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조선엔 병인년과 신미년에 두차례 양요가 있었습니다.
일본도 쇄국의 분위기 속에 일어난 서구열강 과의 두차례 전투가 있었습니다.
사츠마번이 벌인 가고시마 포격전 이라고도 부르는 사쓰에이 전쟁과 조슈번이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이 그것 입니다.
사츠마번에선 다이묘의 행차에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해서
사무라이들이 리차드슨 이란 영국인 상인을 해친 사건이 일어납니다.
- 리차드슨 사건을 묘사한 일본 목판화 -
영국은 이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보상을 요구 했지만
사츠마번이 이를 거부 한데다, 영국군함을 포격 하자
1863년 8월 카고시마에서 영국해군이 사츠마번을 포격 함으로서 사쓰에이 전쟁이 벌어집니다.
- 르몽드지에 실린 영국해군의 가고시마 포격전에 대한 그림 -
- 사쓰에이 전쟁에 대한 일본 그림들 -
사츠마번은 조슈번과 함께 쇄국의 대표적인 주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사츠마번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호의적 이었으나
개항을 신중히 고민하고 있던 터에 불행하게도 리차드슨 사건이 터지면서
정치적으로 이용된 면이 없지않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참고로 말하자면, 재밌는 역사적 사실 하나.
바로 이사람.
훗날 일본 연합함대의 제독으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무찌르고
일본에게 러일전쟁의 승리를 안겨준 '도고 헤이하치로'도
사쓰에이 전쟁에 해안 방어포대의 젊은병사중 한명으로 참전 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그렇게 사츠마번은 사쓰에이 전쟁이라 불린 카고시마 포격전을 통해
서구열강에게 박살이 나고, 서구열강의 위력을 새삼 실감 하면서
'막부토벌'을 기치로 내걸면서 완전 개항으로 돌아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 합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한참 타오르던
조이(오랑캐를 몰아내자)의 분위기를 묘사한 일본그림.
그리고 당시 외세배척의 또하나의 대표적인 번 이었던 조슈번.
바로 우리에겐 안중근의사에 의해 저격 당한 이등방문으로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가 있는 조슈번이 있었습니다.
1863년 ~ 1864년에 있었던 시모노세키 에서의 전투에서
조슈번도 사츠마번과 마찬가지로 용감하게 서구열강에 달려들었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던란드 까지 4개국이 형성한 연합함대에
사츠마번이 카고시마에서 그랬듯이 박살이 나고 맙니다.
- 시모노세키에서 서양선박을 향해 포격을 가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그림 -
- 1864년 런던뉴스지에 실린 영국군의 시모노세키 상륙전투를 묘사한 그림 -
이 때 시모노세키 포대를 점령한 4개국 연합군중 프랑스군은
병인년 조선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를 약탈해 갔듯이
점령한 시모노세키 포대에 있던 조슈번군의 대포들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 시모노세키의 조슈번군 포대를 점령한 4개국 연합군 -
프랑스군이 가져간 조슈번군의 대포는
파리 [엥 발리드]군사박물관의 북쪽문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오랜세월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문화재 반환운동을 벌였듯이
일본도 이 프랑스군이 가져간 대포들의 반환운동을 벌여왔는데
끝내 반환은 받지 못했고, 위 사진에 나와 있듯이 진품은 프랑스에 전시되어 있으며
정작 일본의 전투가 벌어졌던 그 현장엔 프랑스의 허락을 받고 일본이 복제를 한
복제품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 정작 일본의 해당현장에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
여하튼 그리하여 조슈번도 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서구열강의 막강한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사츠마번과 마찬가지로 '막부토벌'의 기치를 구실로 쇄국에서 개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리고 아시는대로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서로 원수지간 이었던 사츠마와 조슈 두 번이
반막부 연합을 결성해 왕정복고를 기치로 내건 보신전쟁이 발발, 사조연합군이 막부군에 승리를 거두죠.
사조연합 형성과 메이지유신의 토대를 놓은
일본역사의 가장 유명한 인물중 한명인 '사카모토 료마' 입니다.
1868년 1월, 보신전쟁 끝에 사조연합의 가신들이 주축이 된 메이지유신이 성공
에도막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후 역사는 젊은 유신지사들의 몫이 됩니다.
물론 그후에도 일본에서 외세배척의 분위기를 비롯한 혼란이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어서
사조연합 출신들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세이난 전쟁] 같은 사건도 일어나고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에 의해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 당하기도 하며
외국인들이 계속 습격, 피살 당하는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말입니다.
- 세이난 전쟁 때의 정부군 지휘부 -
조선도 역시 쇄국을 하면서 서구열강과 부딪히며 전투를 벌이게 되죠.
아시다시피 병인년과 신미년에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말입니다.
뭐 조선이 일본 못지않게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고 해도
일본 처럼 개항으로 돌아섰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만
정족산성에서의 승리가 조선에 보다 자신감을 심어준것 만은 사실인거 같습니다.
- 정족산성 전투 기록화 -
이어 신미년에 있었던 미군과의 전투에선 아시다시피 변명의 여지 없이 보다 처참하게 참패 합니다.
하지만 그게 훗날 비극적인 역사를 예고하는 조선이란 나라의 운명 이었을까요?
조선은 그런 참패를 당하고도 일본 처럼 서구열강의 위력을 실감하고 문호를 개방 하기는 커녕
마치 요즘의 북괴 처럼 오히려 더욱더 문을 걸어 잠그고 내부단속에 힘을 기울입니다.
-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포격으로 처참히 파괴 당하고 점령당한 초지진 -
전투후 촬영된 광성보의 처참한 모습.
사방에 널려있는 조선군의 시신들과 이를 보는 미군들의 모습이 승패여부를 명확히 보여주네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 못지않게 화제가 된 것이
바로 신미양요 때 미군이 가져간 이 어재연장군의 수자기 반환이죠.
136년 만의 반환인데, 공식적인 명목은 최장 10년 장기임대 라네요.
서구열강 과의 두차례 전투후 정신을 차리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며 변화에 적응하는데 충실했던 일본.
반면 변화에 적응하기 보다는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바깥세상에 적대시 하기를 더 매진했던 조선.
여러 역사학자들이 그 두차례 양요를 겪은 직후 만도, 조선이 자신들의 미래를 향한 길을 선택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때 였다고 안타까워들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몇번 주어진 그 기회들을 놓쳤고, 대조적으로 일본은 그 기회를 잡은 것이죠.
이에 아시다시피 두나라가 결과적으로 엳게된 역사도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조선이 두차례 양요를 격은후 일본 처럼 개항을 하고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며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겠지만(일본도 그랫듯이)
보다 일찍 변화를 꽤하려고 했다면, 냉정한 약육강식의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엇을까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