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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1월25일 수요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수도회] 회심을 통한 사랑과 화해의 선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22,3-16
† 복음 마르 16,15-18
◈ 오늘의 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회개, 세관장 자캐오의 회개는
지상에서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이루어진 회개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에 살던 신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던 청년이
빛이신 예수님을 신비롭게 만나 이루어진 회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의 회심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인물로 바오로 사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출신, 학식, 기득권 모두를 쓰레기로 여기며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 지상의 지혜가 아닌 천상의 지혜,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는 하느님의 계획을 깨달았습니다(로마 8,21 참조).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에서 시작됩니다.
사울이라고 불렸던 바오로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사도 7,59)라는 스테파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세계사적 사건인
바오로의 회개는 순교자의 희생에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바치도록 우리에게 권고합니다(로마 12,1 참조).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회심의 시간
2017년 가해 1월25일 수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제1독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2,3-16<또는 9,1-22>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18
사는데 의미를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께서는
남편으로부터 커다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믿음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그냥 짜증만 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안에는 남편에 대한 미움이 너무 가득했습니다. ‘자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남편 때문에 지금
자신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 역시 남편 때문이었지요.
대부분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과 시련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밖에서 찾아온 원인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원망과 미움을
간직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는 내가 사는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의 주도권을 밖에 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밖에 있는데 어떻게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공인
나의 입장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 있는
삶,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의미 치료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의미를 찾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절망의
순간에서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그 의미를 스스로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누구실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에 회심을 하게 되지요.
이 회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단순히 율법만 열심히 지키고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에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까지 이방인들의 사도로
세상에 주님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회심을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진정으로 회심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 삶의 의미를 세상의 것에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나의 모습에서 의미를
찾을 때 진정한 회심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회심을 통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 막바지에 도달해 뒤를 돌아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어. 고통 받던
날이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다고. 그때의 자신을 만들어 낸
시간이었으니까(영화 ‘미스 리틀 션사인’ 중에서).
사제 피정 중입니다. 지금은 미사 중.
바라보기(유시찬,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중에서)
중(中)이란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전체를 취하고 아우르는 것입니다.
기쁠 때는 슬픔을, 건강할 때는 질병을, 명예를 누릴 때는 모욕을,
부귀를 누릴 때는 가난을, 바라보며 전체를 취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의 격렬한 기운과 움직임에 충실하면서도 그 감정으로부터
초연히 떠나 있는 바로 거기에 진정한 ‘중’이 있고 마음의 고요가
있으며 그로부터 참된 내적 에너지가 솟아나옵니다.
전체를 취하고 아우르는 ‘중’의 모습으로 살아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새로운 관계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참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제 피정 중입니다. 지금은 강의 중.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회심을 통한 사랑과 화해의 선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월25일 수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 16,15-18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회심을 통한 사랑과 화해의 선포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고
이르십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복음선포를 목숨을 바쳐
헌신적으로 수행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소아시아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사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고,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한마디로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전통주의자였지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신자가 날로 증가할 무렵
고향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그는 유대교 율법에 대한 충성심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늠데 앞장섭니다(사도 22,4).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에 이르렀을 때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신비스런 빛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마스커스에 들어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통회의 기도를
바친 뒤, 하나니아스를 만나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사람, 바오로로 거듭 태어납니다.
하느님을 박해하던 사울을 바오로로 회심시키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이제는 바오로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바오로 안에 사시게 된 것이지요(갈라 2,20). 방향을 바꾸어 딴 사람이
된 그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다마스커스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타르수스, 안티오키아, 로마,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그침 없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여행 중에 4년간이나 옥고를 치렀고 죽을 위험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39도의 매를 다섯 차례 맞고, 로마인들에게
태형을 세 번 당하고, 세 번 파선 당하여 바다에서 일주일간
표류하기도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고픔과 목마름, 단식,
추위, 노고 등을 견뎠고, 네로 황제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련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지요.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통해 무엇을 되새겨야 할까요? 먼저 회심하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 은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주님께서 회개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유언 1)고 자신의 회개를 회상했지요. 회심의 첫걸음은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함으로써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회심한 사람답게 부르시는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주님 사랑의 연장으로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회심은 마음이나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회심한 사람답게 오직 복음선포를 위해 다가오는 온갖
시련과 고통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견뎌내야겠습니다.
회심한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온 세상에서’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위해 남김없이 되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가릴 것 없이 모두의 구원을 위해
그가 배우고 익히고 지녔던 모든 것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쳤던
바오로 사도처럼 말입니다.
특히 신음하는 피조물을 향해서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사랑과
열정으로 복음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인간과 생태환경, 세상과 피조물
사이를 가르는 온갖 요소를 극복하여 화해와 일치의 길로
이끌어야겠습니다. 오늘도 회심의 은총을 청하면서, 내 힘을 빼고
생명력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행복한 회심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영원한 선교사 원선오 신부님
2017년 가해 1월25일 수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15-18
영원한 선교사 원선오 신부님
청소년들의 영원한 스승이요 참 교육자이신 원선오 신부님을 꿈에도
잊지 못하는 살레시오중고등학교 졸업생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분이
직접 작사·작곡하신 주옥같은 성가들, ‘좋기도 좋을시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엠마우스’를 사랑하시는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 한 가지가 있습니다.
워낙 고령에다가(1928년생) 기력이 너무 쇠하셔서 이젠 더 이상
지상에서 그분을 뵙지 못하겠구나, 하고 체념했었는데, 최근 원선오
신부님께서 기적적으로 기력을 회복하셨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제대로 거동도 못하던 신부님이셨는데, 최근에는 활기차게 걷기까지
하셨답니다. 그리고 한인 공동체를 방문하셔서 그곳 한인들과 함께
미사도 집전하시고 오랜 만에 그리도 좋아하시던 오르간 건반 앞에
앉으셔서 한국 교포들과 함께 ‘사랑해 당신을’이란 노래를 연주하시며
노래까지 부르셨답니다.
