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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가해 12월22일 목요일 [(자)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수도회] 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회상과 감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사무 1,24-28
† 복음 루카 1,46-56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로서 우리가 자주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 노래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머무르고 싶은 점은,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라고 마리아가 고백한
대목입니다. 이는 주님께 나아가려면 철저한 겸손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전능을 드러내심으로써 교만한 자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겸손한 자세를 지닐 때만
주님을 알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어떠한 계급이나 특권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힘없고 무시받는 이들을 높이시고, 세상의 권력가들을 끌어내리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평등하다는 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변의 그 어떠한 착취와 탐욕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배고픈 이들과는 먹을 것을,
사랑이 필요한 이들과는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불의와 부패를
물리쳐야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노래’는 매우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우리 의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새로운 선언이 들어 있습니다. 교만함과 특권 의식을
포기하고 나눔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새로이 태어나는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지금 행복하십니까?
2016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24-28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6-56
성인 천 명을 세 그룹으로 나눠서 각각 다른 내용의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자신의 기분을 숫자 1~6으로
객관화시켜서 간단하게 표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그룹은 짜증났던
일을 자세히 쓰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하루 중에서
좋았던 일을 자세히 적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관찰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특별히 어떤 그룹이 행복감이 크게 증가했을까요?
좋은 기억을 쓴 사람들의 행복감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하루는 하루 24시간, 아니 어쩌면 내 삶 전체가 행복으로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얻으려고 하고, 또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노력을 평생
기울인다고 해도 과연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사실 행복만이 있는 삶은 절대로 있지 않으며, 또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앞선 실험에서 보듯이 자신의 삶을 별 것 아닌 것처럼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복해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또한 짜증나는 나쁜
기억을 기억하는 것 역시 행복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딱
하나의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요? 사실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자신에게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기는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건네는 기분 좋은 인사말,
산책을 하기에 좋은 날씨, 뒤뚱거리면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웃는
어린아이의 모습 등을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작은 것을 통해서도 좋은 기억을 충분히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이 잘 아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어떻습니까? 구구절절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십니다. 사실 이런 이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모든 세대가
성모님을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단순히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깨닫기 때문에 행복하신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혹시 행복할 수 없는 이유만을 들면서 내게
찾아온 행복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진 것을 알면 버릴 것이 보인다(줄리 모건스턴).
이스라엘 에인카렘에 있는 '마리아의 노래'.
값진 금메달(‘좋은생각’ 중에서)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던 에밀 자토페크는 뛰어난 장거리
선수가 되었다. 그는 수차례 올림픽에 출전하며 론 클라크와 인맥을
쌓았다. 공통점이 있던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다.
클라크보다 나이가 많은 자토페크는 명성도 그를 앞질렀다. 올림픽에
두 번 출전해 금메달 네 개, 은메달 한 개의 기록을 세웠다. 반면
클라크는 메달 운이 없었다. 세계 기록을 달성하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좀처럼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클라크는 이 사실을
아쉬워했다.
둘은 올림픽에서 맞붙었다. 쫓고 쫓기는 경기를 펼쳤으나 역시 승리는
자토페크의 몫이었다.
경기를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자토페크는 클라크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꼭 비행기를 탄 뒤에 풀어 보게.”
비행기에서 상자를 열어 본 클라크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금메달이 있었다.
“클라크, 수년간 함께 뛰어 줘서 감사할 따름이네. 그거 아는가?
자네의 칠전팔기 정신이 나를 얼마나 자극했는지. 덕분에 늘 자만심을
경계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네. 이 공적은 자네의 땀이기도 해. 내
명예는 자네의 명예기도 하고, 이 메달은 당연히 자네가 가져야 하네.
내 진심을 받아 주겠나?”
경쟁자에게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정말로 생각하면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발전할 수 있지요. 그런 차원에서 세상에 경쟁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나를 발전시켜주는 ‘협조자’가 아닐까요?
