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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5일 주일 [(녹) 연중 제10주일]
[수도회] 생명을 불어넣는 연민의 마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열왕 17,17-24
○ 제2독서 갈라 1,11-19
† 복음 루카 7,11-17
○ 외롭고 가난한 이들의 위로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주님 말고 의지할
데라고는 아들밖에 없는 과부의 하소연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대 예언자인 엘리야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미사를 시작합시다.
◈ 오늘의 묵상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를 넘어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들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살 수 없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그런
이들을 상징하는 성경의 인물입니다.
엘리야도 예수님도 과부가 의지해 온 아들의 죽음을 묵과할 수 없었던
인간적인 이유는 ‘측은지심’ 때문이었지만, 실상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불러일으키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죽음이나 고통, 슬픔,
좌절에 인간을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다시
일으키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희망을 심어 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버렸습니다. 선택된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라는 고백처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실천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는 이웃 사랑에 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실천이 잘 안 되는 이유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을 너무 멀리서 찾기 때문입니다. 얼마간의 기부금을 내는
정도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지 말고, 혹시 내 가족 가운데, 내 가장
가까운 친구와 교우들 가운데, 나와 무관하다고 여겨 온 내 이웃들 가운데
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안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긍정적인 마음으로
2016년 6월5일 연중 제10주일
제1독서
<보시오, 당신 아들이 살아 있소.>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17-24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11-19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17
어떤 자매님께서 이런 다짐을 하나 했습니다. 즉, 기분이 좋은 날에는
뜨개질을 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뜨개질거리를 광주리에 넣어 두고
손도 대지 않기로 말입니다. 어느 날 아침, 너무 기분이 좋아서
뜨개질거리를 꺼내 열심히 뜨개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뜨개질이 지루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분 나쁠 때에만
뜨개질을 멈출 수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피곤하고 지루할 뿐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피곤하고 지루한 것과 기분 나쁜 것은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뜨개질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마음속으로 기도했지요. 기분이 좋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분이 나빠지지 않아서 결국 식탁보 뜨개질을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기분
나빠져라!’라고 기도한다고해서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부정적으로 판단하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닐까요?
많은 이들이 고통과 시련들로 인해 힘들어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시련들 자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일까요? 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50세에 암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정작 이 암에 걸린 분은 “지난 50년간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사실에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불행의 상황이지만
오히려 지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솔직히 부정적인 일들은 눈에 잘 보입니다. 그에 반해서 긍정적인 일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요. 맹추위나 폭염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만 좋은
날씨는 좀처럼 생각되지 않는 것처럼, 부정적인 일들에 온 신경을 쏟고
있으니 긍정적인 상황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장례 행렬을
목격하지요. 죽은 사람은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일까요? 외아들의 죽음일까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셨듯이, 죽음이 단순히 완전히 사라지는 무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보시고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바로 외아들의 어머니인 과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과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을 잘 아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죽음 자체를 보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아픔과 힘듦을 보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주님의 이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기쁨과
감사의 삶입니다. 그래야 겉으로는 보이는 부분이 아닌 그 이면 속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어마어마한 사랑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이 보일 것입니다.
용기는 자신을 사랑하는 힘에서 나온다(공지영).
나인이라는 마을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예수님.
삶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레시피이다(릴루 마세, ‘내 인생이잖아’ 중에서)
요리를 할 때는 여러 재료를 한 번에 하나씩, 순서대로 넣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해나가야 한다.
‘아, 이번 일을 잘 처리해야 하는데...’, ‘이거 했다가 망하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자연스러운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하나, 둘 씩 새로운 경험을 더해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내 의도와 관계없이 삶이 펼쳐지기 마련인데. 이럴
때일수록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은 다음번에 넣을 재료 이상은 생각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가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중간에 손을 놓으면 안
된다.
간도 봐야 한다. 너무 싱거우면 소금도 더 넣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필요한 것이 차례로 나타날 것이다.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내게 꼭 맞는 재료를 구하게 되고
그러다 훌륭한 레시피를 완성하게 되면서 깜짝 놀랄 만한 요리가 탄생하게
된다. 이처럼 깜짝 놀랄만한 인생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요리하면서도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긴 어떤 일에서는 삶을 발견할
수 없겠습니까? 내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면, 또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삶은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해답을 우리에게
전해줄 것입니다.
