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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20일 목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수도회] 온 세상에 사랑의 불씨를 지피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3,14-21
† 복음 루카 12,49-53
◈ 오늘의 묵상
믿음은 도전입니다. 이제까지 확신하고 살아온 세속적 가치들에 맞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에 대한 선택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겸허함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식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의 양보다 내가 모르고 살아온
하느님의 지혜의 엄청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는
회심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아집과 편견에 대한 도전이고, 동시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위험한 기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복음서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른다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말씀으로 ‘기억’해 내는 것이고,
이는 타성에 물든 내 옛 삶을 변화시키는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 개인의 회심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가 복음적이지
못한 가치들로 물들어 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동의
기억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한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함께 공감하는 동시에,
서로 힘을 합쳐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위험한 기억’을 해 낼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 세상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위험에 빠뜨리시고,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 안의 모순과 싸워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대조된 사회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진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완성됩니다.
2016년 다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3,14-21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어느 형제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우연한 만남에서 첫
눈에 반해버린 여자였습니다. 밝은 미소와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배려에 이 사람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계속해서 구애를 했습니다. 이 자매 역시 이 남자가 싫지 않았습니다.
성실한 모습과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이 남자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상대방의 모습 중에서 싫은 것은
무엇일까요? 싫은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 것이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된 사람
역시 좋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자매의 부모님을
뵙고서는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네 부모님이 좀 이상해. 성격이 특이하셔서 도대체 나하고 맞지가
않네. 나는 당신 부모님을 이제 보지 않을 거야.”
이 자매에게는 사랑한다면서 이 자매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인지를
의심해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와 연관된 것들은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언젠가 그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이유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한 집안이 서로 갈라질 것이라고
하시지요. 가까운 친척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서로 등지라는
말씀일까요? 주님께서 가족과 불화할 것을 명하신 것일까요?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나 되게 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첫째는 하느님 사랑이고 그 다음이 사람 사랑임을 안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습니까? 부모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을 만드신 분을
몰라본다면 부모님께도 제대로 된 공경을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완성됩니다.
당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 당신은 용서한다는 것의 행복감을 알게 될 것이다
(톨스토이).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 바로 변화의 불입니다.
위험한 무관심
중국의 한나라가 통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략이 뛰어난 차모를
둔 왕이 적국에 쳐들어가려고 첩자를 적국으로 보내서 동정을 살피게
했습니다.
첩자가 돌아와서 “지금이 적을 치기에 적기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의
원성이 보통 높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참모는
“아닙니다. 아직 3개월은 기다려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기다리라고 조언했습니다.
3개월이 지나자 다시 왕은 첩자를 보내 그 나라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첩자가 돌아와 “이젠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떠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참모는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3개월만 더 기다려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다시 3개월이 지나자, 왕은 다시 첩자를 적국으로 보냈습니다.
첩자가 돌아와서 “이상하게도 그 나라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멍하니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참모는 왕에게 고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고,
결국 힘 안 들이고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 역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무관심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이
완전히 없는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나라의 모든 일에 관심이 없게 된 것이고, 그 결과 다른 나라의
침략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유혹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마음을 키워나가는데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귀에게 손쉽게 내 마음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내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어떤 마귀도 침범하지 못할 굳건함을 갖춰야
합니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무관심을 없애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온 세상에 사랑의 불씨를 지피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온 세상에 사랑의 불씨를 지피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겪으실 고난의 사건 앞에서
괴로워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51) 하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며 타오르길 바라시는
불은 무엇일까요? ‘불’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세상이 겪을 세말 심판을 뜻합니다(12,49).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 괴로워하시며 심판을 언급하시는 것은 간절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회개의 촉구입니다.
우리에게서 타올라야 할 불꽃은 한마디로 사랑이요 사랑의
열정입니다. 나에게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감성과 쾌락, 정치권력과 거대 자본의 힘에
끌려가는 이 사회는 희미한 불빛만이 새어나오는 듯합니다.
국회 입법조사처 분석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12년 기준으로 전체
국민 소득의 44.9%를 상위 10%가 차지하는 전세계에서 최악의 소득
양극화 국가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회원국들 가운데 저출산, 고령화
추세가 가장 심각하고, 노인빈곤율은 49%로 가장 높으며,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지출은 가장 뒤떨어지고, 자살률은 여전히 1위입니다.
또한 국민 스스로 느끼는 건강도도 가장 나쁜 나라로 꼽혔고, 삶의
만족도는 최하위 수준이며, 특히 50대의 사회적 고립감은 가장 위험한
상태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노인자살률 또한 가장 높습니다.
정부신뢰도 또한 최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한국은 최악의
위험사회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실상을 ‘헬조선’ 곧 살기 힘든 지옥같은 세상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러한 시대의 표징을 읽어내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예언자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러한 표지들은
사랑의 결핍이요, 정의의 실종이며 인간 스스로 인간을 도구화하고
핍박함으로써 예수님을 추방해버리는 악과 불의의 표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향한
열정, 사랑의 모닥불을 다시 지펴야겠습니다. 무관심을 태워버리고
애정 어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하느님과 나를 갈라놓는 나의 못된
성향과 이기심을 태워버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억울하게
핍박받고 정의를 위해 싸우다 갇힌 이들을 향한 연대의 정신을
가져야겠습니다. 차별을 없애는 사랑의 다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고, 냉정한 심장을 녹이며, 다른 이들의
한숨소리를 듣는 귀를 열어주고 집단적 이기주의와 구조악에 불의에
맞설 용기를 심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그렇게 모든 것을
태워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애타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의 불을 지펴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온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의 불꽃, 정의의
불꽃, 평화의 불꽃이 피어나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날이 별로 없었다지요.
