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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1일 금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수도회] 단죄와 배척이 아닌 서로를 품는 자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아모 8,4-6.9-12
† 복음 마태 9.9-13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걷어 로마에 상납하며 부를 축적하는 공공연한
죄인이요 파렴치한인데도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십니다. 이런 모습을
바리사이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 왜 정의롭지 못하신지, 왜 못된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선한 사람이 재앙을 당하게
하시는지 인간의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심판자로만 받아들이면, 그분은 두려운 존재일 뿐이며,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이유도 그분의 징벌을 피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기준으로 이웃을 판단합니다. 마치 스스로가
하느님인 것처럼, 이웃이 완벽하지 못하면 그를 판단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가치가 없다고 단죄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모습은, 하느님의 방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 심판이 아니라 자비라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죄인들도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의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벽한 바리사이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2016년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8,4-6.9-12
복음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벌써 7월의 첫 날입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면 늙은 것이라고
하는데, 세속적인 나이를 볼 때는 아직도 청춘인데 마음이 늙었다는
증거일까요? 아무튼 올해의 반환점을 도는 오늘, 지금까지 다짐했던 것들을
다시금 점검하면서 정말로 멋지고 행복한 후반기를 만들어 나가셨으면
합니다. 혹시 벌써 상반기가 지났다면서 틀려버렸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요즘에 저의 여덟 번째 책 출판을 위해서 계속해서 교정을 보고
있습니다. 출판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판이 왜 이렇게 미뤄진 것일까요? 바쁘다는 이유를
들고 있었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다음에’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이 일만
마치면 다음에....’, ‘저 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에....’ 등등의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잡고 책상에 앉아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 벌써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일에서든 과감한 시작이 중요합니다. 언제부터 공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지금 당장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을 열심히 써 보겠다는 마음가짐보다는, 지금 당장 펜을
들어 첫 글자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이 말씀하셨던 ‘등산을 갈 때 가장 넘기 힘든
봉우리는 자기 집 현관 문턱이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집밖만
나서면 벌써 산의 70%라고 하던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우물쭈물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신 일단 과감하게 시작하는 내가 되어야 앞으로 할 후회들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마태오는 어떻게 했을까요? 세상에
아무런 미련 없이 벌떡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가족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재산도 정리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그 모든 것들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에 자신의 모든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 없이 주님을 따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다음에....”,
“저는 능력이 없어요. 능력이 생긴 다음에....”, “세상의 것들을 더 즐기고서
다음에.... 따를게요.” 등등의 ‘다음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조건 주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는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예”라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가슴으로만 볼 수 있다(생텍쥐페리).
강화도의 선두포구입니다.
장군과 찻잔(‘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느 나라에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렬한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숙소에서 쉴 수 있었습니다.
마침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난 장군은 귀히 여겨 보관하고 있던 찻잔을
꺼내어 차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그만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져 놓칠 뻔한 것입니다. 다른 손으로 다급히 찻잔을 잡아 깨지는
사고는 모면했지만, 장군의 가슴은 순간 철렁했습니다. 아끼던 찻잔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간 장군은 조금 전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아끼는 부하들이 눈앞에 쓰러져 갔을 때도, 적군에
포위되어 자신과 병사들의 목숨이 풍전등화 같던 때에도, 그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사의 목숨보다 작은 찻잔 하나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책임져야 할 장군의 태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장군은 깊은 반성과 함께 그리도 소중히 여기던 찻잔을 그
자리에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내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정말로 중요한 것을 쫓는 현명한 내가 될 수
있으니까요.
어제 먹었던 맛있는 회랍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단죄와 배척이 아닌 서로를 품는 자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마태 9,9-13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단죄와 배척이 아닌 서로를 품는 자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까닭과 제자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9,10) 그분께서는
죄인의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이들보다 죄인 취급을 받는 의지할 데
없는 ‘공적인’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 상종하지도 않던 바리사이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종교생활에서 배제하고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와 함께 식사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바빌론 탈뭇 브라콧 43b).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데 반발한 바리사이들을
탓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 아모스는 사업상의 거래에서
속임수를 쓰고 가난한 사람을 등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죄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단죄는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었는데 그들은 결정적으로 단죄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가까이 대하시고 사랑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보이시면서 회개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품으시려고 애쓰셨지만 특히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9,13)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죄로 기우는 경향 때문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굳어져 후회할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들은 어떤 잘못에도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자기 허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않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으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회개에로의 부르심에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자비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영혼의
치유자이신 그분의 자비에 맡길 줄 알아야겠지요.
오늘 복음에 비추어 신앙공동체의 삶과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기 보다는 남의 죄에
민감하고,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조차 참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탈을 쓰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은연중에 죄인을 공동체의 삶에서
배제시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떤 때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오히려 더
냉정하고 가혹한 ‘낙인찍기’를 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한 번 실수하면
헤어나지 못하고, 틈만 나면 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들춰내고 어떤
책임이나 봉사에서도 배제시키는 경우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지요.
무릇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오히려
신앙공동체에서나 사회생활 중에 죄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
공동체의 넘치는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회개는
가혹한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더 깊이 그리고
더 빨리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영혼의 어둠 속을 헤매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서로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나누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배척하고
단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아모 8,11)
제가 어린 시절에만 해도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기저기에 많이 있지만 옛날에 비해서는 많이 줄어 들었지요.
