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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14일 화요일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수도회] 한걸음 더 나아가는 온전한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열왕 21,17-29
† 복음 마태 5,43-48
◈ 오늘의 묵상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원수들을 만납니다. 내 재산과 가족의 생명을
빼앗고, 삶의 희망마저 앗아간 원수가 있는가 하면, 치명적인 원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부와 가족 관계에서처럼 ‘운명 공동체’로 살면서 미움을 버릴
수 없게 하는 이른바 ‘웬수’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원수’를 사랑해도, ‘웬수’는 사랑할 수가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릅니다.
‘원수’든 ‘웬수’든 내 마음의 병을 만든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내가 그를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그 미움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원수를 감옥에
가두고 싶고, 미운 상대를 저주한다고 상대가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더 불행해지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먼저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내가 세우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세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용서가
가능합니다. 혹시 진짜 원수는 용서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이
생로병사 속에서 갈망하는 영원함과 완전함, 선함과 올바름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뜻합니다. 나의 불완전함과 죄악을 직시할 때 이웃의
불완전함을 사랑으로 채워 주고,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 매일 미사 -
◈ [인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철저한 사랑
2016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17-29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러시아가 지금의 모습이 아닌, 소련 공산국가로 있을 때입니다.
사유재산제도의 부정과 공유재산제도의 실현으로 빈부의 차를 없애려는
공산주의로 인해 모든 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지요. 사람보다 사상이, 또한 경제보다 정치가 더
우선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이 나눠 쓰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경제는 악화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흉년까지 계속되자 소련 공산국가는 1%의 사람들을 특별 선별해서
나쁜 박토를 주고 자유롭게 농사지어 먹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그들 1%의 농민이 생산한 농업 생산량이 전체 소련 농업 생산량의 27%나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감자는 62%, 우유와 쇠고기는 34%, 계란은
47%의 엄청난 생산량을 기록했지요. 그때 비로소 소련 당국자들은
집단농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수정주의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노력의 결실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자 사랑과 애정을 쏟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농사가 잘 되려면 분명히 사랑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모든 진짜 성공의 밑바탕에는 언제나
사랑과 애정이 필요했습니다. 공부를 잘 하려면 공부를 사랑해야 하고,
일을 잘 하려면 자신의 일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잘 가지려면
상대방을 사랑해야 하고, 뜨거운 신앙을 갖고 싶다면 주님을 철저히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종종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사랑이 가끔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세우는 사랑, 내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다는 조건 가득한
사랑입니다. 이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진짜 사랑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반대하는
원수를 사랑해서 하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즉,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워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원수로 인해서 지금의 육적인 삶도 힘들어
죽겠는데, 주님 곁으로 가서도 그 원수 때문에 이번에는 영적으로 또다시
고통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누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뿐 사실은 모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어떤 사랑을 간직해야 할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철저한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삶은 모두 만남에서 온다. 너를 통해 내가 되어 가며, 내가 되어 갈 때
나는 너를 말한다(마르틴 부버).
사제연수 중이신 인천교구 신부들. 그러나 성지에는 미사가 계속 있습니다.
침묵의 힘
어떤 부인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서 말합니다.
“선생님 더는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은 너무 신경질적이고
잔소리가 심해요.”
의사는 한참 고민하다가 처방을 내렸습니다.
“우리 병원 옆에 신비한 샘이 있습니다. 샘물을 한 통 길어서 집으로
가져가세요. 남편이 귀가하면 샘물을 한 모금 머금으세요. 그런데 머금기만
해야지 절대 삼키면 안 됩니다. 처방대로 하시면 금방 효과가 있을 겁니다.”
부인은 처방대로 샘물을 길어서 돌아갔습니다. 그 날도 밤늦게 귀가한
남편은 평소처럼 짜증과 잔소리를 아내에게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인도 맞받아쳐 싸웠을 테지만, 그 날은 처방대로 신비한 물을
입에 머금었습니다. 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꼭 다물었구요.
얼마가 지나자, 남편은 잠잠해졌습니다. 그 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이지요. 그 날 부터 남편이 잔소리를 시작하면 부인은 어김없이 신비의
샘물을 입에 머금었구요.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남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신경질이 줄고 아내를 함부로 대하던 행동도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신비한 효과에 깜짝 놀란 아내가 의사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신비한 샘물이 너무 좋더군요. 우리 남편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의사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분이 변한 것은 물이 아니라, 당신의 침묵 덕분입니다.”
침묵의 힘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침묵을 지키면 바보 같고, 또한
패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대화는 상대를 찍어 누르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말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은 아픔과 상처를 줄
뿐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말보다 침묵이 효과적임을 깨닫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상대 스스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돌아볼 여유를 주는 것이 바로
침묵인 것입니다.
