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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2월6일 월요일
[(홍)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수도회] 행복을 찾고 행복 안에 머무는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1,1-19
† 복음 마르 6,53-56
◈ 오늘의 묵상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정반대로 말 한마디가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일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이토록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독재자의 한마디가 수많은 민중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정치인의 잘못된 판단과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이 실직하고, 노동 인권이 무시되기도 하며, 개발 욕망에 물든
재력가들의 말 한마디에 아름다운 산야가 훼손되고, 부당하게 땅을
잃는 이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절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약자들의 목소리는 공허해지고, 그들의 말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기도
합니다.
유스티노 성인(+165년)은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가 인간과 신을
매개해 주는 신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여, 그리스도를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 곧 로고스의 육화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에 담긴
폭력성을 넘어 ‘진리와 생명’을 담은 ‘신의 언어’를 목말라하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창세기의 첫 장에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는
표현은 하느님 말씀이 지닌 창조의 힘에 대한 고백입니다. 말씀은
행위를 낳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선과 악을 낳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보시니 좋았다.”는 원초적인 생명을 창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생명의 말씀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고, 치유받으려고 예수님께 달려간
이들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치유와 생명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치유를 청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하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열시키며, 혼란을 가져온다면, 나는 치유를 청할 줄도 모르는 영혼이
병든 사람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간절한 노력을 통해서만
2017년 가해 2월6일 월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1,1-19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우리나라에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는 직원 전원이 로봇인 호텔이
생겼다고 합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처우 개선이나 연봉
인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육아 휴직이나 병가 등을 내지
않을 테니 훨씬 매력적일 것 같습니다. 더욱이 작년에 있었던 구글
딥마인드라는 ‘알파고’와 인간의 바둑 대결로 인해서 로봇 역시 높은
지능으로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그래서
인간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직업의 3분의 1일을 로봇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전문 일자리까지 잠식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편리함과 생산성 그리고 유용성까지 주는 로봇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이 모든 인간들에게 반드시 필요할까요? 우선 인간의
일자리를 잠식함으로 인해 이 안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경영자 몇몇의 만족을 위해서 대다수가 아픔과 상처를
받는다면 분명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조건 편리함과
생산성, 그리고 유용성 등의 쉽고 편안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
옳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삶 안에서 쉽고 편안한 것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노력도 없이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며,
특별한 운이 자신에게만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누군가가 아픔과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면 분명한 잘못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상황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왜
굳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냥 알아서 해주시면 당신도
편하고, 우리도 편하지 않을까요? 왜 힘든 길을 직접 선택하셔서
하느님께서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어쩌면 편하고
쉬운 길만을 선택하지 말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모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 한 번에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 그냥 알아서 나에게
좋은 것은 다 달라는 마음 등을 통해서는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으며, 이러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소외되는 그 누군가가
분명히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습니다. 그런데 그냥 쫓는 것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그들의
간절함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함 없이
예수님을 쫓았던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만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간절한 노력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은 뒤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 모여 인생의 지도를
만든다. 인생이란 지금 발을 내디딘 현실에 맞게 머릿속 지도를 수정해
가는 과정이다(고든 리빙스턴).
공룡 로봇이 체크인을 받는 로봇호텔입니다.
엄마의 한마디(최천호)
어느 가족이 주말에 야외로 나갔다. 아들이 자동차를 보더니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아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첫 번째. 연료가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꾸어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들에게 답해주기 좀 어려운 것 같았다.
'두 번째. 우리가 밥을 먹어야 막 뛰어놀 수 있듯이 자동차도
엔진이라는 곳에 기름이라는 밥을 주면 움직인다.'
이건 자상한 아빠의 대답인 것 같은데 뭐가 좀 허전한 것 같았다.
궁리만 하는 아빠가 답답했는지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자 엄마는 단 한마디로 끝내 버렸다.
