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7년 가해 1월11일 수요일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수도회] 예수님 스타일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히브 2,14-18
† 복음 마르 1,29-39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이 모두 예수님에게
몰려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기쁨에 넘쳤습니다.
반면에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지치고 피곤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치유와 구마의 권능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므로
그분과 일치하는 기도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이 바쁘고 힘겨울 때 먼저 육신의 회복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황폐화되고 있지만 보이지 않아 소홀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구원 사업에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기도로 영적 자양분을 얻으며 육신의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병의 치유는 의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성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영적인 치유가 이루어진
다음 그 효과가 질병의 치유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구마는 영혼의
죄스러운 사슬과 파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며 길 잃은 양들의 구원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시고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시는 스승님을
간절히 모시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우리는 치유와 용서의
주님을 기도 중에 만나게 되며 복음을 전파할 힘을 받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나도 그렇게 대접받고 싶거든.”
2017년 가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자비로우신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처음 신학교 들어갔을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식사
때가 되면 모든 신학생들이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한 테이블에 8명씩
앉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언제나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밥이나 국을
퍼줍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고 나면 뒷정리를 도맡아서 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말이지요. 정말로 천사표가 따로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 친구와 단 둘이 있게 되어서
평상시에 가졌던 의문을 물었습니다.
“너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조건 나눠주고, 또 그렇게 친절할 수 있니?
혹시 내가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
솔직히 저 역시 이렇게 직접 국이나 밥을 퍼주고, 또 도맡아서
뒷정리도 해봤지만, 전혀 고마워하지 않고 또 그냥 가만히만 있는
친구들이 얄미웠거든요. 괜히 손해 보는 일을 한 것만 같은 생각에
다음부터는 눈치를 살살 보면서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언제나 웃으면서 도맡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친구의 마음이
어떤지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그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대접받고 싶거든.”
주는 것만을 통해서 어떤 기쁨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
역시 대접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자신에게 나눠주고 친절하게
대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큰 기쁨을 얻는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많은 이들이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자신에게 주지 않음에
대해서 아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문득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당연히 받는 것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은 것을 보지 않으니,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청했는데 왜 들어주시지 않느냐면서
불평불만을 던지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셔서 열을 가시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열이 가셨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중을 들 정도로 왕성히 활동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힘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보다는 주님께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 받았으니 자신 역시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침대에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나서 시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보려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 그래서 주님께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다. 수많은 실이 우리와 동포를
잇고 있다(헨리 멜빌).
시몬 베드로의 집터입니다.
귀감이 넘치는 좋은 글(인터넷에서 퍼온 글)
사람이 미우면 단점만 보이고 사람이 사랑스러우면 장점만 보인다고
합니다. 매사 하는 일이 꼴 보기 싫으면 미운 감정이 내 속에 있는
것이요. 하는 일이 모두 어여뻐 보이면 사랑의 감정이 내 맘에 있는
것이랍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모두가 장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점만
지니는 완벽한 사람 없으며 단점만 지니고 있는 미숙한 사람 없지요.
우린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평가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으면
좋은 사람이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 세상 완전하고 완결하고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런 분이 있다면 오직 신뿐이겠지요. 그래서 인생은
미완성이라고도 하는 것 같아요.
나에게 단점이 있다면 개선하고 나에게 장점이 있다면 부각시켜
개선해야겠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때 모르고 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도 잘못을 할 경우엔 용서받기 어려운
일입니다. 나에게 단점을 알고 그것을 성찰할 때 자아 발전이 될 수
있으며 장점이 많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모든 사람이 나를 존경하며
존중할 것입니다.
갑곶성지의 지하성당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예수님 스타일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마르 1,29-39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마르 1,34)
예수님 스타일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
현세의 우상들이 갈수록 우리의 신앙과 정신세계를 혼탁하게 하고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오늘입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지름길을 상세히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런 다음 새벽에 일어나시어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고”(1,35), 계속해서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1,39)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기도하신 뒤 말씀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다음
멈추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방식을 따라 거룩한 복음을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단계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앞서 온전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광야로 물러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으로가 아니면 발견할 수 없고,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나 자신을 선전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지요. 기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려 들 때 결국은 자신의 생각이나 하느님 아닌 것을
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주님께 얼굴을 돌려야겠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전례 안에서 자신의 말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선포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며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율법에 대한
지식과 전통을 해설한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증명하십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고 병든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심으로써 하느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말, 인간을 거룩한 하느님의
마당으로 들어가도록 해주는 말은 행동으로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방식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으니, 오직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만 집중하여, 동료들과 ‘함께’, ‘곧바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고독의 유희가 아니지요. 하느님이신 분께서 동료
인간과 ‘함께’(1,29) 병을 치유해주러 나서는 ‘함께함’의 몸짓으로
하느님 나라는 드러납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은 멈춤이 없이 ‘곧바로’(1,29-30) 실행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내 할 일 다 하고 시간이 나면 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나
'로맨틱한 취미거리'가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자유와 해방은
다른 이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고 ‘다가가’ 함께 해줌으로써(1,30)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말씀을 증명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사랑을 행동으로
선포하고, 인간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소중함을 드러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예수님처럼 잠시 외딴
곳으로 물러가 영혼의 호흡을 고르고, 함께 손잡고 ‘곧바로’ 세상
한복판으로 달려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2017년 가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 1,29-39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말씀이나 태도가 거침이 없고 당당합니다. 가는 곳 마다 분위기를
압도하시며 빛나는 승리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들 앞에 사람들은 크게 환호하며 감격해합니다.
