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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1월10일 화요일 [(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수도회] 행동으로 말씀을 설명하는 참 권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히브 2,5-12
† 복음 마르 1,21ㄴ-28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주시면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그 말씀은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시며 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만물이 그분의 말씀 앞에
무릎 꿇고 진리임을 고백하기에 권위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불투명하고 불안하기에 누구의 권위를 빌려 살고자
합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와는 반대로, 거짓 영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영의 지시에
따라 살아갑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잡다한 영들에게 의지하고
예속되어 더욱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미움과 시기, 질투와 방탕,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더러운 영들의 은신처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 영혼은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키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잠시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더라도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악의 세력은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대며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시는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미사 참례와 성체
조배, 고해성사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
2017년 가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5-12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어떤 분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했는데 상대방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는데 전혀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것이었지요.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요? 대범하지 못해서 그럴까요?
이 사람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대범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과를 하는데도 진정성이 있는 깊은 반성이 필요한 것처럼,
용서하는 것 역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진정성 있는 용서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사과를 했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괜찮아.
전처럼 편하게 지내자.”라고 즉시 사과를 받아준다면 문제가 더 클
수가 있습니다. 진정성 있는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과를 했는데 어떻게 안 받아줄 수 있어?’라면서
상대방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진정성이 있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상대방이 느낄 수 있을
때,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성이 있는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입 밖으로 내뱉은 말과 눈에
보이는 행동만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착각 속에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만이 진정한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해당합니다. 그 시작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 고백이 틀린 말일까요? 전혀 틀리지 않았고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듣기 싫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틀린 말이 분명히 아닌데 왜 조용히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에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의미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마태 16,17)이라고 칭찬의
말씀을 하시지요. 왜 똑같은 말인데 누구에게는 칭찬을, 누구에게는
호통을 치실까요?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는 과연 사랑이 담겨 있는지 혹시 그저 입으로만 내뱉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은 말은 아닌지를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라고 혼내시는 것은 아닐까요?
지구상의 모든 음악 중 하늘 저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음악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의 고동 소리다(헨리 워드 비처).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
사랑이란?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려졌습니다. 젊은 남성이 한
여성에게 결혼해달라는 구애였지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는 결혼 후에 아내를 끊임없이
의심을 합니다.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의심,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있다는 의심 등등…….
이 남자는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까요?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랑이란 죽음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생명과 연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구속하고
통제하려는 욕심과 이기심만이 보일 뿐입니다.
사랑이란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하는 것이며
그래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헛된 삶은
혼자서만 말하고 자기 의심에 사로잡히는 삶입니다.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서 이상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일까요?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행동으로 말씀을 설명하는 참 권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 1,21ㄴ-28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 1,22)
행동으로 말씀을 설명하는 참 권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신앙고백, 기도, 모세오경과
예언서 봉독, 설교 순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하십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자 사람들은
몹시 놀랍니다(1,21-22). 율법과 전승을 해설하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1,22).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더러운 영’의 축출로써 공개적으로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더러운
영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1,24)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1,25-26).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1,27)에 모두 놀랍니다. 어떻게 하면 더러운 영을
몰아내신 예수님의 권위를 지닐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권위를 지니려면 먼저 권위의 뿌리인 하느님과 일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세상 재물이나 권력, 전통과 이기적인
인간관계에 뿌리를 둔 권위는 매우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힘을 발휘할
뿐이지요.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삶을 행복하게 하는 모든 권위는
온갖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위는 사랑과 정의와 선을 발생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한 ‘관계 맺음’과 ‘소통’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며 관계를 거부합니다. 거부와 관계단절은 분열과 폭력을 일으키며
살아있는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하므로 힘을 잃게 되지요.
진정한 권위는 ‘더러운 영’처럼 지식을 지식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았지만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는 기회로 삼아버립니다.
율법과 전승을 지식으로 해설하는 데 집중했던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말을 설명하셨기에’ 권위가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새로웠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행동이었지 새로운 지식을 말하는 언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권위 있는 것으로 바꾸는 그분의 권위는 바로 사랑의 행위,
생명과 해방으로 이끄는 행위,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삶의 기준과 뿌리를 하느님께 두고, 그분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사랑의 행동을 통하여 다른 이들과 이 사회에
창조의 새로움과 해방의 장을 열어주는 권위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권위란 말은 ‘누군가를 키우다. 성장하게 하다’란 뜻이 있지요.
사람을 키우고 살리는 ‘사랑의 행동으로’ 사랑이나 복음선포를 설명할
때 우리도 진정한 권위를 지닐 것입니다.
이제 율법학자나 더러운 영처럼 지식을 지식으로 설명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처럼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행동으로 말을 증명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행복한 우리로 거듭 나야겠습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을
공동선을 위해,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써야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
2017년 가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마르 1,21ㄴ-28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
물 건너오신 명강사를 모시고 피정강의를 잘 듣고 있습니다. 매일
당일 복음으로 렉시오 디비나(聖讀)을 지도받고 있는데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강사 신부님께서는 매일 렉시오 디비나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노력을 해보라고 초대하셨습니다.
①복음 구절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십니다.
②발견한 예수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③예수님 안에 거룩한 휴식(sacred sleep)을 취하십시오.
④예수님이 되십시오. ⑤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이어서 두 가지 성찰작업을 추가로 부탁하셨습니다.
①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 표정이 어떤 것인지 묵상하십시오.
②예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내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려주신 지침에 따라 복음을 묵상하니 결실이 참으로 풍요롭고
새롭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마침 회당
안에는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령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악령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코복음 1장 24절)
악령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2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바로 그
시선으로 오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옛날 회당 안 악령 들린 사람마냥 ‘뭔가’에 단단히 홀린 나, 하느님
아닌 엉뚱한 대상에 단단히 빠져든 나, 한 순간 자신을 통제 못해
언제나 돌아서서 크게 가슴 치는 나를 예수님께서 자비심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십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악령에 사로잡힌 나,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나,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나,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나, 여러 가지 중독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악령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화요일
2017년 가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마르 1,21ㄴ-28
사제 생활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제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신학생들과 함께하였던 ‘30일 피정’이었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30일 피정을 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도움으로
10년 넘게 학생들과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성소국에 있기 때문에
30일 피정을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학생들의 성소를 판단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학생들과 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님들께서 동안거를 통해서 내적인 수련을 하듯이, 30일
피정을 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고, 학생들과 나눔을 통해서 사제가
되려는 순수한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부터는 30일 피정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사제들의 권위는
피정과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30일 피정은 다섯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죄인까지는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게 됩니다. 주님의 탄생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비천한 나를
구원하기 위함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 표징,
치유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심을 묵상합니다. 주님과 멀어지고,
죄로 인해서 상처받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을
묵상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셨듯이, 주님 부활의 기쁨에 희망을 얻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피정을 마치게
됩니다.”
30일 피정을 관통하는 주제는 ‘원리와 기초’입니다. 마치 만능열쇠와
같아서 묵상이 잘 안되거나, 분심이 들 때면 원리와 기초를 묵상하게
합니다. 30일 피정 중에 원리와 기초를 외우라고 이야기 합니다. 길을
걸으면서, 잠을 자기 전에도 원리와 기초를 묵상하라고 합니다. 오늘은
원리와 기초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세상 모든 것들을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새로운 권위를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30일 피정 중에 있는 사제들과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수원] 악령을 퇴치하시는 주님/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월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1,21b-28: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던
것이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
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 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8,29)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
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 수원 교구 하상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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