어제부터 백령도 본당 신자들 피정이 2박3일간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생명을 불어넣는 연민의 마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5일 연중 제10주일 루카 7,11-17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Christ Raises the Son of the Widow of Nain
생명을 불어넣는 연민의 마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나인이라는
도시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펼쳐진 풍경은 과부의 외아들의 슬픈
장례행렬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과부는 고아와 이방인과 더불어 의지할
데도 없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과부는 마지막 남은 외아들마저 떠나보내는
심정은 극도의 슬픔과 절망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당시 가장 불쌍한 과부가 아들마저 잃은
비참한 상황이 벌어지자 즉시 예수님의 눈길이 큰 무리 중에 있는
그녀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과 ‘과부의 비통함’이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가엾은 마음’은 말의 뿌리는 ‘자궁’입니다. 자궁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생명의 자리이고 생명과 생명이 만나는 여백입니다.
생명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되어가는 계기이며 생명을 기르는 고귀한
사랑의 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생명을 품듯 모든 것을 품는 마음이요, 생명을
키우는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저 다른 이의 처지를 일시적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호흡 안에서 함께 아파하고, 통째로 사랑으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있는 과부에게 ‘울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며 그녀를 따뜻한 사랑으로 위로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십니다.’(7,14).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죽은 사람이나 관을 만질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을
뛰어넘어 가장 비통한 이에게 위로를 주고 죽은 목숨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 희망을 주셨습니다.
“젊은이야, 일어나라.”(7,14) 하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7,7,14-15). 예수님께서는 ‘주님’으로서 군중 앞에서 드러내놓고
당신의 권능으로 그를 되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7,15).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슬픔 대신 기쁨을 절망 대신
희망을, 죽음 대신 생명을 되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장 불쌍하고, 가장
비통해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먼저 챙기고 중요하게
여기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지니셨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품고
슬퍼하는 이, 고통 받는 이,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다가감으로써
그들의 위로와 희망과 생명의 빛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비록 나에게 그런 ‘가엾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 해도 늘 우리의 고통에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심을 믿고 힘을 내야겠지요. 늘 죽음을 대면하고, 또
언제 어떤 슬픔과 아픔이 다가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서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도록 힘쓰는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우리 모두 기쁘게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5일 연중 제10주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 14)
누구에게나 이별의 시간은 올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잘 떠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지를 깨닫게됩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신뢰하게 됩니다.
삶의 뒷면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죽음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가고 오는 생명의 여정을 통해 지금 이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됩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우리모두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다시금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긍정하는 시간이 되게합니다.
젊은이의 죽음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끌어올려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으로 삶과 죽음을 새롭게 보게합니다.
모든 사랑안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고통과 죽음또한 갑갑하고 좁은 우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하며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나게하는 성장의 은총이 되게합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하는
고통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은 헤어짐이 아니라 소중한 사랑을 다시 만나는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또한 어떻게 사랑해야할지를 예수님의 마음에서
배우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아름답고 소중한 이 시간을 다시 살리시듯 예수님께서는
젊은이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의 해답은 다르아닌 예수님처럼
어떻게 오늘을 사랑할 것이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 마음은 결코 죽지않으며
다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5일 연중 제10주일
<"울지 마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3-14)
여러분은 자식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나요?
내 자식이 누구보다도 훌륭한 자식이기를 바라지만, 또 그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아도 괜찮은데 그 자식은 나의 바람과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만 가니 속상해서도 울고
가엾어서도 울고 안타까워서도 울고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서도 울고 그런가요?
그렇다면 기뻐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런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울지마라."
그리고 여러분의 그 자녀에게는 "얘야, 일어나라." 하시며
일으켜 세워주시네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내가 아무리 희생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다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럴 때는 바로 나를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내 능력밖의 일을
내가 아무리 부여잡고 있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비하신 예수성심께 의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자비의 예수님께 의탁하는 순간
그분은 나의 슬픈 울음을 거두게 해 주시고
당신 친히 능력자로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겁니다.