"빙글빙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어머니의 대답이 어쩌면 주님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나의 이웃들에게
이렇게 눈높이를 맞추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오늘 축일인 나가사키의 바오로 미키 성인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행복을 찾고 행복 안에 머무는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2월6일 월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마르 6,53-56(17.2.6)
“병든 이들을 그분이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왔다.”(마르 6,55)
행복을 찾고 행복 안에 머무는 길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바라는 구원은 주님 안에서의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행복이란
잠자코 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만 딴 데 눈길을 돌려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지요. 오늘 복음은 어떻게 행복을 찾고 그
안에 머물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시는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에서 내리는 예수님을 ‘곧 알아봅니다.’(6,54). 예수님을
알아봤다는 것은 행복의 원천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추상적 지식을 습득한 것이 아니라 ‘알아본’ 것이지요. 그러나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다가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섰고’,
계속 따라다니며 '보고, 받아들이고 믿었기에'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머무르려고 시간을 내서 함께 했고,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그분께 집중함으로써 체험적 앎과
깨달음이 있었으니 알아본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지요.
예수님을 알아본 그들은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합니다(6,55). 믿는 이들이
찾아가는 행복은 언제나 ‘함께하는 행복’이며, ‘함께 나누는 행복’이며,
하느님의 선(善) 안에서 서로를 이롭게 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지는
보편적인 행복입니다. 멈춤 없이 주변으로 밀려난 형제자매들을 행복의
샘이신 예수님께 데려가는 것이 우리의 몸짓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다가가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 안에 머무르려면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요한 15,12)이 마땅한 도리이겠지요.
예수님처럼 억울함과 절망과 고통과 온갖 아픔을 안고 다가오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거짓과 불의, 차별과
불평등, 온갖 반생명적인 실재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마르 6,56). 자기중심성과 애착에서 벗어나 늘
마음과 영혼의 눈길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항구한 사랑의 눈길과 연민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신해야 합니다. 조건 없이 서로의
아픔과 불의와 어둠을 받아들여 선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사랑과
의로움과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이들의 갈증을 채워주기 위해
남김없이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시간을 쓰고 공을 들여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더불어’
그분께 다가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행복, 영원한 생명을 향해
떠나는 가슴 벅찬 순간을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고정관념과 왜곡된
신념, 이기심을 치우고 하느님 친히 ‘보시기에 좋은’(창세 1장) 행복한
나라가 펼쳐지도록 준비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병자들을 치유해주시는 주님!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6일 월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들이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들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수많은 군중들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찾으면서도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17년 가해 2월6일 월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 6,53-56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도 정성을 들여서 만든 도자기를 보면 그런
마음이 들것입니다. ‘아 좋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당 앞에
작은 동산이 있었습니다. 태풍이 불어서 토사가 밀렸고, 아파트와
마주한 옹벽이 조금 무너졌습니다. 서울시와 구청에서 관계자가
성당을 찾아왔고, 앞으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동산을 6미터 정도
낮추기로 했습니다. 트럭으로 1200대 가량의 흙을 파냈습니다. 성당
앞에는 1000여 평의 마당이 생겼습니다. 철쭉, 장미, 과일 나무를
심었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성모의 밤’도 하였고, 정월 보름에
‘윷놀이’도 하였습니다. ‘정말 보니 좋았습니다.’ 선한 마음과 정성이
함께하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들은 ‘보기에
좋은 것’들이 될 것입니다.
욕심과 교만이 가득하면 우리가 하는 일들이 겉으로는 보기 좋을지
몰라도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자칫 대형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성수대교의 붕괴’입니다. 자신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유통시키기도 하고, 남의 노력과 혼이 깃든 명품을 짝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추하고, 버려야 할 것입니다.
지난 3일에는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새 사제를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사제서품식이 끝나고, 추기경님께서 새 사제들에게 첫
부임지에 대한 임명장을 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임명장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도 26년 동안 11번 자리를
옮겼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는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적성과 시흥5동에서는 본당신부로 지냈습니다.
사목국에서는 교육담당 업무를 담당했고, 캐나다에서는 연수를
했습니다. 중견사제 연수를 마치고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 있었고,
성소국에서는 5년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6년 동안 본당에서만 사목을
했던 동창 신부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참 여러 곳을 다양하게
옮겨 다녔다!’ 제가 지나온 그 길들이 보기에 좋기 보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낯선
곳의 긴장도 쉽게 풀어주고, 새로운 만남을 곧 친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전문가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식견을 받아들이고, 그분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그분들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이 더 소중합니다. 사실 그분들 대 부분은 저 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사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더 자주
찾아뵙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시는 신부님들,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사목현장으로 가시는 신부님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일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분들 모두가 주님의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함께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2월6일 월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마르6,53-56)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 삼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 받지 못 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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