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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9월28일 수요일 [(녹)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수도회] 영원한 행복을 위한 선택과 몰입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욥 9,1-12.14-16
† 복음 루카 9,57-62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과 같은 삶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성공이 불확실해 보이고 역경이 가득해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길은 희생과 비움입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선택한
이들에게는 참된 행복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그전에 많은 것을
포기하여야 하고 갖가지 역경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보금자리’를 포기합니다. 자신이
편하게 살려는 타성과 안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끊임없는 노력과 투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주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구원의 쟁기’를 하나씩 손에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망설이는 가운데 그 ‘쟁기’를 내려놓습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일을 먼저 앞세우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생깁니다.
구원 사업은 인생의 최고 가치이며 가장 먼저 앞세워 진행해야
할 일입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구원 사업의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2016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 9,1-12.14-16
복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7-62
어제는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를
들어보니 이 가을비를 통해서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선선한 가을
날씨를 맞이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하긴 올 여름은 정말로 더웠고
그래서 많은 분들이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여름이 되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 남량특집입니다. 그리고
극장가에서는 ‘공포영화’가 등장하기도 하지요. 왜 여름에 이런
공포물을 상영할까 싶지만, 실제로 이렇게 무서운 것을 보게 되면
체온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하긴 무서움을 느끼게 될 때에는
서늘함도 동시에 체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런 공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에
인기 있게 방영되었던 ‘전설의 고향’ 남량특집을 볼 때면 무서운
장면에서는 눈을 꼭 감고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상황전개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무섭고 끔찍한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지금 역시 그런 장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을 얼마 전에 실제로 볼 수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거리를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승용차가
심하게 부셔져 있었고 곳곳에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끔찍했고
그래서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큰 사고로 인해서
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얼마나 많이 다쳤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을 어떤 엄마와 어른 아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엄마가 아이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가리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어린 아이에게 나쁜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착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악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많이
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선하고 긍정적인 것들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이 선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는 사람과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장사도 못 지내게 하고, 작별인사도 못하게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의
일이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주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 세상의 악하고 잘못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더 선한 것을 보고 실천해야
하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때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게 된다(스캇 펙).
이스라엘의 무덤입니다.
내일 싸우자.
어느 날 메뚜기가 길을 가던 하루살이를 때렸습니다. 하루살이는
너무나 화가 나고 억울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기를 그냥
때린 메뚜기를 용서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하루살이 친구
20,000마리를 데리고 메뚜기를 찾아갑니다.
메뚜기를 20,000마리의 하루살이가 포위한 뒤에, 마지막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이니까 소원 한 가지는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자 메뚜기가 소원을 말했습니다.
“애... 내일 싸우자.”
내일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하루살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소원을 들어주면 복수할 수 없고, 안 들어주자니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아무튼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해결의 방법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성공적인 삶을 만들어나가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지 옆에 새로 생긴 식당입니다. 맛있어요. 많이들 이용하십시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영원한 행복을 위한 선택과 몰입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루카 9,57-62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The would-be followers of Jesus
영원한 행복을 위한 선택과 몰입
인생은 길입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집을 나서 귀가할 때까지
길을 걷지요. 그렇게 우리는 늘 길 위에 있습니다. 길은 의미와
정서를 발생시키고 만남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무대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살기 위해, 버리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고 계십니다.
길 위의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부르심에 응답하여 함께 걷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길이
어떤 길이며 왜 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자발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으나 어떤 길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9,57-58).
예수님께서 길을 걷다가 만난 사람 중에는 그분께서 부르시자 자기
일을 더 중요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미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9,59-60). 또 따를 의지도 있고, 따르기 위해 애착을
두는 것들에서 떠날 의지도 확고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 얼마나 긴박한 일인지 알아차리고 못한 채
안일한 태도를 보인 사람도 만나셨습니다(9,61).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요?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않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길이나 공연히
헛수고를 하며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자꾸만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행복하게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야하지 않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 나만을 위한 만족을 찾는
자세를 버리고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가치 있는 것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와 소중한 것들을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하느님의 손길을 읽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가난의 길이요, 비움의 길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9,58) 예수님의 길, 곧 운명과 처지를 받아들여 그분과
함께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낭만적인 풍경도 아니요 일시적인 감각의 자극으로 맛보는 감상적
충족감도 아닙니다. 행복은 고통과 어둠을 겪어냄으로써 만나는
선물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버리고 떠나는 길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하느님의 미래를 향해 과감히 자신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애착이
많아 버리지 못하고 생각과 행동이 묶여있다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자유롭게 행복 자체이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애착이 있는 길은
폐쇄되고 말 것입니다. 영(靈)의 숨결이 막혀버리지요.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내 인생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소중한 것을 위해 '즉각적으로' 찾아나서고
'뒤를 돌아봄 없이' 몰입하며 항구히 투신해야겠지요. 주님께서
먼저 부르셨든, 주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어 내가 자발적으로
따라나섰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사랑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망설임없이 걸어갔으면 합니다. 거기에 참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나를 따라라.”> (루카 9,59)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세 사람의 유형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어디가시든 따라가겠다고 자신합니다.
두번째 사람은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부르시는데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네요.
세번째 사람도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부르시는데
가족들에게 작별인사 하고 오겠다네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해보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불러주셔야 한다는 것이 첫번째 조건인가 봅니다.
두번째 조건은 그분이 불러주실 때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버려 두고
즉각적으로 따라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그분이 부르실 때는 지금 오라는 것이지
좀 있다가 오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런저런 것을 해보겠다고
감히 욕심 부리지 맙시다. 그분이 나를 부르시어
"지금 기도하여라. 지금 저 사람을 도와 주어라.
지금 어디를 좀 다녀오너라." 하실 때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그분의 참 제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너무 많은 것에 묶여 있는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부질없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우리의 오늘입니다.
온 힘을 다해 우리의 집착을 갈아엎기에도
부족한 우리네 시간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라는 쟁기를 잡고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을 때 가장 살아있는
오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따르는 이들의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소중한 오늘을 깨우쳐줍니다.
허망한 욕망을 내려놓는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예수님에게서 다시 배우십시오.
우리의 잘못된 방식이란 오늘이라는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것입니다.
참된 시간이란 바로 이순간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 9,57-62
백남기 임마누엘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고인을 추모하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 고인께서는 더 이상 폭력이 없는, 더 이상 아픔이
없는,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면, 더 이상 백남기 임마누엘 어르신 같은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 이 땅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보듬어 주는 세상, 약한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해방을 주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 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롱을 받기도 하고, 십자가를 져야 했고, 창에
찔리고,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이 나의 손이 되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나의 발이 되어 주십시오.’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 길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때로는 그 길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가슴 아플지도 모릅니다. 욥 성인은 그래서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도, 가족들이 행방불명 된
것도, 몸에 부스럼이 생기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이루어지기를 청했습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어르신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함께 연대하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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