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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3월15일 수요일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수도회] 섬기고 기꺼이 내놓으며 사는 제자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18,18-20
† 복음 마태 20,17-28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는 실천적인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강력하게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막상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대 유다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전문적으로 율법을 연구하여 이를 해석해 주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들이 율법 학자들이지요. 그런데 이민족들이
침입하면서 유다인들의 종교심을 훼손하기 시작하자,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바리사이가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 학자들이 해석한
율법을 세밀히 지키려고 전력을 다했지요. 문제는 율법의 계명에만
집착하다 보니 그만 율법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는
점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바탕 위에서
주님을 흠숭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사람의 생명, 재산, 인격, 명예 등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율법의 목적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살도록 도와주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을 부당한
억압과 멍에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과시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때만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며, 그들을
돌봄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으로
2017년 가해 3월15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어서 그를 치자.>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8,18-20
복음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7-28
어렸을 때에 친구들과 종종 전쟁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나무젓가락으로
대충 총 모양으로 만들어서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했지요. 가짜
총이었지만 입으로 ‘탕탕탕’ 소리를 내면서 실감나게 하는
전쟁놀이였습니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기 때문에, 정면에서 만났을 때
먼저 입으로 총소리를 내면 나중에 쏜 사람은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유치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였습니다.
이렇게 전쟁놀이를 재미있게 해서 그럴까요? 당시에 커서 군인이
되겠다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때가 되면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적들을 용감하게 무찌르는 군인이 되겠다고
너도나도 말했지요. 저 역시 그러한 멋있는 군인이 되어서 적을
무찔러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었습니다.
이렇게 군인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실제로 군대에 가게
됩니다. 과연 어렸을 때의 소망을 이뤘다고 기뻐했을까요? 대부분이
군대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군 면제를 받은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고, 방위 판정을 받은 사람은 ‘사람의 아들’, 마지막으로
몸이 튼튼해서 군대에 가는 사람을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말하곤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에는 군대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막상 군대에 가야 할 때에는 군대 가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에는 전쟁을 전혀 모르지요. 그냥 전쟁은 하나의 신나는
놀이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군대 가는 것도 신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전쟁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유가 제약되는 군대에서의 삶이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군대 가는 것을 당연히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대하고 나서도 다시 군대에 가는
꿈을 꿀 때가 최악의 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의 어머니 역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라는 청을 했던 것이지요. 예수님 옆 자리를 차지하는
하늘나라야 말로 가장 신나는 자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영적식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청에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 역시 영적식별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먼저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음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청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청을 했다고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 참으로 많은 청을 합니다. 그런데 그 청이 과연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서 하는 것이었을까요? 혹시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청을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청이 올바른 것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잘 견디는 자가 무엇이든지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밀턴).
제베대오의 두 아들입니다.
사는 게 다 똑같아.
어떤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루에 5만~6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생각의 95퍼센트가
전날, 전날의 전날, 전날의 전날의 전날에 한 생각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사는 게 맨날 똑같아.”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대부분은 미래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똑같은 일만 반복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나의 과거는 나의 미래와 같지 않다.’
이 생각을 계속해서 잊지 않는다면 지금 현재를 아주 새로운 지금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가는 현재가 새로운 미래를
경험하는 나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나를 원하십니까? 과거에
매여서 맨날 똑같다는 말을 외치는 나를 원합니까? 아니면 새로운 삶을
감사하면서 신나게 지금을 사는 나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는 후자의 우리들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는 모습, 편하고 쉬운 것만을 따르는 모습을 계속해서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새롭게 주어지는 오늘을
신나게 맞이하고 살아보면 어떨까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참
기쁨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갑곶성지의 기념성당입니다.
