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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24일 금요일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수도회] 가난과 겸손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9,1-6
○ 제2독서 사도 13,22-26
† 복음 루카 1,57-66.80
주님께서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신 이사야 예언자와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앞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의 탄생은, 모두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한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요한이 태어나자 비로소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 사제처럼, 하느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찬미하며 이 미사를
드립시다.
◈ 오늘의 묵상
한 사람의 인생은 이름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고, 사람들에게
불려지고, 기억됩니다. 인간은 말 그대로 관계 속에서 탄생하고, 관계
안에서 살며, 죽은 뒤에도 관계를 맺은 이들에 의해 기억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이사야 예언자의 고백처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감동적인 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기로
결정함으로써, 자신의 아들이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모든 민족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맞도록 준비시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될 것임을 믿었습니다. 약속대로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 백성으로 수련된 ‘광야’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를 선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맺은 ‘첫 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마태 10,30) 하느님의 생각과 뜻을 알 수는 없지만,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준비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시다.’라는 뜻의 ‘요한’이란 이름을
인류에게 주신 하느님은 그분과 단절된 관계인 죄로부터 해방과 용서를
베푸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기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016년 다해 6월24일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22-26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어떤 형제님께서 뜻밖의 사고로 몇 개월째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밤낮으로 병상을 지키면서 남편을 간호했지요. 그리고 이 지극한
정성에 남편은 점차 회복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여보, 당신은 온갖 궂은 시절을 버티며 내 곁을 지켜 주는군. 내가
해고당했을 때도 당신은 내 옆에서 나를 지지했지. 내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에도 내 옆에 있었소. 또 우리 집을 잃었을 때도 나를 지지해줬어. 그리고
이렇게 사고로 꼼짝 못하게 되었는데도 당신은 여전이 내 옆에 있네. 그런데
그거 알고 있어?”
“뭔데요?”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 당신은 정말로 운이 없는 사람이야.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어? 이런 나를 만났으니 정말로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니 너무나도 고마워. 이제는
내가 더 잘 할게. 미안해.”
이 형제님의 경우를 여러분이 겪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해고도 당하고, 사업
실패를 하고, 집까지 잃어버립니다. 여기에 사고까지 당해서 사경을
헤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지독하게 운이 없는 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평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런 나와 함께 했고 지지했던 아내를 보았습니다.
분명히 자기보다 더 운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기 자신의 손해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남도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주님도 보지 못하니 혼자만의 이기심과 각종 욕심을
채우는데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또 다른 세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간직하기에 세상 안에서도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냅니다. 요한 세례자의 삶을
보면 그렇게 못 살 것만 같습니다. 좋은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기에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사람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주님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과연 불행한 삶일까요? 요한
세례자가 과연 후회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행복했었고, 자신의 사명을 지켰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행복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면 그건 뭔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잃었을 때일
것이다(알베르 카뮈).
'세례자 요한입니다.
나’를 잘 만났습니다.
해외로 여행가는 분을 향해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 잘 만나서, 부모 잘 만나서 저렇게 해외로 여행을 가는 구나. 팔자도
좋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 분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세계여행이었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매달 적금을 부어서 드디어 세계 일주를 떠나신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배우자 덕을 본 것도 아니고, 그 집이 그리 부유하지
않으니 부자 부모덕에 떠난 것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그냥 떠난 것입니다. 누구를 잘 만나서 이렇게 여행을 하게 된
것일까요?
아마 ‘나’를 잘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나’를 잘 만났기
때문에, 팔자 좋게(?) 여행도 떠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남’을 잘 만나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부러워하면서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는 사람은 ‘나’를 잘 만나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잘 만났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신 곳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가난과 겸손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4일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 80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루카 1,63)
The birth of john the baptist
가난과 겸손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
오늘의 복음을 보면 선구자 요한과 뒤에 오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밀접한 인격적 일치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잉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권능, 창조의 원천임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루카 1,36-37). 요한은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 때 예수님을 맨 먼저
만나고 알아보았고 축성되었습니다(루카 1,44).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그가 장차 구세사에서 맡게 될 특별한 사명을 암시해
줍니다.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고 신약을 예고하는 인물이며, 그의 제자
중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는 복음 역사의 시작을
알렸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예언자로
선택받았습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고(봉사),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순명),
오직 예수님을 전하는(겸손, 진실) 증거의 삶(복음 선포자)을 일생동안
살았습니다. 그의 삶에 드러난 그의 영성적인 여러 면모를 봅시다.
요한은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마태 3,4). 그는 사막의
유목민들처럼 낙타 털가죽을 적당히 꿰매어 입고 가죽끈을 만들어 허리에
둘렀고 메뚜기와 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도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었습니다(2열왕 1,8). 하느님의 사람은 그렇게 가난해질 때
하느님 안에서 부유해질 것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따랐습니다. 그는 메뚜기를 먹고 살았으나 그의 영혼은
높은 곳을 향하여 작은 몸짓으로 뛰었고 날았습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주님께 눈길을 모으며 살아야겠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마태 3,11)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하였습니다. 우리도 요한을 본받아 자신의 주제
파악을 분명히 하며 겸손하게 살아야겠지요.
