것임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죄수만
유일한 죄인이 아니라 저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만한 분 있으면 나오라 그래요.
2016년 다해 5월25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예수님만한 분 있으면 나오라 그래요.
내일 일을 모르고 사는 걸 큰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면요.
그러나 자기 관심사에 꽂혀 옹졸한 마음에 남을 몰라줄 때가 많지요.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과 대화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잘 설명하셨습니다.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 섬김 받기보다 섬기기, 몸값으로 목숨 바치기!
어휴! 예수님의 크고 넓고 높은 성품이야말로 인류의 위인이십니다.
정말 예수님만큼 인류에게 복음주신 분 있으면 나오라 하세요. 없죠.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코 10,45)”
예수님의 죽음이야기 앞에 제자들이 이득을 생각하듯 세상은 그래요.
자! 세상 옹졸한 사람이 더 많다고 쏠리지 말고 주님께 쏠려 삽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갈길은 멀고 험해도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5월25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 마르 10,32-45
갈 길은 멀고 험해도
우리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삶에 활력을 줍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향하는 바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서 가르쳐도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게으르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스승은 끝까지 품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안 된다고
반박하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8,31-35). 하고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고(마르9,30-32)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자들은 누가
가장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예고
(마르10,32-34)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높은 자리, 영광을 받는 자리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10,43-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만 집착하는 제자들에게
이제 인간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일깨움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너무도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베풀고자 하시지만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챙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지만
인간은 육적인 것을 우선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아버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의 뜻과 이익만을
찾습니다.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은 역시 그들도 그런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높은
자리를 바라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영광의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만한 노력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데 그런 수고 없이 영광만을 바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고와 땀 없이 주어지는 영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높이높이 오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멀고
험해 보여도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13장36-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착한 목자가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듯이(10,11.15.17참조) 자신도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그분이 보여주신 모범을 충실히
따르는데서(“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와야지, 자신의 의지나 용기를
과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간절한 원의와 실천할 능력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배워서 알았으면 안 만큼 진실하고
겸손하게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봉사는
그리스도인의 자랑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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