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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가해 12월23일 금요일 [(자) 대림 제4주간 금요일]
[수도회]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정화와 화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말라 3,1-4.23-24
† 복음 루카 1,57-66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습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원래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었는데, 나이마저
많았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즈카르야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반신반의하자,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1,5-20 참조).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지요.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려 말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을 대하며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 있는
자 중심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욱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이 있어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기에 경쟁과 질시,
불화와 다툼이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세계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세계는 다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과
같이 아기를 잉태할 능력이 없는 여인을 택해 생명을 만드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생각하며,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게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의 일을 알아 볼 수 있는 노력을
2016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3-24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화가 윌리엄 테너는 폭풍에 휩싸인 바다를 실감나게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기자가 어떻게 이렇게 실감나게 폭풍에
휩싸인 바다를 그릴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폭풍우가 몰려오면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어부에게 갑판 기둥에
나를 묶어 달라했죠. 전 거센 폭풍우를 몸소 느꼈고, 마침내 폭풍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해야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본인이 실감하지 못하는 것을 실감 있게 그린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윌리엄 테너는 생각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진실을
담기 위해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폭풍에 휩싸인 바다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체험하지도 않고도 ‘그럴 것이다’ 또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라는 가정에서 나오는 확신으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아무리
예측 가능한 일들도 뜻밖의 일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도 뜻밖의 일로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히 하느님의 일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상상을 항상
뛰어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기에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을까요?
이에 대답을 많은 성인 성녀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노력했고 또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있었고, 이로써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그의 할례식에 대해 오늘 복음을 통해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느님의 일을 의심했습니다. 나이
많은 상태에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세속적인 생각이 하느님의
일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세례자 요한을 낳을
때까지도 말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할례식 때에 갖는 아기의
명명식에서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결정을 짓는 순간에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침묵의 순간에서 즈카르야는 열 달 동안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을 수 있었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동참할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 볼 수 있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 행복한 것은 하루하루가 예측 불가능하며 누굴 만날지 어딜 갈지도
모른다는 거죠(영화 ‘타이타닉’ 중에서).
대림초의 모든 불이 켜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저는 커피를 참 많이 마십니다. 그런데 어떤 커피가 가장 맛있을까요?
각자에게 맛있는 커피가 있습니다. 쓴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단맛이나
부드러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맞는 커피를
즐겨서 마시지요. 그렇다면 오랫동안 커피를 마셨고, 또 많이 마시는
저의 경우는 어떤 커피를 좋아할까요?
여러 종류의 커피가 있겠지만, 가장 맛있는 커피는 좋은 사람과
마시는 커피인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과 마시는 커피는 아무리 나쁜
질의 커피라 하더라도 너무나도 맛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마시는 커피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마시는 커피는 세상의 어떤 차보다도 맛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요? 그런데 항상 좋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둔다면 어떨까요? 힘들겠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성탄 초를 직접 만들어서 봉헌해 주셨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정화와 화해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루카 1,57-66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루카 1,57)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정화와 화해
말라기 예언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제 2성전 시기(바빌론 유배
후 서기 70년경까지)에 활동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지원으로 지어진 제 2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았지요. 그러나 민족적, 종교적 생활의 중심인 성전은 유일신사상,
선민사상,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요(신명 7,7-11) 자기 인식의
중심인 율법 등과 더불어 이 시기의 유다이즘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빌론강 기슭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울던”(시편 137,1)
이스라엘은 이제야 새로운 성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지요. 삶의 자리를 되찾고 신앙의 샘물을 마음껏
퍼마실 수 있는 생명과 희망의 장이 열린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오히려 부정을 저질러
예배가 쇠퇴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부정부패를 꾸짖으시며
(말라 3,2-3),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를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 지극한 배려입니다. 주님의 사자는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할 것입니다(3,4).
이렇게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오는 엘리야 예언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주님의 사자에게 주어진 소명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주님을 맞이할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에
동참해야겠습니다.
먼저 말라키 예언자가 알려주듯이 나의 영혼을 깨끗하고 의로운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3,2-3). 제 2성전기에 그 쓰라렸던
유배의 아픔을 잊고 현실에 안주하고 물질적 탐욕과 부정에 빠져버린
사제들과 같은 삶을 결연히 거부해야겠지요. 맑은 영혼만이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알아볼 수 있고, 애착의 뿌리를 끊어버린
사람만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심부름꾼이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게 하듯이(3,24) 우리 또한 서로
화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정화와
화해는, 길들여져 익숙한 습관과 전통의 틀을 벗어버릴 때
가능해지겠지요.
오늘 복음의 요한의 탄생에서 보듯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오시고
탄생하시는 것은 우리의 계획과 뜻을 뛰어넘습니다. 그 주도권이
철저히 주님께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제 2성전기의 이스라엘
사제들처럼 전통과 묵은 관습을 붙들고 있는 한 주님의 오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진정으로 주님께서 태어나실 수 있도록 잠시 멈추어 나의
신념과 이상, 생각, 인생관과 세상관, 습관, 당연한 듯 따르는 규범과
상식 등을 새롭게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늘 그렇듯이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순간에 문득 ‘놀라운 선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 안의 쓸데없는 생각과 편견들, 케케묵은 습관의
편린들과 애착의 그림자를 태워주시어, 좋으신 당신을 바로 알아보고
맞아들일 수 있도록 정화시켜주소서! 또한 오직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게 하소서! 아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서울] 대림 제4주간 금요일
2016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 1,57-66
요즘 ‘화성의 인류학자’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신경외과 의사가
자신이 만난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사고와
질병으로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은
색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어떤 분은 기억 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자신만의 세상을 새로이 만들어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몸’을 얻는 것은 아닐까! 몸을 얻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보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있기 때문에 영혼이 가지는 자유와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또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늙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축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을 얻으시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오시지만 영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이야기 하십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옳은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를 하면서 다가온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속해있지만 이미 영혼의 자유와 순수함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몸의 틀을 벗어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은 아들의 이름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름의 뜻대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름을 정하고,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식물들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의미를 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름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이름입니다. 저는 두 개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름들을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이름은 ‘재형’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균형을
이룬다는 뜻이고,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중용’을 지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름의 의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또한 제게는 소중한
이름입니다. 사제의 길을 가는 제게는 가장 적합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이름의 의미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세례명이 가지는 뜻을 생각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아기의 이름은 요한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 1,57-66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주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가해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복음 : 루카 1,57-66 :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교회는 성탄 바로 전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배치하여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제시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고리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정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이사 40,3)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권능의 하느님을 낳았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을 낳았다.
엘리사벳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을 화해시키는 사람을 낳았고,
마리아는 더러운 땅을 정화시키는 분을 낳았다. 늙은 여인은 선조
야곱의 집안에 등불을 밝혔고, 요한이 바로 그 등불이다(요한 5,35).
젊은 여인 동정녀 마리아는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을 낳았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고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마르 14,38)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더구나 하느님의 운동선수인 우리는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혜를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또한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 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를 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주임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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