그런데 사실 전 세계에 식량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들이 너무 많이 움켜쥐고 있고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우리나라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하느님 말씀에 굶주리는 사람은 훨씬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엔 하느님 말씀이 참된 양식이었는데
먹을 것이 풍요로와 지면서 하느님 말씀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현대인들은 잘 먹어서 육신은 비만이지만 영혼은 점점 매말라 갑니다.
이 시대는 양식이 더 필요하고 맛집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더 필요하고 말씀의 나눔이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이 영으로 주린 사람들에게
단비같은 참 양식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주린 영을 달콤하게 채우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행복한 죄인에서 다시 출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는 한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되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따르게됩니다.
함께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 9)
함께한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함께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병든 우리들을 먼저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마음이 병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욕심때문에
자비를 놓치며 살기 때문입니다.
병든 우리 삶을 치유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함께함으로써 드러납니다.
함께하는 것이 자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죄인인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 우리는 행복한 따름 행복한 죄인이 됩니다.
행복한 죄인은 매순간마다 주님의 자비를 입으며 살아갑니다.
행복한 죄인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과분한
선물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따름은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이제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죄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악마의 또 다른 얼굴, 갑질
2016년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 9,9-13
악마의 또 다른 얼굴, 갑질
유명 버스 회사 회장이란 작자의 만행과 슈퍼 갑질로 서민들의 분노가
가시지 않는 하루였습니다. 회장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버스 회사 직원들에 대한 상습적인 폭언과 폭력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큰 악행을 가족과도 같은 직원들에게
저질렀는지 분노로 제 가슴까지 떨릴 지경입니다.
회장의 무자비한 폭언과 폭력에 수많은 직원들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견디다 못해 회사를 그만둔 예가 다반사랍니다. 그런 회장이
받아가는 연봉 금액을 보고 나면 놀라서 가슴이 헉헉, 억억(億億!) 할
정도랍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갑질입니다. 이제는
사라져야할 저질 문화가 아직도 우리 사이에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현실입니다.
누군가의 갑질로 인해 무너져 내린 자존감과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러운 갑질로 인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평생
지속됩니다. 어떻게 한 인간 존재가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모상인 또 다른 한 인간 존재에게 그리도 큰 수치와
굴욕감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 안에서도 아직까지 슈퍼 갑질이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갑질을 유난히 혐오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아시면 화가 나서 크게 분개하실 일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갑질 퇴출 운동에 앞장서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지금 이 순간 갑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갑질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마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 어딜 가나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 하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난한 백성들에게 사악한 갑질을 하던
부류가 있었으니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날도 세리 마태오는 세상 다 산 듯 한 흐릿한 눈빛으로 세관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하루 종일 하던 일은 자기에게 할당된 일정 지역의
세금을 걷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세금은 얼마나 가지가 많던지 걷는 사람도
정신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많이
부과하려고 기를 썼습니다.
제 때에 세금을 못내는 사람들에게는 날짜가 흐를수록 더 많은 금액이
부과되었습니다. 걷은 세금을 상부에 납부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을
빼돌렸습니다. 그 돈으로는 고리대금업까지 겸했습니다. 돈을 빌려주고
제때 못 갚는 사람들에게는 갖은 위협을 가하고 집문서며 땅문서를
강탈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하는 일들을 당시 세리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세리 마태오의 집 안 깊숙이 숨겨둔 금고에는 차곡차곡 돈이
쌓여갔습니다. 그러나 돈이 싸여갈수록 마음은 더욱 허전해져 갔습니다.
힘없고 빽 없는 동족들 등쳐서 로마제국에 상납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니 늘
우울했습니다. 그런 허탈함을 돈으로, 잡기로, 취미생활로 채워보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텅 비어만 갔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민족 반역자의 삶을 그저 하루하루
견뎌가던 어느 날, 그의 눈앞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났습니다.
도저히 구제불능 같았던 세리 마태오의 삶에도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이
펼쳐진 것입니다. 너무나 강렬한 태양빛 앞에 인간의 눈이 잠시 멀 듯이
너무나도 강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냉혈한 세리 마태오의 심장을
녹여버린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슈퍼 갑질에 맛을 들인 사람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이 사회와 공동선에 해를 끼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분들,
그분들에게도 뜻밖의 손님처럼 예수님의 자비의 빛이 스며들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악행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자각하기 바랍니다. 목소리 높여 외치는데 하루 빨리 회개하기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시공제한 넘은 공감발생 기능도 있습니다.
2016년 다해 7월1일 연중제13주간 금요일
시공제한 넘은 공감발생 기능도 있습니다.
본당의 교적 중 1/3은 제대로 신앙생활 하지만 2/3는 병든 이들입니다.
신부님들의 사목도 거의 1/3을 위해 하니까 안면사목활동 위주입니다.
2/3 병든 이들을 위한 공감사목에 나서는 이들이 참 필요한 때입니다.
2/3 병든 이들을 위한 일터는 인터넷 신앙재교육 사이버사목 좋습니다.
하느님이 알려주신 새 선교지라 볼 때 많은 이들의 동참이 필요합니다.
시공의 제한받는 인간이지만 시공제한 넘은 공감발생 기능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
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오 9,12)”
신앙생활 전달은 일반방법인 안면사목 외에 공감사목인 현대방법도
써야지요. 매스컴회사가 기기들로 공감불러 현대생활 끌고 가는데 보고만
있을 겁니까?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청주] 주님 품 안에 모두가 잘난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 9,9-13
주님 품 안에 모두가 잘난 사람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돈도 있어 보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
받고 따돌림 당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안목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품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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