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가 탄 투이하고 놀려고 마을에서 왔다. 네 녀석이 어울려 집 뒤 언덕에서 한 시간쯤 놀더니 무어 마실 게 있나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집에서 만든 사과 주스를 한 잔씩 따라주었는데 마지막 잔이 탄에게 돌아갔다. 마침 주스 병 바닥에 깔려 있던 찌꺼기가 떠올라 돌아다니는 게 보이자. 탄은 안 마시겠다면서 잔을 내려놓았다. 네 아이가 다시 언덕으로 놀러 나갔다.
반 시간쯤 뒤, 탄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냉수라도 마실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발꿈치를 들어도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사과 주스를 가리키며 그것을 먼저 마시라고 했다. 탄은 주스 잔을 보고, 떠돌아다니던 찌꺼기 모두 사라져 깨끗하고 먹음직한 주스가 거기 있음을 알았다. 주스 잔을 마시고 나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스님, 이거 다른 건가요?"
"아니, 아까 그 주스란다. 잠시 조용하게 앉아 있으니까 그렇게 깨끗해졌구나."
"아주 맛있어요. 이 주스도 할아버지 스님처럼 명상을 했나요?"
나는 웃으며 투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주스가 할아버지처럼 명상한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주스 흉내를 내었다고 해야겠지. 그게 좀더 진실에 가까운 말이야."
이제 겨우 다섯 살도 안 된 탄 투이가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고 명상의 뜻을 제법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사과 주스는 잠시 쉬고 있는 동안 맑아졌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잠시 명상을 하면서 앉아 있으면 다시 깨끗해진다. 이 맑고 깨끗함이 우리를 신선하게 해주고 힘과 평정을 준다. 우리가 스스로 신선해진 것을 느낄 때 우리 둘레 또한 신선해진다.
오늘 밤 손님이 한 분 오셨다. 나는 사과 주스의 남은 것을 모두 잔에 부어 명상하는 방 가운데 테이블 위에 놓았다. 투이는 벌써 잠이 들었고, 나는 손님에게 저 사과 주스처럼 조용히 있자고 말했다.
틱 낫한 스님 글이다.
사과 찌꺼기들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쫓아서 시간이 지나면 잔 바닥에 조용히 가라앉지만, 사람의 생각은 그런 법에 복종하지 않고 끊임없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또 쉴 새 없이 움직여 일하며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이 사과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을 때만이 아니라 걷거나 일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사과 주스처럼 고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되고 안 되고는 그 다음 문제고, 일단은 그게 가능한 일이라는 것.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해볼만한 일이 아닐까?
첫댓글 밖에 바람이 세게 불어서 씨유웅 씨잉 소리가 제법 사납게 들리는데, 이 글 띄워놓고 두 번 옮겨 써 봤다. 잠깐이나마 잔잔해지는 것 같아 좋네. 고마우이^^
언니 집에 꼬마 손님들이 왔나, 할아버지 스님은 누구지, 궁금해 하며 읽어내려갔다. 나는 글을 읽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 지꺼기들을 휘휘 돌려댔다. 이 글을 다 읽으니 천천히 내 머릿속 지꺼기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