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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0월26일 수요일 [(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수도회] 힘들고 어렵지만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6,1-9
† 복음 루카 13,22-30
◈ 오늘의 묵상
내가 인생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 재산, 성공을 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하면 죄스럽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것들을 세상에 국한된 행복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인류의 정신 역사에 가장 크게 공헌한 점은,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희망이 윤회나 환생처럼 현세적 질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영적 세상에 대한 희망을 약속한
점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관문이고, 죽음 이후의 세상은 하느님을 마주 뵐 수
있고,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완성해 주시는 나라인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결코
죽음 이후에 내세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은, 세상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속된 이들이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 문입니다. 그 문은 순종의
가치를 알고, 진심으로 섬기는 기쁨을 알며, 선하게 살면서 차별 없이
모든 이를 하느님의 눈으로 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열리는
좁은 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첫째가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꼴찌로 여겨지던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눈으로 보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내 마음의 무게들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2016년 다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6,1-9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2-30
얼마 전 아침에 제가 키우는 강아지들과 함께 산책을 하던 중에 갑자기
발바닥에 큰 고통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아픈 다리를
들고 서서 신발을 벗으려고 했지만, 신발 밑창에 박힌 무엇으로 인해
신발을 벗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땅바닥에 앉아서 신발 끈을
푼 뒤에야 겨우 신을 벗을 수가 있었고, 신발 밑창에 박힌 큰 못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망치로 못을 박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신발
밑창에 못이 박힌 것일까요? 제 몸무게가 망치 역할이 된 것입니다.
무거운 제 몸에 의해 눌려서 못이 신발 밑창에 쑥 박힌 것입니다.
못에 의해 상처가 난 발 바닥을 확인하고 있는데, 그 순간 제가 방금
뽑은 못 위를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벌레도 뾰족한 무엇에 상처가 날까?’
누군가 뾰족한 무엇인가로 누르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가볍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가볍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 벌레를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서 더 많이 다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벌레와
같은 가벼움을 내 마음이 가지고 있다면 어떤 뾰족하고 날카로움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도 다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마음의 무게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더해지는
무게, 온갖 걱정과 두려움으로 더해지는 무게, 남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과 미움으로 생기는 무게 등으로 우리 마음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문제에도 쉽게 찔리고 상처가 나서
아픔과 고통을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가벼운 마음이라면 어떨까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기쁘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믿음에 기초해서 하느님과 가까운 자기들은 구원받고, 다른
많은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앉는다는 보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해야지만
가능하다는 뜻으로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당을 열심히 다녔다고 해서,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와 희생을
많이 했다고 해서 구원될까요? 물론 구원의 길에 훨씬 더 쉽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무게가 이 세상 것들로 무겁다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무게들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욕심, 이기심, 부정적 판단과
미움, 불신으로 인한 걱정과 두려움 등의 무게들을 가볍게 할 때,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동이 삶이 힘을 주고, 절제가 삶에 매력을 준다(장 폴 리히터).
이스라엘 예수님 탄생성당으로 들어가는 문.
너무 낮고 좁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커피를 쏟을 때(‘좋은 생각’ 중에서)
한 정신과 전문의가 고민에 빠졌다. 환자들이 마음 속 고민을 쉽사리
털어놓지 않아 치료가 어려운 것이다. 그는 환자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실력이 좋은 의사인지 알렸다. 병원에 졸업장, 상패 등을 놓고 화려한
경력을 드러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나이 지긋한 교수를 찾아갔다. 많은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로 유명한 이였다. 그는 긴장했다. ‘미숙하다고 화내면
어쩌지?’ 하지만 걱정과 달리 교수는 그를 따뜻이 맞이했다. 어렵게
입을 떼려는 순간, 교수가 실수로 커피를 쏟았다.
“어이쿠, 미안하네. 아내가 있었다면 꾸지람을 들었을 텐데 다행이군.
하하.”
교수가 웃자 그의 마음도 함께 가벼워져 고민을 편히 얘기했다. 교수가
말했다.
“멋진 학위만으론 마음을 열 수 없어. 환자들은 누구에게도 터놓기
어려운 약점을 들고 온다네. 방금 내 실수를 보고 자네도 미소 짓지
않았나? 자네의 빈틈을 보여 주면 상대의 마음 문도 쉽게 열린다네.”
