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6년 6월27일 월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수도회]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투신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아모 2,6-10.13-16
† 복음 마태 8,18-22
◈ 오늘의 묵상
아모스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폭로하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신자본주의가 낳고 있는 폐단과 별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가계 부채로 인한 경제적
압박과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체불, ‘열정 페이’와 비정규직은
청년들의 희망을 앗아 갑니다.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힘없는 이들을 내쫓고, 기득권자들의 탐욕이
사회적 양극화를 부추겨, ‘흙 수저’를 물고 나온 이들의 분노와 절망이 커져
갑니다.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자극적이고 향락적인 미디어의 범람과 인간의 숨은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문화는 거룩함을 상실한 폭력의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제단마다 그 옆에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드러눕고,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저희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댄다.” 종교적 삶의 가치가 커지면
세속적 욕망은 상대적으로 약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인이
늘어나도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이 더 커지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종교가 오히려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는 복음 환호송 시편 말씀대로, 우리는 “시대의 표징을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사목 헌장, 4항) 하는 교회의 소명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부르심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았다.>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6-10.13-16
복음
<나를 따라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8-22
고부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자신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얘야, 내 아들을 내가 키웠다. 따라서 내가 너보다 모르겠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어머니, 함께 사는 제 남편인데
제가 더 잘 알지요.”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이런 식의 입장 차이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들을 잘 안다고, 또 남편을 잘 안다고 말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입장이지만,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서 겪게 되는 아들의 그리고 남편의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지요. 대신 자기만 옳다는 것을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확인받으려고만 합니다.
아들이자 남편인 이 남자의 상황은 매우 힘들어지지요. 어머니의 말을
들어주면 아내가 힘들어하고, 아내의 말을 들어주면 평생 나를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가 몸져누우실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기에
시누이나 사돈 식구들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정말로 수습하기
힘든 상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 것은 공동의 중요한 가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고부간의 갈등이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아들 뒷바라지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편 내조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라는 공동으로 중요한 가치에
집중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공동의 중요한 가치를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부르심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너무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십니다.
사실 죽음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관습입니다. 따라서
장사를 지내고 오는 것을 당연히 허락해 주셔야만 할 것만 같은데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공동의 중요한 가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도 또한 부르심을 받은 제자를 위해서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분명히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다. 그때 우리들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소유물의 부족은 개선할 수 있으나 영혼의 가난은 해결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몽테뉴).
작년 여행갔던 네덜란드의 풍차마을.
인디언의 날씨예보(‘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는 글입니다.
한 영화감독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영화를 찍게 됐다. 영화 촬영이 한참
진행되던 어느 날, 어디선가 늙은 인디언 한 명이 찾아와서 말했다.
“내일은 비.”
그리고 그 다음 날 정말 비가 내렸다. 일주일 뒤 인디언이 다시 찾아왔다.
“내일은 태풍.”
다음 날 정말 태풍이 와서 촬영을 못 했다. 감독은 조감독에게 말했다.
“그 인디언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돈을 주고, 계속 날씨를
알려 달라고 해야겠어.”
그 뒤 인디언은 몇 번 돈을 받고 날씨를 알려 줬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며칠째 인디언이 나타나지 않았다. 감독이 조감독에게 말했다.
“그 인디언 요즘 왜 안 나오지? 내일 중요한 촬영이 있으니 날씨를 알려
달라고 해.”
조감독이 인디언을 찾아가 날씨를 묻자 인디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몰라. 라디오 고장 났어.”
이제까지 이 인디언은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일기예보를 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신비로운 힘으로 정확하게 예보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우리는 아닐까요?
재미있는 인형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투신의 삶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마태 8,18-22
“나를 따라라.”(마태 8,22)
The would-be followers of Jesus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투신의 삶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8,21) 따르겠다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8,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은 한 인간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중요하고 급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삶의 우선순위와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중심과 순위가 뒤바뀌는 순간 인생은 하느님과 무관한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행하는 것을 인간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할 때 우리는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에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느님을 품고 행하고 만나야 하며, 무엇이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였던 장례
의무까지도 무시하시며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유일무이한 시간에로 초대받았으며 그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워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또한
예수님에게나 제자들 모두에게 급박한 까닭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은 무덤을 파주는 사람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 생명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말로써 험담과 거짓과 중상모략을 하고, 죽음의
문화에 동참하는 행동을 하며,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 온갖 탐욕적인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지니면서 역설적으로 반생명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면 죽은 이들의 장사를 지내는 죽은 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과거에 집착하거나 과거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 과거를 현재화
(아남네시스)하고 미래를 현재화(프로렙시스) 하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은 바리사이나 루카복음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사사건건 ‘왜?’라는 물음을 자주 던지고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과거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미래에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을 내 삶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이나 베드로처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은총과 뜻을 헤아리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안일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안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해야겠습니다. 이 절박한 은총의 때를 뒤로 제쳐두고 나를 위한
현세적이고 육적인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오늘도 과거의 추억이나 상처에 파묻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사’를 치르는 ‘죽은 이’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마태 8,19)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자 약속한 우리는
입으로는 언제 어떤 때라도 스승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찢어지게 힘든 가난의 처지에 내몰려도 과연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문제없이 잘 돌아갈 때는 신앙생활을 곧잘 합니다.
그러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사업실패 등 경제적 위기가 닥치게 되면
그만 신앙생활도 접어 버립니다.
오히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신에게 의지해야 맞지 않나요?
또 언제나 그분를 따르겠다고 해놓고선 요것 좀 하고나서 갈께요.
