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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21일 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수도회] 말씀의 실행을 통한 봉헌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즈카 2,14-17
† 복음 마태 12,46-50
◈ 오늘의 묵상
성모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S. Maria Nuova)의 봉헌일(543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날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함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순간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셨던 성모님께서, 어린 시절에도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또한 이 축일은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도 매우 뜻깊은
축제입니다.
성모님의 어린 시절과 오늘 기념하는 봉헌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많은 전승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부모님이 이미 봉헌한 약속에 따라, 세 살 때에
다른 소녀들과 함께 손에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마리아는 아직 어렸지만, 성전의
열다섯 층계를 올라갔고, 다른 소녀들과 함께 앉지 않고, 대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 자리하는 지성소에 앉았다고 교회의 전승은 알려 줍니다.
마리아의 봉헌은 실제로는 훨씬 더 겸손하면서도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친 이 봉헌을 통하여, 마리아는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특히 마음을,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려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새겼을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봉헌되는 순간부터 최선을 다해 사셨던 성모님
2016년 다해 11월2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4-17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자동차 바퀴의 바깥 둘레에 끼워져 있는 고무를 ‘타이어(Tire)’라고
합니다. 원래 이 타이어의 정식 명칭은 러버 힐(Rubber Wheel)로,
고무바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타이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자동차 부품 중에서 가장 피곤한(Tired) 곳이
타이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이어의 움직임이 가장 많기 때문에
보통 5만 Km 주행 후나 제조 후 4년 정도가 되면 타이어를 교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비사들은 이 타이어의 마모 상태를 보면 운전자가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운전하는 차의 타이어는 아주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나 안전운전과 모범운전을 하는 사람들의 타이어는
일정하고 깨끗하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듣다가 문득 내 삶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못된 운전으로 인해 형편없는 타이어의 상태를 만드는
것처럼, 잘못된 삶으로 이끌어서 내 몸의 상태를 형편없이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잘못된 운전이 타이어에 흔적이 모두 남는
것처럼, 우리 삶을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내 영혼에 그 흔적이 모두
남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죄로 물들수록 영혼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어린
시절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억하는 날인 것이지요.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 성인은 성모님을
세 살 때에 성전에 봉헌했다고 하지요. 그때부터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봉헌된 몸으로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는 모습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영혼을 누구보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부정하는 듯
이야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가리키면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신 것이지요. 정말로 어머니를 몰라보시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충실했고 또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모습처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라는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봉헌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셨던
성모님 기념일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을 통해 내 영혼에 나쁜
흔적이 아니라, 아름다운 흔적들이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 앞에는 많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무조건, 그냥, 무슨 일이
있어도(이창현).
성전에 봉헌되시는 어린 성모님.
자식 모르게 사는 보청기(‘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인터넷에 떠 있는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한 늙은 노인이 몇 년 동안 귀가 잘 안 들려서 고생을 하다가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노인에게 귓속에 쏙 들어가는 보청기를 주며, 사용해
보고 한달 후에 다시 찾아오시라고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노인이 의사를 찾아왔다.
“어떠세요?”
“아주 잘 들립니다.”
“축하합니다, 가족 분들도 좋아하시죠?”
“우리 자식들에겐 이야기 안 했지요.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며 그냥
대화 내용이 저절로 들렸소. 그래서 그동안 유언장을 세 번이나
고쳤다오.”
우리는 누군가가 듣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면 때로는 부정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소위 ‘뒷담화’라는 것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런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모두 세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남에 대한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 사랑이 가득한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니까요.
어린 성모님과 그의 어머니 성녀 안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말씀의 실행을 통한 봉헌의 삶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2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일
마태 12,46-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말씀의 실행을 통한 봉헌의 삶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세
살 때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셨다고 전해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내놓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데 몰두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성모님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먼저 성모님의 자헌(自獻)은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
뜻이나 자기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느님을
뜻을 따라 봉헌된 것입니다. 계산된 기부나 봉헌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내놓은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다음으로 성모께서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자발적으로'
봉헌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분은 말과 행동으로 전 생애 동안
하느님 뜻에 스스로 순명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나 관계에 매여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내놓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지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자발적인 봉헌은 참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그 말씀의
힘으로 일생 동안 충만한 봉헌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말씀이 되어
오신 구세주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집트 피난의 고통을
받아들이셨으며, 나자렛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로 아드님을 돌보셨으며,
아드님의 갈릴래아 여정에 늘 말없이 동반하셨고 죽음에 이르는 수난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실행하는 삶의 봉헌을 통하여 살아있는 말씀이
되시고, 예수님의 참 어머니가 되셨으며(마태 12,50)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경청하고 그에 순응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전 여정에 늘 함께하며 모든 것을 견디고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기꺼이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놓음으로써 기쁨과
평화 가운데 머물러야겠습니다. 자신의 삶을 내놓고, 시간을 내놓고,
마음을 내놓는 것이 생명의 이치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가르쳐주는 사랑과 생명의 진리임을 상기해야겠지요. 이해타산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꺼이 봉헌할 때 주님께서는 그 봉헌의
정점에서 우리를 축성해주실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봉헌 없는 축성, 희생 없는 봉헌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순수하고 온전한 봉헌을 하도록
힘써야겠지요. 뿐만 아니라 봉헌은 정의 실천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인식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바치고 나누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결정체이자 정의의 실현이며 아름다운 기도인
내어놓음의 발걸음을 이어가야겠습니다. 나의 삶과 시간과 만남을
하느님께 기꺼이 되돌림으로써 말씀을 실행하는 축성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2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9-50)
우리는 여왕이나 왕후를 가리켜 국모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성모라고 부릅니다.
어찌 여왕이나 왕후가 백성들을 낳지도 않았는데 국모라 불립니까?
