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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6일 목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수도회] 사랑을 위해 가난한 마음으로 인내롭게 청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갈라 3,1-5
† 복음 루카 11,5-13
◈ 오늘의 묵상
믿음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이 보이는 것들을 갈망하고, 소유하고, 집착하며,
때로는 경쟁 속에서 강탈하여 자족하는 것이 성공이라는 망상을
강요하는 반면에, 우리의 믿음은 세상이 감추고 보여 주지 않는 영적인
갈망에 대한 발견이자, 우리 안에 숨 쉬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 곧
성령을 따라 사는 기쁨의 삶입니다. 하지만 세상 속 우리 믿음은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내가 바라보고 청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
주는 것은, 요즘처럼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이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임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인디언들이 가뭄에 기우제를 바치면 꼭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바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내가
간절히 청한다고 언제나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야말로 우리가 거저 받은 최고의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내 의지로 청해서 얻는 세상의 행복과는 달리 성령은 우리
안에 숨 쉬고 계신 하느님의 영입니다. 믿음은 이 성령의 기운, 바람,
숨결을 내면에서 듣고, 그분과 머물며, 그분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恨)이 부활의
신바람[神明]이 되는 길을 찾은 영의 인간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2016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3,1-5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5-13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면서 많은 성당을 봤지만,
“와~~ 정말로 대단하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했던 성당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성당들이 거의 비슷하니까요. 그런데 정말로
대단하다고 소리치게 했었던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입니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생전에 설계했던 성당으로 아직도 건축 중입니다. 이렇게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가우디의 뜨거운 열정의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열정과 노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이런 시선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자처럼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건축의 성자’라고 사람들은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많은 성인성녀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모습으로 생활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쩌면 그 순간에는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에게 세상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중요함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하느님께 열정과
노력을 봉헌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결국 나를 드러내기 위한 열정과 노력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몇 번의 거절을
받는다고 포기해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시지요. 주님께도
이렇게 매달릴 수 있는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매달리는 것은 인간들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 말씀에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눈보다는 하느님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함께 할 수 있는 열정과 노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는 똑같은 실수를 좀 더 일찍 저지를 것이다
(탈룰라 뱅크해드).
건축의 성자, 가우디의 무덤.
죽어서도 사랑하겠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주례 선생님이 신랑에 묻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랑의 대답이 아주 의외인 것입니다. 신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그 순간에 하객들이 술렁대기 시작했지요. 주례 선생님께서도
당황하셨는지 다시 묻습니다.
“신랑은 장난하지 말고, 질문에 잘 대답하길 바랍니다. 신랑은 신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랑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겠습니다.”
이 정도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부부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많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을 잘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데도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을 위해 가난한 마음으로 인내롭게 청함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루카 11,5-13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사랑을 위해 가난한 마음으로 인내롭게 청함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11,10)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마태 6,8)
주님께서 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실까요? 그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청하느냐, 왜
청하느냐에 앞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는 무엇을 달라는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친교 안에 머물겠다는 다짐이요,
주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거룩한 위탁의 행위이며, 주님을 믿는다는
확고한 신앙고백인 셈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권능을 믿고 그분 안에
머물 때 자비시오 선이신 분의 모든 것이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는 어미의 마음에 비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으로 더 좋은 것, 성령을 주고자 하시지만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면 아무것도 주실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주님께 등을 돌리고 제멋대로 살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쉬울 때만 애원하고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는
어리석고 뻔뻔스런 행동을 그만 둬야겠지요. 세상 이치에 밝고
자기잇속만 챙기는 사람은 정작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참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11,10)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당신 나라에
초대하시며 아무런 차별 없이 친교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자신의 지식, 신분, 외모, 재산, 인맥
등을 앞세워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주시는
끊임없는 사랑과 쏟아지는 은총의 폭포수 앞에 능동적인 응답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능동적인 자세란 주님과 상관없이 나 홀로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의탁하고 매달리는 가난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 인내심을 가지고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간절함과 당장 응답이 없어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영적 여유가
있을까요?
한편 주님께 뭔가를 청할 때는 필요한 것이 있어서 청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왜 청하는 것일까요? 자신과 이웃, 교회와
세상을 위해 청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이웃의 희로애락에 함께하기
위해서 청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회개와 이웃 사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위해 청해야지
순전히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목적으로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청한다면 그 청을 들어주실 리 만무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하느님의 선과 사랑과 정의가 드러나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끈기 있게 청하며 기다리는 행복한 기다림의 날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11,13)
여러분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면 그것을 잘 얻곤하나요?
아니면 기도한다고 하는데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 것 같나요?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께서 안 들어 주실 리가 없다네요.
그럼 뭐가 문제일까요?
첫째는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청해야 하는데
조금 해보고는 안된다고 포기하기 때문일 거라네요.
