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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질병, 고독. 노인의 3고라는 말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그 세 가지 고통 중에서도 경중을 따져보라면, 우리는 아마도 고독을 가장 나중에 손꼽지 않을까요?
그러나 어찌 보면 그런 시선 때문에 고독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숨어들고 더 깊어지는 듯도 합니다.
오늘 사연 속의 노인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건강에도 아직은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자를 떠나보낸 후, 남자로서 겪는 고독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젊은 자식들은 그의 고독을 몰라줍니다. 한편 약은 세상은 그의 고독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그는 의심과 분노만 커져갑니다.
과연 동반자를 잃은 노인의 여생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최소한의 인간적인 욕망을 해결하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또한 그 분의 자식으로서 그분의 여생을 지켜드리는 최선의 방책은 무엇일까요?
젊어서 오히려 현실적인 자식들의 눈에는, 그저 분별을 잃은 노인으로만 비치는 아버지. 무엇이 최선의 길일까요?
도우미아줌마와 재혼하신다는 일흔의 친정 아버지.
외로움에 분별을 잃으신 거 아닌지......
저는 삼십대 후반으로 직장에 다니며 딸 하나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 고민은 직장생활이나, 육아문제가 아니고, 올해 일흔 되신 친정 아버지에 관한 일입니다.
구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혼자 되셨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곧 결혼하게 되면서 아버지 곁을 떠났죠.
그러나 혼자 계신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저는 되도록 친정집 근처에 신혼집을 구하려고 애를 썼고 아버지는 또 그게 고맙고 미안하셨는지, 저희에게 지금의 집을 얻어주셨어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소유의 집에 들어와 살게 해주셨죠.
솔직히 말해서 저희 아버지가 재산이 꽤 많으세요.
그래서 그런지 두 오빠 사이에도 신경전이 좀 있는 걸로 압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피해의식 같은 게 좀 있으세요. 올케 언니들이 잘해드려도 그걸 진심으로 안 받아들이시더군요.
어쨌거나 지난 몇 년간 저의 친정은 안정적인 구도로 잘(?) 지내왔습니다.
아무래도 가까이 사는 제가 아버지를 자주 만나게 되고, 오빠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며 지내왔죠.
살림은 큰올케 언니가 구해준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했고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 노인 혼자 살아가시는 게 얼마나 적적할까 신경이 쓰였지만, 아버지가 워낙 그런 내색이 없으시고, 언제나 괜찮다고만 하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자식들도 차츰 무뎌져가더군요.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고 또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으시니까, 솔직히 우리 아버지 안됐다는 생각은 들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갑자기 아버지가 아줌마를 그만 나오시라고 했다는 겁니다.
큰 올케가 놀라서 여쭤보니 이젠 혼자 살림하시겠다고 하시더라는군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씀을 듣고 언니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그만두는 아줌마의 말은 좀 달랐답니다.
아무래도 영감님이 만나는 분이 있으시고, 그 여자분이 집에도 드나드는 눈치라고 귀띔을 해주더라네요.
올케 언니의 부탁을 받고 제가 아버지께 웃으면서 넌지시 여쭤봤어요.
좋은 분이 있으시면 얼른 저도 소개해달라고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어렵게 말씀을 꺼내시는데, 말씀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상대가 우리 딸아이를 4년 동안 봐주신 우리집 ‘이모’였어요.
4년 동안을 가족같이 지냈고, 우리 딸이 친이모처럼 따르던 분인데 그 분이 몇 달 전에 갑자기 그만두신다고 해서 우리집이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이유가 제 아버지였던 셈입니다.
두 분을 서로 소개한 사람은 당연히 저입니다. 우리집에서 우연히 같이 식사하신 적도 몇 번 있었죠.
그러나 그분과 제 아버지를 연결해서는 어떠한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아니할 말로 나란히 세워놓고 도무지 그림이 안 나오는 분들이었거든요.
연령만해도, 그분이 오십대 후반쯤이니 아버지와는 십오년 차이, 더구나 외모로만 봐서는 부녀간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처지도 그래요. 아직 학생인 딸, 취직 준비중인 아들과 함께 산다고 했고, 혼잣몸으로 그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했거든요. 살아온 삶이나, 배경이 천양지차인 것은 다 접어두고라도 말입니다.
