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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3월10일 금요일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수도회] 회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신앙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제 18,21-28
† 복음 마태 5,20ㄴ-26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인간을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라고
당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살인 같은 극단적인 범죄만을 중죄로 생각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분노나 모욕까지도 벌을 받는다고 새롭게 가르치십니다.
분노와 모욕이 살인의 발단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훼손하고 인격을 말살하는 것,
사람을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 심지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라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뺏는 것만 살인이
아니지요. 요즘 우려하는 이른바 ‘왕따’ 현상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얼마나 피해가 극심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살인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인간성의 모든 악한 요소들을 뿌리 뽑는 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고 보신 것이지요.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불화 중인 사람은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 하느님 대전에 예물을 드리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형제 역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이기 때문이지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웃과의
불화를 먼저 해소하려는 노력 없이, 단지 미사성제를 통해
하느님하고만 옳은 관계를 맺겠다면, 이는 순서가 바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 대전에
나서도록,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늘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무조건 화해하자.
2017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1-28
복음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우리나라 고소고발 건수는 엄청나다고 합니다. 보통 한해 평균 50만
건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큰 문제는 무고한 명예훼손, 모욕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혐의가 입증되어서 기소로
이어지는 비율은 전체의 3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하네요. 이는 곧
수사기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고소고발의 남용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소고발 자가 많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네가 잘못한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상대방만 잘못한
것일까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화해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마치 자기 체면이 크게 훼손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길에서 서로 부딪쳤을 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뭐야?’라는 표정으로 째려볼 때가
많다고 하지요. 이렇게 째려보았을 때의 결과는 어떨까요? 싸움이 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얼른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면,
상대방 역시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식으로 사과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째려보는 것이 이득일까요?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화해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이득일까요?
저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커다란 후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친구를 향해서 “용서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었습니다. 왜 이 말이 큰 후회가 될 수밖에 없냐면, 이 말을
내뱉고서 얼마 뒤에 이 친구가 사고로 주님 곁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싸웠고, 또 함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상처까지 주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다짐하게 되었지요.
‘무조건 화해하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의로움에 능가하는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에 있습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용서를 청해야 하는 용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 진정한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발적인 용서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이고, 이 사랑의 마음이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되어 있지요. 주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먼저 화해를
청했을 때에 마지못해 용서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해서 함께한 게 아니야. 더 사랑하려고 함께하는 거야
(영화 ‘업’중에서).
어제 원당동 성당으로 강의다녀왔습니다.
초대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소중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떤 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그루는 키도 크고
나뭇잎도 무성했지만 그 옆에 있는 나무는 키도 작고 가지도 나약해서
불평이 많았습니다.
“저 키가 큰 나무 때문에 햇빛을 못 받아서 나는 자라지 않는 거야.”
“저 나무가 없었다면 훌륭히 자랄 수 있을 텐데.”
“저 나무는 키만 크지 쓸모도 없고 나에게 피해만 주는군!”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작은 나무는
나무꾼에게 큰 나무를 도끼로 찍어 가져가 달라고 했습니다. 큰 나무가
나무꾼의 도끼에 찍혀 넘어지자, 작은 나무는 매우 기뻐했습니다.이제
멋지게 자랄 수 있겠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작은 나무가 쓰러져버렸습니다. 그늘이 되어 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큰 나무가 없어지자 뜨거운 햇볕과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한 작은 나무는 그만 힘없이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모르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소중함보다는 내게 해를 주고 있다면서 부정적인 판단을 가지고
대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잘못된 판단들이 결국
내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어제 강의를 다녀온 성당 마당. 특이하게 미니 축구장이 있었어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회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신앙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마태 5,20ㄴ-26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회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신앙
하느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살아가며 영성생활에 진보보다는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먼지처럼, 죄와 허물만 늘어 감을 보기도
합니다. 삶도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신앙의 문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에서 길을 찾아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에제 18,21-23)
하느님과 집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각자 자기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한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으므로, 전쟁의 위협은
적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방심과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는 무사
안일함 때문에,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587년에 멸망하게 되지요.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세상살이에서도 이 정도면 괜찮아, 별 문제
없겠지 하는 안일함 때문에 더 큰 곤경을 겪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되도록 남의 탓을 하려는 무의식의 조정에 자신을
쉽사리 내맡겨버릴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더 무디어지기 쉽지요. 그러다보니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세워둔 기준에 따라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뉘우치고
돌아서라 하십니다. 돌아서서 말씀을 따르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기만 하면, 구원의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임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만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삶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라고 요청하십니다(마태 5,20). 그렇습니다. 믿음의 실천은 언제나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무감각의 잠에서 깨어나 안일함을
버리고,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 ‘남보다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지체 없이’ 정의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멈춤의 시간을 가지며, 무디고 완고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고, 회개를
서둘렀으면 합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부패와 불의를 보며,
남을 손가락질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회개하는 정직함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또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남과 비교하고,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자만자족하며 안일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도
살폈으면 합니다.