그동안 수많은 제자들이 원선오 신부님께서 위중하시다는 소식에
그토록 안타까워했었습니다. 너무나 멀리 계셔서 병문안도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면서 이렇게들 말씀하시더군요.
“원신부님께서 고령이시라도 괜찮습니다. 그분이 노환으로
오락가락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를 기억하지 못하셔도 문제없습니다.
그저 그토록 위대한 스승,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께서 조금이라도 더
우리 곁에 머물러주셨으면 하는 것, 그것 밖에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영원한 선교사 원선오 신부님의 선교 여정은 오늘 우리 모두가
눈여겨볼만 합니다. 원신부님은 1928년 이탈리아 중부 해변 도시
파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에 들어가면서
살레시오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살레시오 회원이 된 그는 1950년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8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그 어렵다는
일본어에 익숙해질 무렵인 1962년 한국으로 건너오셨습니다.
그후 약 20년간 광주 살레시오중고등학교에서 뭇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시며 참으로 행복한 살레시안으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신부님께서 로마 살레시오회
총본부로부터 답지해온 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비가노 총장
신부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열악한 대륙인 아프리카의 복음화를 위해
오랫동안 구상해 오신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건너가 수고해줄 살레시오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했습니다.
당시 원선오 신부님의 나이는 55세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말도
많이 익히셨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계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제 노년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내면 딱 좋을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미련 없이 한 가지 또 다른 계획을 세웁니다. ‘이제 한국은
경제 상황도 나아지고 교회도 많이 발전했으니, 더 이상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 여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아프리카로
가자.’
그렇게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이탈리아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케냐로, 그리고 케냐에서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 수단에 마지막으로 짐을 푸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리고 실제로 떠났던 원선오 신부님의 모습에서
이방인들의 사도 바오로 사도의 향기가 물씬 풍겨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정든 땅은 물론이고 가족과 친지, 친구들마저 미련 없이
뒤로했던 원선오 신부님의 뒷모습에서 바오로 사도의 뒷모습이
교차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미지의 땅을 향해 기꺼이 순례의
길을 떠났던 바오로 사도, 그리고 원선오 신부님의 사목적 열정이
참으로 부러운 하루입니다.
“돈 보스코의 생각, 돈 보스코의 정신만이 저를 지탱하여 주는
지주입니다. 어느 나라든 어떤 상황이든 돈 보스코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해주기 위해 꼭 어떤 말을 하거나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그의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내려와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듯이 교사들도
청소년들 가운데 함께 머물고 그들 가운데 생활해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서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017년 가해 1월25일 수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15-18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연구’에서 ‘도전과 응전’을 이야기합니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겨울을 견디어낸 나무가 더욱 단단해지듯이,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새로운 길과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여기지만 실패하는
사람은 시련과 고통을 ‘걸림돌’로 여기기 마련입니다. 원망과 분노,
핑계와 좌절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제게도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습니다. 저의 부주의와 게으름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질병 때문에, 잘못된 습관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86년이니까 31년 전에 저는 군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군인 성당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환경이었지만
저는 게을렀고, 꼼꼼하지 못했습니다. 성당 근무 3달 만에 자대로
복귀해야 했습니다. 돌아보면 당시에 군종신부님께서 엄하게 저를
책벌하셨기 때문에 군 생활을 무사히 마쳤던 것 같습니다.
91년이니까 26년 전에 저는 사제서품을 받은 새 사제였습니다. 서품을
받고 보름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첫 본당에서 첫 주일을 지냈는데
열이 심했습니다. 병원으로 갔고, 중환자실에서 보름을 있었습니다.
병명은 ‘유행성 출혈열’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고, 특히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호와 의사 선생님의 치료 덕분에
퇴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의 사제생활은 ‘덤’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크게 욕심을 부릴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덤으로 주어지는 삶인데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95년이니까 22년 전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해외에서 사목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듣고, 학원을 다니거나
영어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저는 송별회를 한다는 이유로 자주 술을
마셨습니다. 주교님께서 어찌 아셨는지 저를 부르셨고, 해외 사목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참 감사할 일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제가 해외에서 사목을
했다면 아마도 술 때문에 건강을 많이 상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는 술을 마실 때 자제하게 되었고,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견책이
제게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역시
감사드릴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마 저보다 더 큰 시련과 아픔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시련과 아픔을 디딤돌로 여기신 분들은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면서 지내실 것입니다. 시련과 아픔을 걸림돌로 여기신 분들은
아직도 삶의 후반전을 제대로 준비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비록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인생의
후반부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서도 후반전이 중요합니다. 비록 전반전에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후반전에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영성을 묵상하면서 우리들 또한 십자가와 수난의
영성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수원]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사명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월25일 수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 마르 16,15-18: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에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개종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축일은 8세기부터 프랑스 지방에서 먼저 지내오다가 10세기말에
교회력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개종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이며, 박해자였던 사울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의 개종은 또한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개종”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거룩한 은총과 교회의 잔인한 박해자
사울로를 “사도”로 변화시킨 능력에 대한 권능의 주제에 대한 그의
학설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개종축일을 지내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그러기에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부활을 체험하였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들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듯이, 즉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야 하듯이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살며. 그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선포의 삶이 나 자신과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모두가 복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도 사도 바오로와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청주] 삶의 방향전환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1월25일 수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15-18
회심은 방향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3,13). 아마도 지난 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 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 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 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
(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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