저것 좀 하고나서 갈께요 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이
최우선 순위가 아닐 때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정말 언제 어디서든 주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나요?
오늘은 내 좋은 것만 하고 싶고 내 할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 그분이 바라시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요?
스승 예수를 따르는 길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먼저 그분을 찾고 따르는 것이
제일순위가 되어야 하겠지요.
오늘만큼은 내가 먼저가 아니라 주님 먼저가 되는 날 꾸미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 20)
더이상 머리 기댈 곳조차 없을 때 진정한 회심은 이루어집니다.
안주해야 할 여정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배워나가야 할 우리의 여정입니다.
어디에서 우리자신을 만나게 되는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하느님에게서만 우리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삶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하느님안에서만 완성되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외로움까지도 감사하게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알아보는 분은 주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게됩니다.
살아있음이 회개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머리 기댈 곳조차 없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고민하고 방황하며 그분을 따릅니다.
그분에게서만 성장의 힘을 얻을 수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감정까지도 봉헌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방벽(防壁)이자 어머니인 청빈(淸貧)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라.>
† 마태 8,18-22
방벽(防壁)이자 어머니인 청빈(淸貧)
대부분의 성인(聖人)들이 지녔던 성성(聖性)의 덕목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청빈한 삶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자선활동에
있어서는 한없이 관대한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극단적 청빈을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 보스코 역시 청빈한 삶과 관련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길거리 가난한 청소년들의 보금자리 마련과
교육을 위한 모금에 전념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호주머니 속에는 동전 한 푼조차 없었습니다.
청빈생활과 관련해서 돈 보스코께서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소박한 식사를 하는 것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크나큰 영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을 때 청빈생활과 관련해 저희
수도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과 교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고 해를 끼치는지 모릅니다.”
교회의 미래인 예비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뼈아픈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신부나 수녀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제 개인비서 신부님은 어딜 가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고급 승용차를 갖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단을 구성해서 3년 가까이 전도 여행을 하셨는데, 모든
것을 잘 갖춘 여행단이 아니라 하루하루 도움의 섭리에 맡기는 그런
형태였습니다. 이곳 저 곳 다니시다가 환영하면 머무시고, 여의치 않으면
노숙생활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렇게 극단적
청빈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복음 8장 21절)
청빈의 서원은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정말이지 큰 도전이고 풀어야할
과제입니다. 청빈과 관련해서 우리 수도자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형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청빈을 외치지만 절대로 청빈한 법이
없습니다. 수도자들 역시 청빈을 서원하지만 결코 청빈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청빈을 덕을 자신의 삶과 비교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부를 죄악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된 부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이자 선물로 여기셨고, 그 축척된 부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가난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가난을 찾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가난은 자랑꺼리요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하다보니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습니다. 사실 가난은 뭔가 결핍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가난입니다.
오늘날 이 물질만능의 세상 앞에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느끼게 만드는 악령과 싸우는 일입니다. 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하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라.>
† 마태 8,18-22
은경축 미사엘 다녀왔습니다. 강론 중에 제 마음에 와 닿았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우리의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우리의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지난 과거는 모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현재의 삶은 늘
기뻐하며, 미래의 삶은 하느님 뜻을 따르면 좋겠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은경축을 축하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사제는 역시
교우들과 함께 할 때, 행복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신부님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첫 영성체를 하면 신입 복사들을 받습니다.
신입 복사가 처음으로 복사를 서던 날이었습니다. 복사를 서는 아이 중에
한명은 무릎을 꿇고 있는데 다른 한 명은 일어서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는
꾸부정한 자세로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습니다. 다행히 평화의 인사를 하는 시간이라서 아이에게 왜
그랬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아이는 복사를 하면서 함께 복사를 서는 오빠와
호흡을 맞추어야 하는데 신자 석에 있는 다른 복사의 신호를 보고
움직였습니다. 같이 복사를 서는 오빠는 무릎을 꿇고 있는데 신자 석에
있는 오빠는 일어서라고 신호를 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사 후에 저는 아이에게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호를
보지 말고 함께 복사를 서는 오빠와 호흡을 맞추어야 한단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른인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저는 쉽게 악한 것들의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신앙과 삶도 엉거주춤한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딱 한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매일 술집에 들러서 집에
돌아오는 아빠도 있습니다. 새벽미사에 다녀오면 좋은데 저녁 미사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결국은 친구들과 놀다가 주일 미사를 빠지는 청년도
있습니다. 다른 분들의 잘못과 허물을 비난하지 않기로 했지만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다시 남을 험담하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른이지만
처음 복사를 선 아이처럼 내 앞에 놓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슨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2016년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한숨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예수님의 한숨
실망을 하다 희망을 갖다 좌절도 하고 쾌재도 올리는 다양한 삶입니다.
이래도 세상걱정 저래도 세상걱정 뿐 영원세상 신경 쓸 겨를 없겠지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의 목적도 세상문제 해결해 보려는 거지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숨 나올 수밖에 없으셨던 겁니다.
천국가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이셨거든요.
그래도 신앙인들을 좀 건지신 걸로 하늘잔치 벌이시려는 예수님이셨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오 8,20)”
신앙인들이 부를 노래는 ‘예수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이어야하고.
세속에 물든 신앙인들은 ‘우리 힘냅시다. 예수가 돕잖아요.’일 겁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청주] 양다리 걸치기는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6월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라.>
† 마태 8,18-22
양다리 걸치기는 없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느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의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나 편안했을 텐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녀의 결혼,
출산 문제, 재물이나 교육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어중간이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녀출산과
교육에 대한 관심도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생명응ㄹ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것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