나의 빈틈을 숨기기에 급급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 빈틈이 다른
이와의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빈틈을 숨기는
위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벼운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을을 느끼게 해주는 가로수길.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힘들고 어렵지만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힘들고 어렵지만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수난의 여정에서 구원의 길을
가르치십니다(13,22). 그분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13,23) 하고 묻는 사람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13,23-24) 하고 답변하십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13,26)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이는 쉽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고, 돈과 권력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사고가 팽배해가는 이 시대에 엄청난 도전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과 일치하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랑 가득한 존재가
되어 언행을 통해 하느님을 반향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무엇보다도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확실한
통행증은 사랑이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 평화와
무사안일한 마음, 이기심을 지닌 상태로는 통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좁은 문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며,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서로 기쁘게 섬김으로써’(에페 6,6-7)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좁지만 혼자서는 통과할 수 없는 역설적인 문이지요.
길거리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핍박받고 고통 받는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끊임없이 버림으로써 통과하는
문입니다. 또한 이 문은 예수님처럼 한없이 낮추는 겸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억지로 자기 자신을 낮추거나 높이려
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태도이지요.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님을 잘 알기에(권고 19), 윗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아랫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똑같이 겸손하며(권고 24),
다른 이의 충고와 꾸지람을 인내하며(권고 22) 감사히 받아들이고
그들 앞에서 자기 약점을 인정할 줄 압니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은 남이 싫어하는 궂은일을 나서서 하고,
고통과 시련에 직면하며,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택하는 ‘거꾸로’의
삶을 통해 통과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구원의 문은 세례
축성이나 수도축성을 받았다는 것, 또는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 성경과 교리 지식이 뛰어나다는 것만으로 열리는 문이 결코
아니겠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선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망각한다면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겠지요. 오늘도 나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문이 영원히 닫혀 버리기
전에 온힘을 모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 (에페 6,7)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언제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늘 동등한 수평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수평관계에 필요한 덕목이 사랑이라면
수직관계에 필요한 덕목은 순종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순종이 함께 해야만
우리는 관계 안에서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요즘 사도 바오로는 계속해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배워라!" 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서로 사랑과 순종 안에서 거룩함을 공유하듯이
남편과 아내도 사랑과 순종 안에서 성가정이 될 수 있답니다.
인간적으로만 바라보면 약점 많고 죄 많은 교회이고 남편과 아내이고
직장 상사이지만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김으로써
거룩해 지듯이 그렇게 주님을 섬기듯이 기쁘게
사랑하고 순종한다면 성가정이 되고
멋진 직장과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하시네요.
비록 쉽지만은 않아 보이지만 오늘 한번 그렇게 시도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만나는 사람을 주님이라 생각하며 기쁘게 섬겨 보자구요.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 눈으로 주님을 만나뵙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방법밖에 없답니다.
오늘 이웃들 안에서 예수님 잘 만나시고 행복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
좁은 문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좁은 문에서 매순간마다 도와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좁은 문으로 이끕니다.
예수님을 아직도 알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넓은 문만을 고집합니다.
좁은 문은 겸손의 문입니다.
좁은 문의 교훈을 잊지 않을 때 우리또한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길은 내가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란 좁은 문을 통해 늘 새로워지는
삶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좁은 문이란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가장 큰 깨달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 쓸 때 알게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 13,22-30
지난 주일에는 본당에 강의를 갔습니다. 본당에서는 첫 영성체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교리를 배웠고, 처음으로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셨을 것입니다. 본당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다과를 준비했고,
부모님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보면서
제가 어릴 때 다니던 성당이 떠올랐습니다. 1968년도에 할아버님의
장례미사가 있었고, 1970년에는 작은 아버님의 혼배미사, 86년도에는
형님의 혼배미사, 91년도에는 제가 사제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했던 성당입니다. 집안의 큰일들은 모두 성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73년에 첫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기도문을 외우면서 수녀님께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도문을 다 외워야 첫 영성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 첫 영성체를 하는 아이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이야길 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적은
기도문을 가져오곤 했습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기도문이었습니다.
예전에 맹인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어린
시절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에게는 좁은
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아주 쉬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우리 조상들이 보여주었던 삶이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삼강오륜의 삶입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는데, 각각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충과 효를 강조했으며,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
(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는 희생과 나눔입니다.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은 편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사람,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에게 하늘나라는 결코 좁은 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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