뭐든지 때가 있는 법 99일을 마늘과 쑥을 먹고도
하루를 못 기다려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처럼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청하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두번째는 우리가 가당찮은 것을 청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주시려는데
우리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을 청할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큰 선물은 성령, 곧 거룩한 생각과 마음이지
부귀영화와 같은 욕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 그러니 주님께서 인색하셔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안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거룩한 생각과 정신을 주십사
끊임없이 청하기만 하면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큰 선물,
곧 하느님의 영을 얻게 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자비로이 베푸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도다운 기도
2016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 11,5-13
기도다운 기도
젊은 사제 돈 보스코가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토리노 시 외곽에서
시작한 오라토리오의 발자취를 쫒아가며 얼마나 튼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라토리오가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큰 갈등과 고통, 수모가
뒤따랐는지 모릅니다.
야생마 같은 뒷골목 아이들 수백 명이 함께 모여 떠들어대니 가는 곳
마다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때는 병원 마당에서 어떤 때는
풀밭에서 모였습니다. 어떤 때는 본당 마당을 어떤 때는 공동묘지를
떠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 보스코는 피나르디씨가 임대해준
헛간에 꿈에 그리던 오라토리오를 정착시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삿짐을 싸서 이고 지고 나르면서 돈 보스코의
눈에서는 눈물이 쉼 없이 흘렀습니다. 9살 때 꿈에(이리떼가 양떼로
변하는 꿈)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에 드디어 한발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보여주시고,
완성시켜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시는 말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떠도는 오라토리오가 계속되던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상습
피로와 갖은 스트레스로 인해 돈 보스코는 몸과 마음, 정신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의 건강은 돌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풀밭에는 돈 보스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남의 속사정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고 재미있게 뛰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 보스코는 내일 당장 이 풀밭 오라토리오를 떠나야했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기약도 없었습니다.
아이들과 잠시 떨어져 나온 돈 보스코는 홀로 들판을 걸었습니다.
자신만 바라보는 수많은 아이들, 그러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
당국자들, 교회 장상들, 친구들...
아직 젊은 사제였던 돈 보스코였습니다. 앞길은 캄캄하고, 당장 아무런
대책도 없고, 돈 보스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씻어내며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나의 주님! 왜 제게 빨리 이 아이들을 위한 좋은 장소를
제공해주시지 않으십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십시오!”
곰곰이 생각해보니 돈 보스코의 기도는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였습니다.
그가 바친 기도는 자신을 위해 바친 기도가 아니라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내 집의 건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집의
건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적당히 바치는 미지근한 기도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바친 기도, 삶 전체를 바친 기도였습니다.
때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 가운데 많은 경우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너무 유치하고
기복적입니다. 또 어떤 기도는 너무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하느님을 힘들게 하는 억지요
강요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작업입니다.
지금 내가 바치는 이 기도가 정말 제대로 바치는 기도인가? 내 기도
지향에 문제는 없는가? 내 기도방식은 지금 성장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오늘 복음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청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도 중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비극이 없는, 더 이상의 무자비한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서
즉시 들어주실 제대로 된 청원기도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 11,5-13
엠이 부부들 모임에서 함께 대화를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함께 한 분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꾸었던 ‘꿈’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였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버린다는 꿈’이야기 였습니다.
한분이 이렇게 해몽을 해 주셨습니다. ‘연휴기간에 분주함을 버리니,
이렇게 자연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늘 정해진 일들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갑작스럽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하겠다고 하였고, 결국은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고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인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제게는
과분한 말이지만, 제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말이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본당으로 가서 사목을 해야
하는데, 교구청에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교구장님께서 배려를
해 주시면 본당으로 가서 사목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해몽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생기를 얻듯이, 사제들은 신자들과 함께 할 때,
정체성도 느끼고, 사목의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었고, 저도 본당에서 사목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전해주신 엠이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전에 친구들과 ‘롤링페이퍼’를 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
친구에 대해서 생각했던 내용을 종이에 적는 것입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 적어준 글을 보면서 고맙기도 했고, 제가 모르는 저 자신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롤링페이퍼는 따뜻한 이야기를 적기 마련입니다.
친구의 장점을 적기 마련입니다. 함께 했던 추억을 나누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롤링페이퍼입니다. ‘꽃, 샘물, 구름, 바람, 별, 하늘, 산과 바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형제와
친척, 친구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볼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열릴
것입니다. 구하십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얻을 것입니다.’
제가 아이였을 때 부모님께서는 제가 원하는 것들을 채워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고, 먹을 것을 주셨고, 입을 것을 주셨고, 가르침을 주셨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주셨습니다. 제가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부모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남들에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랑받고 싶으시면 먼저
사랑하십시오. 용서 받고 싶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먼저 선물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반드시 주실 것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 11,5-13
반드시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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