그것은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받들고
섬길 때만 붙여질 수 있는 타이틀입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로
불린다는 것은 감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늘 마음 속으로 곰곰이
되새기며 묵묵히 실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아들딸을 하느님이 보내주신 귀한 선물로 받아들이며
그를 하느님 뜻대로 키우는 한 나는 그 아이의 진짜 엄마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를 내 부속물로 여기며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계모가 되고 맙니다.
나 또한 가난한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듣고 그들을 섬긴다면 나도 여왕이고 왕후가 됩니다.
나 또한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행에 옮기는 한
나도 예수의 어머니가 되고 그분의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이 혼란의 시대는 모두가 제 뜻만 추구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조차 않는
가짜 어머니, 가짜 성도, 가짜 지도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진짜 어머니인가요?
나는 진짜 신자인가요?
나는 진짜 성직자인가요?
나는 진짜 수도자인가요?
나는 진짜... 대통령인가요?
우리 각자가 진솔하게 고백해야 하는 오늘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나자렛의 마리아
2016년 다해 11월2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나자렛의 마리아
한 수도회의 종신서원식에 참석했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보통의 수도자들은 종신서원식 때 교회와 웃어른 앞에서 청빈, 순명,
정결 세 가지를 서원합니다. 그런데 그 수도회에서는 두 가지를
덧붙이더군요. 세상 사람들에게 수도자로서 신분을 알리지 않겠다는
서원, 그리고 그 어떤 명예직이나 고위직도 맡지 않겠다는 서원
말입니다.
그들의 특별한 서원을 바라보던 저는 무릎을 ‘탁’ 칠 정도의 깨달음 한
가지가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서원은 바로 ‘나자렛의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묵묵히 공생활을 준비하신 예수님의
영성, 예수님 못지않게 더 깊은 침묵과 희생 속에 구세사에 기여한
마리아의 영성 말입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자렛에서 삶이었지만 하느님을 향한 굳센
믿음과 샘솟는 기쁨을 간직한 채 꿋꿋이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나자렛의 마리아를 기억해봅니다. 그녀의 삶은 마치도 깊은 산속에
홀로 피어난 ‘숨은 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바라봐주던 그렇지
않던 환한 얼굴로 그리고 묵묵히 제 자리에 서 있던 작은 풀꽃 같은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나자렛 영성은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일원이
되어 생활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하느님께서 때로
구차스럽고 때로 죄 투성이인 우리 인생에 매일 동행하심을 확신하는
영성입니다. 나자렛 영성은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사건들과 매일일
일상적으로 맺고 있는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영성입니다. 나자렛 영성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삶이 내게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개의치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영성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나자렛 영성의 원조이자 여왕은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평생토록 나자렛에 몸담고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나자렛은
심심하기 그지없는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정치·경제·문화의 일 번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제 같은 오늘이 매일
반복되는 그저 그런 동네였습니다. 몇 달이 지나가도 신나는 일도
특별한 구경거리도 없었습니다. 대단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세상, 그렇지만 삼시새끼 먹고 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이 작은
몸짓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상을 반복하는 각자 삶의 자리와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그곳, 대단한 변화나 특별한 광경이 없는 바로
그곳 나자렛에 하느님께서 숨어계셨습니다. 오늘도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첫째가는 협조자이신 마리아께서 우리들의 지루하고 고달픈
나자렛에 함께 살아가십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께서는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영성으로 변화시킬 줄 아셨습니다.
때로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일들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줄 아셨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매일 삼시새끼 성가정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매일 쌓이는 빨래
감을 머리에 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 공동 우물로 향했습니다.
매일의 가난과 노동, 은둔과 침묵, 인간적 상처와 갈등들도 하느님과
연결시킬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각별히 칭찬할 신앙인들이 지닌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다는 것입니다. 삶이 내게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상관없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몸이 성하거나 병들거나, 순탄한 오솔길을 걷거나 폭풍속의 험한 길을
걷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자렛의
마리아가 걸었던 길처럼 말입니다. 참된 신앙, 참된 영성은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매일 걸어야할 삶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가 서있는 일상의 자리가 또 하나의 나자렛이자 주님이
현존하시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이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벌어지는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겪는 매일의 고통과 상처 그 틈 안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 펼쳐지는 매일 삶은 하느님의
신비와 은총으로 가득 찬 기적의 현장입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2016년 다해 11월2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지난 토요일에 대모산을 다녀왔습니다. 36년 만에 처음 만난 본당
후배도 있었습니다. 산행을 하면서 우리는 금세 학창시절로 돌아갔고,
지난 일들을 추억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했어도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깜빡 졸아서 종로 3가에서 내렸고, 길을
가다보니 광화문이었습니다. 길에는 양초를 파는 사람, 방석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유인물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당에서
동원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학생들, 어린아이들, 가족들, 연인들도 자리를 잡고 함께 했습니다.
부정과 불의를 몰아내려는 의지를 느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열망을 느꼈습니다. 시민들의 모임이 하나의 축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몰아내고, 쫓아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
모든 이들이 자유와 평등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권력의 힘에
눌려서 제대로 된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진실을 외면하던 언론은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던 수사기관은 양심과 정의에 따라서 공정한 수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세대, 이념, 종교라는 벽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입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이고, 누이이고, 어머니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는 것입니다. 읽으면 성모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그분은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그분은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네.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돌보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그분의 자비 영원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예수님의 가족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2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예수님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셨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시고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 믿음에
흔들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서 행복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지킨 분으로 참 가족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잘 실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생활을 하셨으며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제자들과
더불어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행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누가 그분의 모범과 표양에
앞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영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4,24).
영적인 사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순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형님과 누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
가족이기도 하지만 믿음에 따르는 행실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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