저는 오늘 이곳을 떠나 부산에 강의다녀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섬기고 기꺼이 내놓으며 사는 제자의 삶
2017년 가해 3월15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 20,17-28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
섬기고 기꺼이 내놓으며 사는 제자의 삶
오늘의 말씀들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삶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죄와 불순종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멸을 선포합니다. 그는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두둔하기까지 했으나,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는 적들이 생기자
하느님 처사에 항의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의혹과 불만에도
끝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못나고 죄 많은 백성을 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께 다가올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0,21) 하고 청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냅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이들의 말에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20,24).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출세와 명예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한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0,26-27)
예수님 당대의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비민주적 전제와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고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벌어진
충격적이고 수치스런 사태도 국민에 의해 주어진 권력을 국민을
섬기는 데 쓰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데서 생긴 일이지요. 교회
안에서도 그런 모습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본질은 사랑이요,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사이에서 높고 낮음의 유일한 기준은 누가 더
사랑이 많은가, 더 섬기려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참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더 작아지고 더 낮추어
서로를 섬길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목숨까지도 내놓을 줄
알아야겠지요. 참 봉사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사람입니다(20,28). 자신 전부를 그것도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사랑 없인 불가능하겠지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낮은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을 섬겨야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이루고 어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여도 다른 이들과 이 세상을 섬기는 사랑의 봉사자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네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섬기되 사랑으로 섬길 뿐 아니라 조건과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목숨까지도 내놓으며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길은 시련과 고통이 따르는 길이지요.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나
예수님처럼 오직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순종으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권위는 사랑과 섬김에서 나온다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3월15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20,17-28: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어 왔지만, 주님의
기적을 보고도,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것을 듣는
것 자체가 괴로운 말씀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분이 행하신 무수한
기적들을 보았는데, 이런 분이 고난을 당하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아가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이 자리는 분명히 두
아들들이 원하는 것인데 그들은 어머니를 내세워 대신 청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며,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인데, 이 순간에 아직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 더욱 서운하셨을 것이다.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복음에서는 잔과
세례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지만,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수님께 잔은
수난이었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당했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들이 고백자이다. 실로
주님의 잔을 마시기는 했어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22절) 그들은 시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전쟁놀이가 재미있다. 그 잔의
의미를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잔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수난의
괴로움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10,39-40) 이 말씀은
거절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불쾌했다고
한다. 모든 사도들이 세속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사이에 형제애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희망을 가지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의 예를 드시면서 그들과 같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이 하느님 안에 능력 있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다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8절)고 하셨다.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사순 제2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3월15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 20,17-28)
예전에 ‘본당 신부의 5가지 유형’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보좌 신부로 있으면서 일곱 분의 본당 신부님과 지냈습니다.
처음 함께 하셨던 신부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방에도 기도 방이 따로
있으셨고, 시간이 나시면 성당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본당의 모든 일은
사목위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맡겨 주셨습니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강론으로 신자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목위원들도
신부님을 존경하였고, 순풍에 돛을 달듯이 함께 했던 2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보좌신부들을 믿어주셨고, 말씀만 드리면 새벽미사도
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이셨습니다. 중요한 일은 먼저
상임위원들과 상의를 하셨습니다. 수녀님들의 자리도 존중해
주셨습니다. 수녀님은 어머니처럼 신자들과 함께 지냈고, 성경공부도
함께 하였습니다. 식사를 한 후에, 본당 신부님과 함께 산책을
하였습니다. 성당 주변을 걸어가면서 신자분들을 만났고,
좋아하셨습니다. 저도 본당 신부가 되어서 보좌 신부가 오면 함께
산책을 하였습니다. 교우들이 하는 가게도 소개해 주었고, 동네의
맛집도 알려 주었습니다.
세 번째 신부님은 열정이 대단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열정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사목위원, 수녀님, 보좌신부는 그분의 열정과
박식함을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본당을 신축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주택을 얻어서 본당 신부님과 방을 마주보면서 2년을 살았습니다. 저도
힘들었지만 본당 신부님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일을
신부님께서 주도하시기 때문에 일하기는 편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늘 피곤해 보이셨고, 새벽에 일어나시는 것을 힘들어 하셨습니다.
네 번째 신부님은 아주 규칙적이셨습니다. 정해진 시간이면 산책을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산책을 하시면 대략 시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을 늘 가까이 하셨고, 제게도 좋은 책을 많이 권해 주셨습니다.
사제는 늘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하셨고, 신부님 덕분에 저도 책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전해 주시고 싶은 것이 많으셨는지 강론도
길었고, 간단한 질문에도 긴 시간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제는 본당 재정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고, 사제는 본인의
재정도 현명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신부님은 과묵하셨습니다. 사목에 대한 결정도 아주
신중하셨습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약간 답답했지만 신부님의
과묵함은 사목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주간의
긴 독서도 모두 노래로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신자들도 힘들어 했지만
나중에는 전례의 의미를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배는 분명 노를
저어야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는 방향을 정확하게 정해야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습니다.
신부님들께서는 성격과 사목의 방법은 다르셨지만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름대로 본당 사목을 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습니다.
전임 신부님의 사목 방침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6개월은
지켜보는 것입니다.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전임
신부님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구에 230개의 본당이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사목 방침에
따라서 열심히 생활할 것입니다. 중요한 덕목은 믿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적인 사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제들이 2000년 동안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영광과 기쁨, 명예와
권능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만을
따를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5처와 6처’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5처에서
우리는 길을 가던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것을
묵상합니다. 6처에서 우리는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것을 묵상합니다. 사제들이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면, 시몬과 베로니카의 삶을 따라갈 수 있다면,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본당 공동체는 주님의 사랑이 가득할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본의 아니게 남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형들이 있는데도 늙으신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가 있습니다. 전날 술을 많이 먹어서 출근하지 못한 동료의 일을
대신하는 분도 있습니다. 내가 준비한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쁘게 받아들이면 나에게 도움이 되지만
마음에 앙금이 있으면 하면서도 짜증이 나고, 괴롭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기 때문에 우리는 2000년 동안 시몬을
생각하고, 시몬의 희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누군가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무엇을 원하느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3월15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20,17-28)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 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을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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