요한은 이런 겸손함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닌 ‘예수께로’ 계속 관심을 돌렸으며, 더 나아가 그분께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몇몇 추종자들을 예수께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정직하였고 진실했으며, 자신의 본분을 분명히 인식하였기에 회개를
설교하였습니다.
우리는 요한에게서 순명의 정신도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시 6,000여명의
추종자가 있었던 그가 세례를 청하는 예수님을 만류하자 예수님께서,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하시자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또한 요한처럼 자기 뜻을 내세우거나 자기편을 형성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순응하여야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의 길을 닦는 심부름꾼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주님의 뜻에 순응하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기에 참 기쁨 안에
머물렀습니다. 우리 또한 세례자 요한을 본받아 가난과 겸손과 순명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함으로써 참 행복을 맛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4일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사 49,4)
오늘날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남들로부터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온 힘을 다 씁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돌아보면 내가 이걸 이루기 위해
그토록 힘을 빼고 애를 썼나 허망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힘을 다 써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분만이 나의 보상이 되어주실 수 있답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내가 너를 세상의 빛으로 세운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심부름꾼일 뿐임을 겸손되이 고백함으로써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오늘 나도 헛군데 힘을 낭비하지 말고 하느님께만 믿음을 두고
겸손하게 그분의 심부름꾼이란 자세로 살아봅시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 6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24이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 60)
우리또한 신앙안에서 신앙의 길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시작을 일깨워주는 우리의 이름이 저마다 있습니다.
저마다의 이름에는 저마다의 마음이 있고 저마다의 역사가 있습니다.
고통과 함께하는 생생한 우리의 현실안에서 요한의 이름이 지어집니다.
요한의 이름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안에서 얻어진 신앙의 이름입니다.
요한의 이름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는 이름으로 성장합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이 대축일은 우리의 소명을 다시 생각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요한 세례자처럼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겸손을 배우는 길이 사람의 길입니다.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삶을 통해 하느님 은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옛 이름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 이름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16년 6월24일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 1,57-66.80
저의 이름은 ‘조 재형’이고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조(趙)는 저의
성입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져오는 것입니다. 성은 바뀌지 않는 고유한
것입니다. 재형(在衡)은 저를 뜻하는 의미입니다. 뜻은 균형 잡힌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영신수련에서는 이를 '중용'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와 가난, 장수와 단명, 건강과 질병'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의 이름 때문인지 저는 오랫동안
신학생들과 함께 ‘영신수련’을 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성서는 가브리엘의 모습을 아름답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은
그림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성인에게도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처럼 저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소중한 일입니다.
신학생 때, 저의 별명은 ‘조자룡’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은
용맹하고, 의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관우, 장비, 유비처럼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제갈공명처럼 신출귀몰한
재능을 겸비하지는 않았습니다. 고향을 지키는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조자룡은 주인인 유비와 가족들을 지키는 충직한 부하였습니다. 조자룡을
좋아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불러주는 별명도 기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름과
세례명의 뜻을 삶속에서 드러내고 있는지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의 뜻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다."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호는 '옹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 만드신
질그릇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자신에게 붙인
별명은 '하느님의 몽땅연필'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어도 하느님의 뜻을
써내려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분임을 기억하는 이름입니다.
'옹기'도 '몽땅연필'도 '어린 양'도 겉보기엔 화려한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 걸어야 할 삶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겸손함’입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중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작은 자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겸손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식별’입니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것도 식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는 것도 식별입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는 것도 식별입니다. 영신수련에서 ‘중용’도 큰 덕목이지만 ‘식별’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고독과 시련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식별입니다. 위로와 기쁨도 악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것도 식별입니다.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노를 젓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한 목적지를 향해서 방향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본받아야 할 삶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징표를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지내면서 ‘꽃’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내 안의 주님과 기도로 공감
2016년 다해 6월24일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내 안의 주님과 기도로 공감
공감이란 참 편합니다. 만남 대화는 서로 공감하기 위한 방법이랄까요?
그러나 만남도 대화도 없이 척하면 척한다는 공감, 인간의 신비같아요.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바로 이런 공감을 천사의 도움으로 경험했네요.
본당사목과 사이버사목을 저는 안면사목과 공감사목이라 표현해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늘 공감관계에 계시겠다고 임마누엘이라 하셨습니다.
스마트폰으로 공감들 잘 하지만 내 안 주님과의 기도 공감엔 둔하지요.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
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루카 1,60&63)”
교회는 안면사목에 치중하지만 사이버의 신앙다짐 공감사목도 중요하죠.
또 더 높은 차원은 기계통한 사이버보다 주님과의 공감상태인 기도고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24일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 1,57-66.80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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