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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4일 주일 [(녹) 연중 제23주일]
[수도회]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떠남과 버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지혜 9,13-18
○ 제2독서 필레 9ㄴ-10.12-17
† 복음 루카 14,25-3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냐는 지혜서 저자의 고백을
되새겨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제자가 되려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하고,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불러 주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헤아려 봅시다.
◈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의 늙은 모습과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더욱 실감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는 인간의 면모가
생각납니다. 위대한 사도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 애쓰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은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포기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몹시도 힘든 길이며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욕망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 여정 안에서 우리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갈 십자가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주님과 분리될 동기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작은 희생과 고통들을 구원의 열매로 바꾸어 주십니다.
일상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변모됩니다.
우리가 가지는 작은 용기를 통해 교회는 건설됩니다. 우리가 지니는
전적인 신뢰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기쁘게
2016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9,13-18
제2독서 <이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 말씀입니다. 9ㄴ-10.12-17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5-33
사람들이 제게 일중독이 아니냐는 말씀들을 종종 하십니다. 일을
너무 만든다면서 조금 여유 있게 쉬면서 하라고 합니다. 솔직히
요즘의 제 일정을 보면 이렇게 살아도 될까 라고 할 정도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옛날의 제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정도의 일정을 소화하려면 걱정과 두려움이
먼저 앞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보다는 이것을 해내고
난 뒤의 제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기쁜 일, 좋은 일 등을
떠올리다보니 일이 무섭다기보다는 제게 또 하나의 선물이 주어지는
기회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계속 제 곁을 떠나지 않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사실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늘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괜한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후회할 뿐입니다. 어차피 맞이할 일과
시간이라면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 긍정적인 생각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지에 있다 보면 큰 병에 걸렸다면서 안수기도를 청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 드리고 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저 그렇게 나쁘게 살지 않았거든요. 열심히 살았고, 봉사도 하면서
잘 산 것 같은데 제가 왜 이런 병에 걸린거죠?”
그런데 똑같은 병인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신부님, 그래도 빨리 병이 발견되어서 주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만약 1년 뒤에 발견되었으면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누가 더 지금을 더 행복하게 살까요?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현재를
놓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다가 현재를
놓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행복한 미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제대로 걷는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짐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짐과 같은 십자가
짊어지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짊어져야 할까요? ‘아~~ 힘들어’만을 외치면서 짊어질까요? 아니면
‘내가 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거야?’라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까요?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들 수가 없습니다. 얼마
못가서 분명히 이 십자가를 어디다 버릴까만을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즉 피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 이 순간을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이고 모여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행복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졌으면 합니다.
삶에서 기분 좋은 시간이 길어지면 행복한 것이다(카네만).
특강 전에 있었던 매듭을 푸는 성모님께 드리는 구일기도.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옛날에 한 산골에 부지런한 나무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주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예쁜 오두막집도 짓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지요. 그런데 이런 행복을 시기한 것일까요?
어느 날 나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글쎄
오두막이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하염없이 불타고 있는 집을 보고
아내는 “아이고~~ 우리 집. 어떻게 해...”를 외치면서 우는 것입니다.
이 나무꾼은 아내에게 이렇게 위로를 했답니다.
“여보, 울지 마! 다 타도 우리에게는 도끼가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도끼가 있으니 나무를 해 올 수 있고, 이를 통해 돈을 벌어 다시 집을
지으면 되는 것입니다. 없어진 것만을 바라보니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없어진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어떨까요? 어떤
고통과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까?
갑곶성지에서의 토요특강. 11월말까지 계속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떠남과 버림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3주일, 루카 14,25-33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33)
Sayings on Discipleship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떠남과 버림
루카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와
단호함을 되풀이해서 강조합니다(9,23-27; 9,57-62). 아마도 루카가
바라본 초기 공동체가 예수님을 따르려는 결단이 미흡했거나, 박해
상황에서 단호한 신앙의 결단이 요청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그 여정은
적대자들에 의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분께서 자신들이 그리는 세상의 왕국을 세우러
가시는 것으로 착각하며 부귀영화를 꿈꾸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몇 가지 요건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자기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14,26). 어법상 자신의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자신의 십자가보다 더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늘 주님을 첫 자리에 두고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가족, 특히 아내와 자식은 소유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소유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보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삶의 중심을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두는
‘존재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아와 자신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없으니 각성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14,27). 누구든 행복을 바란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고통을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다가온 고통에 짓눌려 거기에
주저앉아버리는 것, 그 고난을 자기 힘으로만 어떻게 해보려는 것
또한 소유의 일종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끝으로, 제자가 되려면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하늘 나라는 저 먼 창공 위가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과 해방, 인간다운 삶의 상태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려면 ‘무소유’의 상태가 되어야만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부르시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떠남’과 ‘버림’임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받으려면 ‘나’로부터 떠나야 하고,
소유로부터 떠나야 하며, 하느님을 가리는 혈연, 학연, 지연 등
인연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지혜'이신 주님께 내 삶의 맡겨드리며,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내 삶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행복한 제자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3주일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33)
여러분은 가진 것이 많습니까?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들이겠지요.
그리고 내가 가장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물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런 것들도 다 버려야
당신 제자가 될 수 있다네요. 너무하시는 것 아녜요!
예수님 말씀의 본질은 소유가 집착이 되면
사랑에서 멀어진다는 경고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부모 형제 자녀가 내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의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들이지요.