체코의 에밀 자토페크.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회상과 감사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루카 1,46-56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루카 1,49)
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회상과 감사
하느님께서는 아이가 없는 한나의 가련한 처지를 굽어보시어 아이를
잉태하게 하십니다(1사무 1,1-20). 그녀는 주님께 약속드린 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자 예물을 가지고 주님의 집으로 가서 아이를
하느님께 바고 예배를 드립니다(1,24-28). 자비에 합당한 응답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봉헌입니다. 한나는 마리아에 앞서 감사의
찬가를 노래한 것입니다(2,1-10).
루카 복음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마리아의 노래는 시편에서 영감을
받은 찬가로서, 이스라엘의 ‘가난한 이들’의 노래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다림이 성취된 데에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이 ‘성모 찬가’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에 감사드린 아름다운 기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한나가 하느님의 자비로 아이를 잉태하고 감사드리며 아이를
봉헌하였듯이, 마리아가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이를 돌보시어 높여주심으로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 그 체험을 다시 현재화시키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와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역사와 우리 각자의 삶에서 당신의 주도권을 펼치시고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진리를 망각하곤 합니다. 삶이 자신의 힘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 같으나 실은 그렇게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한나와 마리아가 주님께 감사의 찬가를 부른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지요. 한나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굽어보시어 청을 들어주셨기에 감사드리며 아이를 봉헌한 것입니다.
마리아 또한 하느님께서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해주셨음에 감사의 찬가를 부른 것이지요(루카 1,48-49).
오시는 주님을 사랑으로 기다리면서, 마음을 열고 눈을 떠,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 받는 삶 저 깊숙한 곳에서 흐르고 있는 하느님의
의지와 자비를 알아차리도록 해야겠습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께서
자신을 높여 주셔서가 아니라 자신을 굽어보신 그 자비에 감사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교만하고
부요한 억압자들을 끌어내리신 근원적이고 가장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자비하심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은 바로 이 자비를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고 세속의 질서를 역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비의 오심인 메시아의 탄생 앞에서 그분의 자비를
회상하고 나눌 수 있어야겠지요.
우리 모두 요란하고 호화스런 길거리 풍경에서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
사랑의 극치이신 분이 내 삶의 역사에 사랑으로 개입하시기 위해
오심을 떠올리며, 온 존재를 그분께 기꺼이 봉헌해드리고, 몸과
마음으로 감사의 찬가를 부르는 오늘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울러
자비의 사람이 됨으로써 몰상식과 무자비, 거짓과 불의가 사라지는
세상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많이도 필요 없이 단 한 사람
2016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많이도 필요 없이 단 한 사람
신앙이라고 해서 모두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천차만별이더군요.
깊은 신앙이 있는가 하면 얕은 신앙이 있습니다. 초보신앙이 있는가
하면 원숙한 신앙이 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있는가 하면 뜨거운
신앙이 있습니다. 값진 신앙이 있는가 하면 값싼 신앙이 있습니다.
신비로운 현상과 황홀한 체험, 지속적인 성공과 축복만을 추구하지
고통과 십자가는 거절하는 싸구려 신앙도 있습니다. 결국 신앙에도
성장이 필요하고 성찰과 쇄신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어릴 때 키가 무럭무럭 자라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먹어댔습니다. 친구와 둘이서 앉은 자리에서
귤 한 박스를 바닥내기도 했습니다. 자장면 곱빼기를 시켜먹고
나왔는데도 속이 헛헛해 다른 중국집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죽기
살기로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습니다. 자고 나면
키가 크던 시절이었습니다.
마구마구 키가 자라던 어느 순간, 원인도 모르게 여기 저기 뼈마디가
아프곤 했었는데...어르신들은 단박에 알아차리고 이렇게들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별 것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키 크느라
아픈 거다, 성장통이란다.”
키가 자랄 때 성장통을 겪듯이 신앙이 자랄 때도 당연히 성장통을
겪습니다. 그리도 열렬하던 신앙이었는데 어느 순간 무덤덤해지고
냉랭해집니다. 갑자기 별 의미를 못 찾겠고 무미건조해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느님 부재체험을 시작합니다. 어찌 보면 신앙의
성장통을 겪는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이런 순간 꼭 겹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이요 사람입니다. 꼭 이럴 때 악연을 만납니다. 꼭 이럴 때
이해하지 못할 억울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즉시 드는
생각이 이런 것입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시련이?’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럴 수 가 있는가?’