정의는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겠지만,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나 자신부터 남의 탓을 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그만 두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께 얼굴을 돌려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자신의 회개를 서두르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가련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2017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마태 5,20ㄴ-26)
가련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회의 차 머나먼 타국에 와서 조마조마·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조국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지금 수많은
외국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한국에서 왔다니 틈만 나면
묻습니다. 헌재의 최종 결정 여부, 사드 배치 문제, 북한의 동태에
대해...
어떡하다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백척간두에 내몰렸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특히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아무
것도 한 일 없는 제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크게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이상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더 이상 우리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합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니 참으로 슬프고
가련한 우리 민족입니다. 틈만 나면 이리 내몰리고 저리 내몰렸습니다.
슬프게도 이리 찢겨지고 저리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사실 우리 동포들이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족들과
둘러앉아 평화롭게 삼시새끼 거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에게는
그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머나먼 남국(南國)에서 그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의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를 올립니다.
“가련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벼랑 끝에서
바치는 저희 동포들의 간절한 기도를 굽어 들어주십시오. 그 옛날
이스라엘 못지않게 참으로 슬프고 혹독한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백성들의 인도자라는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가
있습니까? 착한 목자라는 자들이 어떻게 이다지도 양떼들을 끝도 없는
곤경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
옛날 이스라엘의 현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재산을 마음껏 갈취했습니다. 사제들은
율법을 짓밟고 성전에 바쳐진 예물을 더럽혔습니다. 예언자들은
점쟁이나 마술쟁이로 타락했습니다. 백성들은 부모를 홀대했으며
이방인들, 과부와 고아들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비참한 유배생활이 종지부를 찍을 것이며,
산산이 파괴된 대한민국이 화려하게 재건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든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 백성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이신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께서
시의 적절하게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하셨습니다. 한국 천주교 안에도
엄연히 다양한 의견과 노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호소문을
발표하신 대주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큰 박수를 보냅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동시에 큰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우리 국민은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탄핵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갈등에 직면하였으며, 민심으로 위장하여 사법 근간을 흔드는
부끄러운 폭력의 민낯도 목격했습니다. 숱한 희생을 치르며 쌓아온
민주주의의 가치를 농락하는 악의 기운에 맞서 꿋꿋이 법 정의를
실현하려는 헌법재판소의 노고와 용기에 지지를 표명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헌법재판소가 법치주의의 건재를 입증하는 공정한 판결로
법치주의 실현과 민주주의의 도약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국정농단 청문회와 헌법재판소의 재판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번 사태가 꼭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나쁜 일만은 아니구나 하는 체험입니다. 치졸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압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미래만을
생각하며 목숨 바쳐 진리를 증언하신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유치하기가 하늘을 찌르고 안하무인도 그런 안하무인이 없는 뻔뻔스런
사람들의 폭언 앞에서도 조금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히 대응하신
판관님들의 의연한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대한민국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김희중 대주교님 말씀대로 “거짓 평화와 화해의 음모가 명명백백 밝히
드러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진정한 평화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더 이상의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고 정의와 평화를
건설하려는 식탁에 함께 앉아 진정한 일치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기를
촉구합니다.”
오늘 밤 주님께서 우리 민족들에게 주실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신의 본심, 당신의 간절한 마음을 우리
백성들에게 건네실 것입니다.
“내가 너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올리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를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에제키엘 예언서 37장 13~14절)
예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현존이 거룩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한 유배지 바빌로니아에도
지속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선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운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분명히 주님께서는 현존하고 계실 것입니다. 죄와 불행과 절망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고 인내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굽어보소서. 벼랑
끝에서 바치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저희 백성을 저 사악한 악의 무리로부터 구해주십시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사순 제1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3월10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 5,20ㄴ-26
3달 전입니다. 국회는 ‘국정농단’의 책임을 물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가결시켰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에 대한 심리를
하였습니다. 법적인 절차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인용할 수
있고, ‘탄핵’을 기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13년 전에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기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군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성당의 군종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성당은 부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영외에서
근무했습니다. 군 생활을 하신 분들은 영외에서 근무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성당에서 근무하니,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좋은 군종병을
3개월만 하고 부대로 복귀하였습니다. 군종 신부님께서 보시기에 저는
군종병으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군종신부님께서 저를 ‘탄핵’하셨고, 저는 그 결과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31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신부님께 무척
고맙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렸고,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모든 것들은 사실 전체 안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칙과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작은 티끌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물 한 컵에 있는 에너지로도 지구상의
모든 물을 증발 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친구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신부님께서 동창모임에서
제게 본당 사순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동창신부는 제게 이야기 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을 했고,
저에게도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된 것인데 저는 다른
동창들에게 친구의 잘못을 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친구도 사과를
하였고,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말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을 하는 본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험담과 비난을 받는 당사자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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