들꽃이 너무 예뻐서 찍어보았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한걸음 더 나아가는 온전한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마태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Love of enemies
한걸음 더 나아가는 온전한 사랑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5,44)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한걸음 더’의 사랑은 지금 하고 있는 사랑에 뭔가
조금 더 얹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온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내어줄 때에 순수해야 하고, 내어주는 데 있어 조건이 없어야
하며, 한계를 정해놓고 사랑하지 말 것이며, 사랑하는 대상에도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선과 사랑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지 않고는 스스로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사랑의 방식 가운데 가장 맹목적인 신념은 ‘나도 사랑하고 산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랑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잘 해주는
사람, 가족과 친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면서 그것을 참 사랑이라
여기고 만족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제한이 있고, 조건이 있으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런 사랑은 결코 참 사랑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은 모든 것을 언제 어디서나 품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본질과 온전한 사랑의 방식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참사랑, 온전한 사랑으로 가는 길, 곧 행복의 길은 원수와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친밀한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말라 하여도 사랑하지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분의 제자라면 달라야만 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늘 걸려넘어지는 원수 사랑,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 사회적 약자들과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미운짓만 골라서 하는 이들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사랑을 위해
의식화가 필요하고 늘 마음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 때문’이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5,45)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사랑은 이해와 인내의 바탕 위에서
생겨납니다. 인내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힘써야겠지요. 오늘도
조건 없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우리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사랑의 실천은 분명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빠져나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그 미움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하여 주시는 주님께 먼저 기도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믿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먼저 만나게합니다.
분리될 수 없는 예수님과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원수까지도 돌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관계도 훼손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우리의 죄까지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또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시네요.
말도 안되는 소리거나 뭘 모르셔도 한참 모르시는 말씀이지요.
어찌 우리가 감히...
그런데 예수님이 완전하다고 하실 때의
논리를 곱씹어 보면 "아하~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내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안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이런 사람이든 저런 사람이든 다 알고보면 불쌍한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니 구별없이 사랑하면 된다네요.
인사를 하는데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된다네요.
"쉽죠~ 잉~"
완전하다는 것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끌어안는 전부를 뜻하는 말이네요.
그래서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내리신다구요.
오늘 사람을 차별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대함으로써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2016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 5,43-48
피아노를 시작한지 5년이 넘었습니다. 아직도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시간이 나면 좋아하는 곡을 피아노 반주로 부르곤 합니다. 제가 부르기에
음이 높으면 조를 낮게 바꾸어서 부르기도 합니다. 음이 낮으면 조를 높게
바꾸어서 부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들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음을 들으면
계명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노래의 음들도 일정한 패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수준은 걸음마 정도입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연주할 것입니다. 단순히 건반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적인 감성을 건반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둑도 어려서 아버님께 배웠습니다. 역시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수담’을 나눌 정도는 됩니다. 포석이 중요하다는 것,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행마는 경쾌해야 한다는 것, 끝내기가 중요하다는 것,
승리 할 때는 겸손해야 하고 패했을 때는 받아들여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바둑의 고수들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바둑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도 하고, 묘수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한수를 둘 때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 바둑은 하나의 예술이고, 삶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만 유혹이 생기면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갈밭에
뿌려져서 뿌리를 내리려 하지만 곧 말라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의 것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해의 순간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뿌리는 내리지만 가시덤불 때문에 신앙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옥한 땅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박지성 선수는 환상적인 골을 넣곤 했습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는 90분
경기에 9번 넘어졌습니다. 10분에 한번은 넘어졌고, 하지만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골을 넣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축구선수는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고, 앞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좌절과 슬픔, 고통과 외로움의 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그 장벽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순간을 사랑하며’라는 책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현재(Present)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최상의 선물(Present)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늘에 쌓인 각자 포인트대로
2016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늘에 쌓인 각자 포인트대로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하며 모두 돈돈 하면서 신경곤두 세워 삽니다.
‘하늘에 공짜가 어딨어!’공정한 하늘엔 더더욱 맞는 말이라 생각했죠.
세상에 공짜 없듯 하늘도 공짜 없는 것 전 당연하다고 믿고 있거든요.
태양에너지, 숨 쉰 공기, 그간 쓴 시간, 잘 활용한 땅 흙 등의 사용료.
영원생명 위해 하늘에 쌓인 각자 포인트대로 계산할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하느님께 조언 드리려 여쭤 받더니 너무 뻔할 뻔자다 하시더군요.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5,45)”
하늘 포인트 적립방법 조건은 아주 짧아요. ‘십계명 = 주의 기도문’입니다.
하느님이 구약 때 십계명, 예수님은 주의기도문을 괜히 가르쳐 주셨겠어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청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 5,43-4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라.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미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부터 벌렁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이 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저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미처
사랑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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