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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3월16일 목요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수도회] 가난한 이 되어 사랑으로 품고 나누는 축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17,5-10
† 복음 루카 16,19-31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반대로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지요.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지만,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이 부자라는 이유로 벌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의 죄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생전에 그 가련한 라자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요. 물론 그가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남의 어려움을 외면한 이기적인 사람을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 이런 외적인
상태보다도 ‘얼마나 마음이 풍요로우냐?’ 이 점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복음에 나오는 그 부자는 오늘날 누구인가?’ 이 점을 오늘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재산이 많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이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복음의 부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이웃과 거리를 두게 마련입니다.
이웃과의 사이에 스스로 구덩이를 파는 것이지요. 이 구덩이가 점점
크고 깊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이웃은 물론이고, 하느님께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때가 더 늦기
전에 나눔과 배려의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위한 사랑의 실천
2017년 가해 3월16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얼마 전에 신부님들과 만나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소화를 시킬 겸해서 당구 한 게임을 하자고 하더군요. 솔직히 저는
일찍부터 당구를 쳤었기 때문에 소위 ‘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높은 점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당구 자체에
재미를 잃었고 그러다보니 당구를 쳐도 이기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상대방이 빨리 이겨서
얼른 끝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당구를 치는 저는
재미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 순간이 즐겁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때에 분명히 기쁨과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지금에 충실하기보다는 과거에 대해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정작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지요.
“귀하의 감동적인 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지면에는
어울리지 않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쉰(50)이었습니다. 이제는 틀렸다고 나이가 너무
많다고, 나의 재능을 더 키우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 포기하기
쉬운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시를
계속해서 수정해나갔고, 계속해서 시를 써서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로부터 19년 뒤에, 거의 일흔의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헤세’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데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두었고 행복을 찾았던
그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유명한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던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반대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 힘들게 살아왔던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자가 죽어서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이 세상에서
온갖 나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면 불쌍한 라자로를 외면했다는 것이지요.
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은 호화로운 삶이 아니라,
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나중에 기회 될 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 그래서 내 자신을 드러내는 호화로운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알아주는 삶인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지금 행하는 이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를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삶을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몰입하면 모든 것이 축복이다(허허당).
헤르만 헤세.
의미 있는 일
수도원에서 접시 정리 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수녀님이 계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늘 불만이 많았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거룩한 일을 할 줄 알았는데 겨우 접시 정리나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
수녀님께서 다가와 물으십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십니까?”
수녀님께서는 퉁명스럽게 “딱히 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원장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군요.”
바로 그 순간, 수녀님께서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커다란 일을 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것이지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비록 작고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보낼 수 있습니다.
접시를 사용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거나 수도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었지요. 단순한 일도 마음을 담으면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란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일 자체에 마음을 담아 의미 있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내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부산에 가기 위해 오랜만에 KTX를 탔습니다. KTX 플랫폼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가난한 이 되어 사랑으로 품고 나누는 축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3월16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 17,5-10; 루카 16,19-31(17.3.16)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가난한 이 되어 사랑으로 품고 나누는 축복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17,9)라고
탄식합니다.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유다의 지도자들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백성들의 ‘완고하고 반역하는 마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예레미야는 세속의 힘을 믿고 사람에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주님에게서 떠나 있어 저주를 받게 된다고
지적합니다(17,5). 주님에게서 떠난 사람은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고,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17,6). 결국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입니다(17,7).
오늘 복음의 예화에 나오는 부자는 노동자 하루 품삯의 3-4000배에
이르는 값비싼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며 살았습니다(루카 16,19). 그런데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라자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라자로는 그 부잣집 문간에서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다가 식탁에서 손을 닦고 버린 빵조각으로
겨우 배를 채웠습니다. 그는 상처를 핥으러 오는 개조차 물리칠 힘이
없었지요.
그런데 죽어서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으나, 부자는 저승에
가서 불길 속에 극도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왜 이들의 처지가 죽은
뒤에 뒤바뀌었을까요? 부자의 죄는 부유함 자체가 아니라 남을
거들떠보지 않는 냉혹함이었습니다. 부자는 생전에 가난한 라자로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자비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하느님을 신뢰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재물과 자신의 부귀영화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극도의 비참과 가난한 처지에서 오직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했던 라자로와 달리 부자는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겨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예레 17,5)
오늘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새겼으면 합니다. 하나는 삶의 중심과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이
지닌 재물과 그 부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현세의 힘에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같은 의로움이
아니라 그 중심과 방향을 하느님께 두는 가난을 통해서만 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겨야 할 다른 하나는 시선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자신이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몰두하게 되지요. 바쁜 일상을
그렇게 살면서 주변을 둘러보지 못합니다. 자주 멈춰 가까이 있는
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한숨소리, 외로움과 소외감, 억울함과
비참함을 향하여 눈길을 돌리고, 다가가 함께해야만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우상에 빠지지 않으며,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만을 갈망하는
가난한 발걸음이었으면 합니다. 따뜻한 사랑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나눔으로써 더불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무는
우리가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부자와 라자로의 교훈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3월16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루가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교만이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어서 그를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것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짐승들은 아픈 데를 혀로 핥아 고통을 가라앉히고 상처를 낫게
한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귀결이라고 하신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25절)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6절)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 같은 것을 파고 마는 것이다.
그분은 부요함을 고통으로, 가난은 원기 회복으로, 자주색 옷은 불길로,
헐벗음은 기쁨으로 돌려주셨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라는 말씀은 원칙이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의 탄원을 무시하신 것도 그가
땅에서 가난한 이의 탄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부자는 살아있을
때에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이런
사람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이며,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고 대답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 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3월16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 16,19-31
국민연금, 의료보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해서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정해진 때가 되면 일정한 금액을 매달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의료보험은 아플 때 병원비에 대한 부담을 가볍게 해
주고 있습니다. 자동차 보험은 소멸성이지만 사고가 났을 때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이런 연금과 보험은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해서, 만인은
한 사람을 위해서’ 서로 도움을 주려는 정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족과 정부가 다 할 수 없는 도움을 개인이 서로 연대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입니다. 최근에 많은 분들이 가입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장례가 났을 때 도움을 주는 상조입니다. 저도 평화상조에 가입을
했고, 아버님께서 하느님 품으로 가셨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사순시기 담화문에서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연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료보험료를
지급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런 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준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듯이, 우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알고 잘 도와 드리고,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몇 년째 아파서 누워계시는 가족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직장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자녀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3수를 하는 아들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원망하고, 무시하고, 짐으로 여기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무척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감싸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오늘의 복음 환호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자로는
현실의 삶에서는 병들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현실의 삶에서는 부유하게,
편안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부자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재물의 십일조,
노력의 십일조, 봉사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코 내가 가진 것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결코
썩거나 상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곳간에 우리의 마음을 쌓아 놓는
것입니다.
‘두려워 마시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근심과 걱정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이 사람이 이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그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조상의 죄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본인의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술과 담배로 찌들어가던 한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가니,
간경화라고 하였습니다. 의사는 아내에게 6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아내와 본당의 구역에서 함께 기도하였고,
어느 날 하느님을 믿으면 나을 것이라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의 간경화는 기적처럼 치유되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고난과 고통 중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모두 고난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천국을 생각하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3월16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루카16,19-31)
천국을 생각하면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름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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