이렇게 여기는 사람은 그들을 참으로 감사한 존재로 사랑하되
내 소유인 양 착각하고 집착하지 않게 되지요.
내가 가진 모든 물건도 알고 보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물건을 사용하는 것과
내 것으로 집착하며 소유하는 것은 아주 다르답니다.
오늘 저를 만인의 연인이 되기 위해 사제가 되게 하시고
만인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오늘 귀한 부부의 인연을 맺는
신랑신부도 서로를 내 것이라 소유하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가까운 반려자요
가장 귀한 선물로 여기며 평생을 해로하길 빌어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사람들 한분한분 떠올리며 작은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 어떨까요?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3주일.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이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아를 묶고 있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존재감은 소유에 있지 않고 오히려 버림에 있습니다.
소유를 다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소유를 버려야 생명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것이란 여긴 착각의 소유는 실은 하느님 곁에
잏어야 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도 빠듯한 우리의 시간입니다.
버려야 주님께로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여정이란 버림의 여정입니다.
버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임을 삶의 스승들은 잘 가르쳐줍니다.
생명의 두 주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진실로 의탁할 분은
오직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은 더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믿음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참된 믿음은 참된 버림이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언제나 우리의 뜻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3주일
2016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3주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오늘은 9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자’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가톨릭 용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순(殉)이란 죽은 자의 뒤를 이어 10일 이내에 따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순교란 자신이 신봉하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 바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전에는 이를 치명(致命)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준 믿음, 즉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놓은 사람을 말합니다. ‘순교자 성월’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리석은 삶을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가
박해를 받고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뜨거운 신앙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굳센 믿음으로 삶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교구청 식당의 게시판에는 병원에 계신 신부님들의 명단이
붙어있습니다. 10년 이상 병상에 누워계신 신부님, 투석을 해야 하는
신부님, 암 치료를 받으시는 신부님, 골절로 입원하신 신부님이
계십니다. 요양 중이신 신부님도 계십니다. 신자들과 함께 사목의
현장에 계시면 좋겠지만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아픔과 고통의
바람에 흔들리시는 신부님들도 계십니다. 투병 중에 있는 신부님들이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양 중에 있는 신부님들이 다시금
신자들과 함께 사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보름간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열병
때문에 잘 먹지도 못했고, 얼굴도 부었었고, 중환자실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다리의 골절 때문에 수술을 하기도 했고, 목발에 의지해서
걷기도 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그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지금의 건강이 더욱 감사하고, 고마운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칠 정도로 고통이
크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주었던
베로니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던 빌라도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도망갔던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었는지요?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참으로 따라야 할 가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것과 하느님이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참된 지혜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의 ‘십자가’를 생각하였습니다. 1997년도 IMF
당시에 형은 사업에 실패를 하였고, 그 때부터 제가 부모님을 위한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와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당연한 도리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2016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3주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4,25-33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비의 해 정점을 찍는 특별한 이벤트가 내일(9월 4일)로 다가왔습니다.
가난한 이웃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이웃들의 따뜻한 어머니로
사셨던 복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1910~1997)의 시성식이 바티칸
광장에서 거행됩니다.
지난 한 세기를 살아간 여성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여성의 이름을
적으라는 설문 조사 때마다 첫 자리는 언제나 그녀의 이름이었습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일컬어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땅 연필’에 지나지
않는다며 극구 자신의 선행을 감추었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막사이상,
슈바이처상, 요한 23세 평화상,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업적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1997년 9월 5일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 인도 정부는
국장으로 타계를 애도했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시 사후 5년이 지난
후에야 시복절차를 추진하는 관례를 깨고 선종 6년만인 2003년
10월19일에 그녀를 복녀품에 올렸습니다.
평생에 걸친 사도직의 모토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임종자의 집,
나환우 치료센터, 무료급식소, 결핵요양소, 에이즈 치료센터와 같이
너무 힘들어 기존 수도회들이 꺼리던 사도직,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사랑의 사도직을 계속 펼쳐나갔습니다.
만인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위대한 인물이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영성생활의 정점을 찍은 살아있는 성녀로
존경받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평생토록 따라다니던 무거운
십자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생애 내내 짙게 드리웠던 영적
어둠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서한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저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속에는 셀 수도 없이 자주 자신이
겪은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하소연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이 시복시성에 합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더 큰 놀라움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계속되는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하느님을
갈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울 때면 어김없이
영적지도자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고통스런
내적 경험들이 위대한 사명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녀의 영적생활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그녀는 더욱 더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고 특히 예수님의 수난 속에서
그분과 하나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가난한 이웃들인
콜카타의 빈민가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했습니다.
“빈민가를 걸어가거나 어둡고 누추한 곳에 들어설 때 주님은 항상
그곳에 계십니다.” 그 결과 연옥체험과도 같은 혹독한 영적 시련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로 그 위대한 사랑의 사도직을 계속해나간
것입니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그녀 내면의 심연의 고통을 감추었고 내면의
골고타를 감추었습니다. 언젠가 그녀는 영적지도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제가 성녀가 된다면 분명 ‘어둠의 성녀’일 것입니다.
언제나 어둠에 빛을 밝히러 세상에 내려가 있을 테니 천국에는 없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짙은 영적 어둠과 심연의 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 인생의 결론은 한결같았습니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 살레시오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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