아버지는 저한테 이해를 구하셨어요. 당황스럽겠지만, 외로운 늙은이들끼리 그럴 수도 있나보다 하고 대범하게 넘어가달라고요. 그리고 오빠들에게는 직접 알리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조마조마하고도 넋이 나간 정신으로 그러고 있는데, 며칠 뒤 오빠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가 정식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계시던데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고는 있느냐고요.
원망조로 따지기에 저도 기가 막혔지만 아는 대로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쉰 여섯 살쯤에, 대학생원생 딸, 취직준비중인 아들이 있고 남편과는 십여 년 전에 사별한 분이라고만 알고 있다고요.
4년을 봐왔지만 이번 일 말고는 딱히 문제될 일이 없었다고요.
올케들은 내게 정말로 아무런 눈치를 못 챘었느냐며, 마치 저까지 의심하는 듯이 묻는데, 저도 제일 답답한 게 그 부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제 딸아이가 낮에 할아버지가 다녀갔다고 한 적은 몇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너무 무료해서 손녀딸 재롱을 보러 오신 줄만 알았었거든요. 그리고 아줌마한테 미안하게 생각하고 양해까지 구했었죠.
오빠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보나마나 재산을 노리는 꽃뱀이라는 겁니다. 그런 여자를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나중에 아버지가 받을 상처와 모욕감 때문에라도 반대라고요.
그러나 그 아주머니를 오래 겪어본 저로서는 뭐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어요. 궁색하게 살아도 돈 앞에 자존심은 좀 있으시다는 느낌을 늘 받았거든요. 우리가 그렇게 의지를 하는데, 급여 문제로 한 번도 배짱을 부린 적이 없으셔서 저는 ‘참 법 없이도 살 분’이구나 했었지요.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근거가 되고, 위안이 될까요? 저를 감쪽같이 속이고 아버지 집에까지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저도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친정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오빠들 올케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정식으로 반대의견을 냈습니다. 그동안 아버님 외롭고 쓸쓸하신 심정 알아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아버지한테 어울릴 만한 분으로 저희가 새어머니감을 찾을 테니 그런 여자 가까이 안 하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역정을 내시더군요. 그런 여자가 어떤 여자냐고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괜한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나중에는 언성도 높이셨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있었느냐고, 당장 집으로 가라고요.
결국 올케언니들이 저한테 중재를 부탁해왔습니다. 그 아주머니에게 제안을 해달라는 거죠. 결혼까지는 자식들이 받아들이기가 너무 부담스러우니, 지금 아버지 사시는 집을 받으시는 조건으로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지내시면 어떻겠느냐고요.
내키지 않았지만 전화를 걸었고 아주머니를 따로 만났습니다. 아주머니는 올 게 왔다는 식이더군요. 그리고는 내내 그저 미안하게 되었다, 이해해달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일관되게 그 말만 하는데 이상하게 저도 좀 화가 나더군요. 작심하고 오빠들 제안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한참 침묵한 끝에 내놓은 대답은 거절이었습니다. 어린 자식들 보기에 떳떳하지 않은 생활은 안 하고 싶다네요. 무엇을 바라고 ** 할아버지를 만난 게 아닌데, ** 엄마까지 이렇게 나오면 너무 억울하고 서운하다고요.
오빠들은 그 여자가 제안을 거절한 것만 봐도 목적이 확인됐다는 주장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계속 쓸데없는 관심은 끊어달라고 하시고, 자식들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십니다. 올케언니들은, 아버님 저러다 덜컥 저지르고 보면 어쩌느냐며, 당분간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고 하고요.
저는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하필이면 우리집 아줌마인 것이 남부끄럽고 민망한 한편, 저까지 원망하고 의심하는 듯한 오빠 내외의 태도가 분하기도 합니다. 부리던 사람을 어머니로 부를 일도 기막히지만, 남편한테는 또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만일의 경우 재산분배 문제가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막내딸인 제가 이런데, 마흔 중반 두 오빠의 입장은 어떻겠어요?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끝에는 그냥 아버지 편이 돼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진심이든 계산속이든, 아버지 생전에 마냥 행복하시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돌아가신 뒤에야 배신을 당하든, 난리가 나든, 소송이 붙든 아버지는 모르실 테니까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차이가 지고, 말이 많은 재혼, 결말이 아름다운 경우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