오늘 여러분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자비의 예수님께 겸손되이 내맡겨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가 오늘의 기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께서 살짝 열어놓으신 또 다른 문 하나
2016년 다해 6월5일 연중 제10주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 7,11-17
하느님께서 살짝 열어놓으신 또 다른 문 하나
초세기 교회를 훌륭하게 이끈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을 묵상하다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다른
한편으로 크게 공감과 위안이 되는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위대한
두 사도 역시 한때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한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때로 주제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해 갈팡질팡했었고, 때로 심연의
밑바닥에서 결핍투성이인 한 인간존재의 민낯과 비참을 온몸으로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후 수제자로서의 자부심, 우월감이 대단했습니다. 스승님 앞에서 틈만 나면
외쳤습니다. “모두가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오버하지마라고 당부해도 거듭 부르짖었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마르코 복음 14장 31절)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나서 불과 몇 시간 뒤 베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발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한 패가 아니냐는 물음에 만일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르코 복음 14장 71절)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더 내공을 쌓고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참 깨달음에
도달한 베드로 사도는 그 때 그 일, 그 부끄러운 배신이 떠올라 늘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새벽녘 닭이 울 때 마다 큰
목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늘 울고 다니던 베드로 사도였기에 그의
눈자위는 짓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자신의 큰 과오를 겸손하게
인정하며 더 이상 주님을 배신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역시 자신의 인생 안에 지우고 싶은
‘흑역사’(黑歷史)가 있었습니다.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박해하는데
최일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향한 바오로의 증오가 얼마나
지독하고 살기등등했던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한 그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행전 9장 4절)
그러나 바오로 사도 역시 회심과 개종 이후 자신의 그릇된 과거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3절)
두 사도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지난 흑역사를
아무런 가감 없이 밝혔습니다. 솔직히 자신들의 과오와 잘못을 만인 앞에
고백했습니다. 자신들의 어두웠던 과거, 감추고 싶은 죄, 나약함과 한계를
‘쿨’하게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용기 있는 그들 위에 하느님께서는 비로소 제대로 된
교회의 초석을 놓으셨습니다. 주님 없이 자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겸손한 신원의식 그 위에 두 분은 진정한 교회의 반석이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한계, 인간의 결핍, 인간의 끝에서 하느님 사랑의 역사와
기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 한 인간이 겪고
있는 심연의 고통, 그 뜨거운 눈물, 한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장 밑바닥 인생이라고 해서, 지금 그 어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극단적
생각과 선택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대신 하느님께서 살짝 열어놓으신
또 다른 문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유심히 찾아봐야겠습니다. 좀 더
두드릴 문이 어디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0주일
2016년 다해 6월5일 연중 제10주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 7,11-17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마르 16,1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웃에게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복음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이단과
신흥종교에 빠져서 영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민들레 선교’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민들레는 그 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우리의 선교도 은총의 바람을 타야 합니다.
민들레는 안정된 정원에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날아가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교 역시 세상 곳곳에서,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민들레는 바위틈에서도 자라는 억센 생명력이 있습니다.
선교 역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선교를 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을 하곤 합니다. 성당에 가면 무엇이
좋은데요? 그럴 때,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당에
가면 우리 인생의 고민과 갈등, 슬픔과 아픔이 해결된다고 말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가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특히 ‘기도’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에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합니다. 성당에 가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고, 우리가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으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를 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왜 꼭 천주교회 입니까?
불교나 다른 종교를 믿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천주교회가 좋은 점을 분명하게 말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양심과
윤리를 추구하면서 그 행위에 따라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다른 종교들은
이처럼 양심과 윤리를 강조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과 계명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주셨고 그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 그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양심과 윤리,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사람들 ‘세리, 죄인, 여인, 병자, 이방인’들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으로 모든 벽을 허물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죄와 잘못으로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은총을 체험한 사람들은 주어지는 고난과 십자가를
이겨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은총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과 십자가 앞에서 좌절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은행 업무를 보면 창구 직원이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평가를 할 때,
최우수라고 해 달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최우수 평가를 받으면 나중에
인사고가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 성적표를
받게 됩니다. 어릴 때는 ‘수, 우, 미, 양, 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좀 더
커서는 등수를 받았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학점을 받았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지만 늘 평가를 받고 살았습니다.
음식점을 가면 ‘텔레비전에 나온 집’이라는 광고를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는 집입니다. 그런 광고만큼 맛이
있는 곳도 있지만 광고만큼 맛이 덜한 곳도 있습니다. 어떤 곳은 집도
허름하고, 별로 선전도 하지 않았지만 맛은 텔레비전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곳도 있습니다. 음식점은 시설, 입지 조건, 위생, 친절 등이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맛입니다.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여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신앙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를 평화롭게 해주고,
나에게 참된 행복을 준다는 은총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체험이 있어야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은 축복과 은총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연민과 자비입니다. 엘리야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었던 아이를 다시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죽은
아이를 다시 살게 하였습니다. 죽은 아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 중요한 것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과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죽은 아이들을 다시 살게 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와 우리들의
삶이 영적으로 메말라가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는 은총의 샘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은 불법 의료행위자?
2016년 다해 6월5일 연중 제10주일
예수님은 불법 의료행위자?
세계의 의료계는 예수님을 불법 의료행위자로 역사에 고발해야 됩니다.
지금이라도 성경의 기록된 기적들을 증거로 예수님을 고발해야 됩니다.
아니면 의료계 모두가 예수님은 죽음위에 계신분이라 선포해야 되고요.
그러니 죽음이 뭔지 예수님을 통해 배우라고 의료진들이 앞장서야지요.
하느님나라의 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음을 믿으며 살자고 말입니다.
의술은 신체의 극 일부를 되살려 보려는 노력일 뿐이라 고백하던 지요.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5)”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들은 창조주 앞에서 겸손해야 제자리 찾은 겁니다.
하느님을 밀치고 제 잘났다 하면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바보일 뿐입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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