모든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미움과 증오가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선을 행하고 싶지만
어느새 악이 내 맘속 한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긴장과 갈등이 일어나고 싸움과 대립이 생겨납니다.
진보와 보수가 싸우고 여등과 야당이 싸우고
노측과 사측이 싸움니다.
남과 북이 싸우고 세대간에도 갈등과 대립이 생깁니다.
이 세상도 그렇고 내 맘속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바람과 현실은 이토록 차이가 많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악이 선보다 더 우세해 보여도
미움이 사랑보다 더 강해 보여도 우리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비겁하게 악에 굴복하고
그의 하수인이 되지 말고 평화와 선의 도구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 12,49-53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의 계란이 깨지면
다른 계란들도 깨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4곳에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한곳에만 보관했다면 전쟁, 화재와 같은 재난의 위험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도 일정표를 몇 곳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무실, 숙소, 핸드폰에 일정을 기록해 놓습니다.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도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가 있습니다. 어느 한 부서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장치입니다. 3권의 분립이 잘 이루어져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입법부가 행정부의
뜻을 따르는 거수기로 전락하면, 사법부가 권력의 눈치를 보는 종으로
전락하면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기 마련입니다. 올바른 견제와
균형은 부패와 부정을 막을 수 있는 합리적인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가정도, 이웃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정도, 친구도, 이웃도 갈라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갈라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장애인인 자녀를,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모른 척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욕망과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세례를 받은 신앙
공동체이지만 때로 분열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이
‘새롭게 부임하는 본당에서는 적어도 6개월은 그냥 지켜보아야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6개월만 지켜보면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재물, 명예, 욕심’이 앞서면
가족이라 해도, 친구라 해도, 이웃이라 해도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아무리 성격이 달라도, 오랜
갈등이 있었다 해도, 원한과 미움이 가득했다 해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영신수련을 하면 ‘두개의 깃발’을 묵상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끝은 허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은 낡고
허름해 보이지만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느 깃발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느 깃발아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습관 중에 좋은 것은 계속
이어가고, 나쁜 것들은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평화를 갈망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 12,49-53
평화를 갈망하라.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좌우합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는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5-1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24절 15절에는“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여호24,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이 선택의 삶입니다. 물론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족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갈라진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입장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눈앞에 주어졌지만 선택은
자기 고유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시고자 하지만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으니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제각각 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8,6). 그리고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로마8,8). 그럼에도 누구는 생명을,
누구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지 마!"라는 말이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 '아니오'의 선택은 참으로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2,14). 그러나 그 평화를
얻기까지 일상의 삶 안에서 끊임없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해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필리4,6-7).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콜로3,15).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사랑의 힘
2016년 다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독서: 에페소서 3,14-21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사랑의 힘
아프리카에 호랑이를 기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산에서
주워온 것으로, 새끼일 때부터 집에서 기르다보니 호랑이의 사나운
성질을 찾아볼 수 없고, 마치 고양이처럼 길이 잘 들여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호랑이를 곁에 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자던 중 갑작스런 통증에 잠이 깼는데 눈을 떠보니 호랑이가 자신의
손목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호랑이를 밀치려 했으나,
이미 호랑이는 이전의 호랑이가 아니었습니다. 호랑이는 두 눈에 빨간
불을 켜고 주인을 통째로 삼키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한 손을 호랑이에게 내어준 채로 옆에 있던 총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호랑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결국
호랑이는 죽었습니다.
그는 호랑이가 왜 갑자기 돌변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유를
찾아본 결과 그가 잠든 사이 호랑이는 상처 난 그의 손을 핥다가
흘러나온 피를 맛 보고는 호랑이의 본성을 드러내어 그의 손뿐이
아니라 온몸을 삼키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순간 우리는 얼어있는 것만 같았던 대지 속에서
생명이 여기저기 파릇파릇하게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보이지 않는 저
속에 처음부터 엄청난 생명력이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생명력은 너무도 강력하여 죽어있는 것만 같았던 온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고 꽃으로 장식합니다. 자연은 그 조용히 용솟음치는 내적
에너지를 잡아만 둘 힘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수풀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며
겨울이면 잠시 죽은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여지없이 이전의 모습을
다시 찾습니다. 닭이 독수리가 되겠다고 노력하지도 않고 사과나무가
혹시 자기에게서 배가 열리지 않을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은
그저 강요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신이 받은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본성은 강요해서 드러나는 무엇이 아닙니다. 개는 개의 본성대로
살고 감나무는 감나무의 본성대로 감을 열매로 맺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대로 사는 자연의 힘은 그 얼마나 강력합니다. 세상 어떤 힘도
아침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하느님의 본성대로
살지 못합니다. 혹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더라도 매우
인위적이라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을 우리는
위선이라 부릅니다.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였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나온 행위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무언가를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한 행위이기 때문에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런 척만 한 것입니다. 돌고래를 억지로
춤추게 하고 원숭이를 길들여 억지로 쇼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쇼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짐승 우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반면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그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느님이
자녀이고 그리스도와 한 본성을 소유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오로는
이 구원의 신비를 에페소인들에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인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시게 되면 성령으로 사랑의 에너지를 용솟음치게 하시어
더 이상 미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억지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이고 그 본성이
‘자연적’으로 용솟음쳐 인간의 힘으로는 그 사랑을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의 에너지가
우리 내적 인간 안에서 용솟음칠 때 우리 안에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그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 안에 뿌리내린 그리스도로부터 용솟음치는 사랑의
힘이 충만하기를 빈다고 말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솟아날 수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품게 된다면 얼마나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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