이럴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더 규칙적인 기도생활입니다. 더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입니다. 더욱 정신 집중해서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입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나를 열렬히 응원해 주는 동료
인간입니다.
다행히도 나자렛의 마리아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몇 명 있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겪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삶은 우리를 마냥 죽어라죽어라 코너로 몰아가지만은
않습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답답한 마리아의 길이었지만 따뜻한
동반자들이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안심이 되는 튼튼한 성채 같은
요셉 성인이 계셨습니다. 마리아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해준 사촌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이자 스승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이런 듬직한 동반자들의 호의와 배려에 힘입어 단기간에 놀랄 정도로
신앙의 성장을 이뤄낸 마리아는 강한 확신을 갖고 그 유명한 성모
찬가를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복음 1장 46~49절)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된 여가수의 어린 시절,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소녀는
산동네에서 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지만 할머니는 현명했고 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항상 손녀를 열심히 응원해주었습니다. 틈만
나면 하셨던 말씀이 “너는 내게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란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항상 너를 응원한다!”였습니다.
할머니는 소녀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누군가가 버리고
간 낡은 피아노를 정성껏 닦고 조율해서 선물로 주었습니다. 아무리
서투르다 해도 소녀의 연주가 끝나면 언제나 열렬한 할머니의 박수가
뒤따랐습니다.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정성에 힘입어 소녀의
연주솜씨는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그녀를 재능을 눈여겨 본 한
음악가의 도움으로 마침내 소녀는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비상하게
되었습니다.
성공한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언제나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제 성공은 전적으로 할머니 덕분입니다. 많이도 필요 없이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되요. 나를 이해해주고 믿어주는 단 한 사람, 나를
전적으로 응원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되요. 바로 그 한 사람을
얻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요?”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대림 제4주간 목요일
2016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예전에 있었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 무렵에는 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이 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말을 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
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지더라고요.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주님의 성탄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면, 판공성사도 준비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김치를
나누고, 구유를 만들고, 성당을 장식하고, 봉사자들에게 선물을
준비하고, 레지오 마리에는 연차 총친목회를 하고, 전례연습을 하고,
음식 장만을 하고, 아이들은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성가대는 연습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흥겨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교구에 있으니,
성탄이 가까이와도 마음도 바쁘지 않고, 덤덤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성모님의 마음은 저의 무딘 마음을 깨우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기억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왜 우리는 신앙인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2016년 성탄을 기다리면서 성모님은
마리아의 노래를 준비하였듯이, 우리들 각자의 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마리아의 노래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되었고
엘리사벳의 칭송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어 전능하신 분을
찬양합니다. 이 마리아의 노래를 ‘마니피캇’ (magnificat) 이라고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1,46). 하고 시작합니다. 은총에 대한 감사가 무엇보다도 앞서고
있습니다. 비천한 여종이 목숨 걸고 순명했을 때 세상은 그를 복된
여인이라고,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이야기하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시편9,2-3).
사무엘 상권2장1절을 보면 한나가 기도합니다.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제 이마가 주님 안에서 높이 들립니다. 제 입이
원수들을 비웃으니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고(루카2,20), 치유 받은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있던 요를 걷어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루카5,25). 사도들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께 경배하며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루카24,51-53).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이들은 무엇보다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엘리사벳도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 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주님께서 그 부끄러움을 벗겨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여인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그리고 마리아는 겸손 되이 말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9).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1,50). 하며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분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통치자를 끌어
내리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십니다. 그리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십니다. 또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1,55). 하늘의
법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나에게도 그분의 자비가 여전히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게 찬양 제물을 바치고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네 서원을
채워 드려라”(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입니다.)
(시편50,14).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3,17). 마리아의 겸손과 감사를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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