유다 회당에서 악령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의 다음
행선지는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집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직감하셨습니다. 집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 꽤나
무거운 공기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시몬의 부인이며 장인어르신이며 가족들이
근심스런 얼굴로 장모 머리맡에 둘러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들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마침 그 순간 집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과 시몬을 바라보는 눈초리 역시 날이 서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조금 웃기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데, 사실
‘화병’이 아니었을까요? 갑작스레 혜성처럼 등장한 예수란 존재,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멀쩡히 잘 지내던 사위 시몬의 가출,
그로 인해 생과부가 된 딸, 정말로 무책임한 사위 시몬! 장모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열불 나는 일,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지 않을 수 없는 시몬의 장모였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십니다. 고열로 인한
혼수상태에서 헛소리까지 하고 있는 부인의 모습에 예수님의 마음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당신
어머니에게 하듯이 아무 말 없이 부인에게 다가가 그저 손을 꽉
잡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손과 장모의 손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죄송해요. 부인. 제게 시몬이 필요합니다. 부인에게 참으로
소중한 시몬이겠지만 더 큰 일을 위해 시몬이 꼭 필요합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몸을 앞으로 당겨 그 자리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이 다였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인의 열이
내렸습니다. 열에서 해방된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자상함과 부드러움 앞에 부인의 굳게 닫혀있는 영혼의
물꼬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꽉 막혀있던 흐름이 열리니 그간의
분노와 걱정, 원망과 화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이제 일말의 미움이나 적개심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예수님 일행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해가 떨어지자 시몬의 집 안팎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장사진을
쳤습니다. 갖은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 백약이 무효인 사람들,
마귀 들린 사람들, 그들을 데려온 가족들과 친구들, 진귀한 풍경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즉각적인 치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구마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마귀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시몬의 집과 온 고을을
휘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이 지상에서의
구원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평생토록 염원해왔던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확인했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바라다봅니다. 가난한 이웃들, 고통 받는 사람들,
불치병 환우들, 만만치 않은 나라로 건너와서 죽을 고생을 거듭하고
있는 이방인들이 우리 공동체에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와서 그 어떤 차별대우도 받지 않고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구원을 맛보고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지상천국을 누리고 있습니까?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 1,29-39
시간이 나면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요즘은 ‘낭만닥터
김사부’를 보고 있습니다. 시골병원의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환자를 돌보고, 사랑하는
의사와 병원을 경영으로 여기고, 사업으로 생각하는 의사로
구분되어있습니다. 환자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의사들은 실력이
있어도 모함과 질시를 받아서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경영과
사업으로 생각하는 의사는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게 됩니다. 드라마는 의사들의 편이 정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힘들고,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환자들을 사랑하고,
환자들의 편에서 치료를 하는 김사부를 따르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병원을 경영으로 생각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여기며, 이익을 위해서는 양심까지 팔아넘기는 병원장을 따르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환자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의사들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해도 드라마에서는 양심과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30일 피정은 몇 가지 묵상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학생들에게 주는 묵상은 ‘두개의 깃발’입니다. 하나는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고, 웅장하게 보이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초라하고, 작고, 약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학생들에게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깃발은 ‘그리스도의 깃발’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리고 그 깃발아래 있어야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사제의 길을 갈 수 있음을 이야기 해
줍니다. 30일 피정은 끊임없는 선택의 과정입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서는 선택의 과정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때로 세상과 떨어져 살 필요가 있습니다.
강물에 떠밀려 가는 것은 낙엽이나 나뭇조각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강물에 떠밀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강물 속에 머물기도
하며, 강물을 이용할 줄 압니다. 물고기는 강물 속에서 살지만, 강물을
거슬러 갈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거친 세상이라는 강물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살아가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 살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우들 중에서 자동차를 아름답게
이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성당까지 모셔오고,
미사 후에는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휠체어를 타고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집에까지 찾아가서 모셔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은 자동차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100세의 노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잘못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보상하고 갚아나가야 하기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야기 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수원] 병자들의 치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가지고 거리를 지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저녁에 해지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율법은 하늘에 별이 3개가 나타나면 그 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안식일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해가 지고,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주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 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고 하셨다. 우리도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의 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며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들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 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으셔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주임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청주] 고요함이 있는 곳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월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 1,29-39
고요함이 있는 곳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 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루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 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