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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4월12일 수요일 [(자) 성주간 수요일]
[수도회] 배신과 불의와 거짓을 구원하는 십자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50,4-9ㄴ
† 복음 마태 26,14-25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을 안타까워하시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계획 안에서 유다의 삶과 그 종말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의로써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지만 인간은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빈부귀천을 떠나 누구든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과 수난을 겪으시면서도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세속적인 욕심에 따라 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자주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구원 계획과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앞서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끝까지 예수님의 자비를
간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열려 있는 마음을 간직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악과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손과 자유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지혜가 우리 영혼에 가득 차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자신의 능력과 힘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2017년 가해 4월12일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ㄴ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종종 해외로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그런데 순례자 중에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먹지 않았던 외국 음식이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상한 냄새가 난다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또 맛도
아주 좋은데 말이지요. 이런 분들은 순례 기간 동안의 시간이 쉽지
않습니다. 낯선 환경과 또한 잠자리 역시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면서 ‘별 것도 아닌 것에 왜 이렇게 신경을
쓰시지? 조금만 참으면 서로가 좋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니까 이러한 분들이 바로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러한 민감함을 이겨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민감함이 안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창의력, 통찰력, 열정을 보여준 사람들이 바로 매우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즉, 민감함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민감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전체의 약 20% 가까이 되는데,
이 중에서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발견해서 발휘하는 사람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저 자신의 민감함에 부정적인 생각을 더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스로를 탓하는 부정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능력과 힘을 주셨지만, 이를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과 힘만을
부러워하면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정작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보게 됩니다.
우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단순히 팔아넘기는 역할에
담당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이 자질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잘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물질적인 욕심, 주님께 대한
부정적인 마음들이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넘겨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힘을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이 받은 능력과 힘만을 부러워한다면 또한 이를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방향으로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앞선 유다 이스카리옷의 전철을 따라 주님을 반대하고
세상에 팔아넘기는 엄청난 행동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거룩한 성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
(몽테뉴).
요즘에 쭈꾸미철이라고 하네요.
몸을 움직이세요.
종종 어르신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자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별로 없어요.”
나이가 들면 정말로 세상에 즐거운 일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이에 따라서 즐거운 일이 차등적으로 부여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서 짜증과 걱정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슬픔과 불안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감정은 나이가 들수록 부정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이를 연구한 한 학자는 이 감정 자체가 육체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몸이 건강할수록 좋은 감정이 생기고 몸이 병들수록 부정적인
감정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무조건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근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슬프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신체를 자극해서 그 감정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우선은 몸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시간이 될 때마다 자전거를 탑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배신과 불의와 거짓을 구원하는 십자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4월12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 26,14-25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마태 26,22)
배신과 불의와 거짓을 구원하는 십자가
오늘 복음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배반한 사실을 전해줍니다.
그는 예수님과 줄곧 함께하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행적을
목격하면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익혀왔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의
깊은 친밀감과 유대감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겨우 황소에
치어 죽은 종에 대한 보상금인, 은전 서른 닢에 그분을 팔아넘겨
버립니다(탈출 21,32). 그것도 제 발로 수석사제들을 찾아가서
말입니다.
유다도 처음부터 배신하려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세상, 거룩함과 인간적 탐욕과 성공 사이에서, 오랜 동안 양심의 치열한
줄다리기를 하다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겠지요. 그는 욕망과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 생긴 틈 때문에, 스승의 모습에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허상에 속고 만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회상하며 감사하고, 우정과 평화와
확고한 동지애를 드러내는 식탁에 앉았던 배반자의 죄악이 극에
이릅니다. 유다는 예수님은 물론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도
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때가 다가왔음을 아시고(26,18),
가장 친밀하게 함께 지내던 제자의 손에 의해, ‘철저한 무력함’에
내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낯선 사람의 집에 가족들도 없이, 열두 제자와 마지막
축제의 식사를 하시며,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6,21) 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6,22) 하고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
탓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주님, 제 잘못과 사랑
부족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만 아니길 바라며
걱정하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6,24)라며,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제자의 배신을 아셨음에도
(요한 13,27 참조), 그 배신을 받아들이십니다. 그 어떤 질타도 비난도
문책도 하지 않으신 채, 배신을 더 큰 자비와 선으로 받아 삼키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유다의
죄악을 폭로하시고 무력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가치를 더 중요시 여기지는 않습니까?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슬그머니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권탄압이나 부패한 권력, 자본가의 탐욕에 침묵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가야할 길은 배신과 불의, 거짓과 폭력, 부패와
불평등에 하느님의 자비와 더 큰 선으로 맞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반문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유다처럼 예수님을 자신의
경험과 돈으로 저울질하고, 자기 생각의 틀 안에 가두며, 집단적
이기주의의 도구로 삼으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늘 자신을
살피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나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지 않은지
살필 일입니다.
주님, 오늘 제 안에 있는 당신과의 거리를 알아차리게 하시어, 하찮은
은전 서른 닢에 당신을 팔아넘기는 배신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자비롭지도 정의롭지도 못하고, 가난하지도 너그럽지도 못한 제 자신을
먼저 살피며,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 묻는 무책임한 제가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오히려 세상 불의와 거짓, 배신과 무자비를
당신의 자비로 품어 소생시키는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걷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유다의 배반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4월12일 성주간 수요일: 유다의 배반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없애려 하는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15절)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고 그때부터 유다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그 적당한 기회란 “군중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루카 22,6)고 하는 때였다. 유다는 바로
최후의 만찬 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 혼자 계실 때 그 일을
했다. 진리의 말씀이 배반당하는 시간은 그분 곁에 충실한 지지자들이
거의 없는 바로 그 때이다.
“무교절 첫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17절) “무교절 첫날”은 파스카 축제
전날이고 그날을 마르코는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
(마르 14,12)이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시는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파스카 만찬을 나눌만한
집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인 재산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개”라는 사람을 찾아가 그 집에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18절) 그 아무개는 마르코와 루카가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마르 14,13; 루카 22,10)이며,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인 첫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제자들은
“이미 자리를 깔아 놓은 큰 이층 방”(마르 14,15)에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우리 자신도 이제는 주님을 위해 손님방을 마련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만찬 전에 그분은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고 하시며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견디기 힘든 혼란에 빠졌다. 요한은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요한 13,22)라고 한다. 제자들은 자신에 관하여 묻고 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이 근심을 없애주시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3절)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근심에서 구해 주고자
결정하셨을 때, 유다의 정체를 밝히신다. 유다는 시간을 주었지만 변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4절) 유다는
악마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이 불행은 유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넘겨지신 것은
악마 때문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도구가 된 자들도 불행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하자 유다도
양심에 찔렸을까?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5절) 하고
묻는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했고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한다.
주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을 배반한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25절)고 하시며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다를 책망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빛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리는 말이다. 어둔
밤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내가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분께 나를 따르라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면서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4월12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26,14-25)
매일 이곳을 통해서 강론을 함께 했습니다. 보름정도 강론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 성지순례를 가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30일부터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성지순례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기억나는 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의 문에 있는 글입니다. ‘여러분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떠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떠나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여행객으로 이 세상에 왔지만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순례자로 이 세상을 살다가 신앙의 별이 되는 것입니다.
사순특강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과 형제님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제게 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26년 전 제가
그분들의 아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사진에는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건강한 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삶의 작은 인연일
뿐인데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희망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할 자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여섯 번째 말씀은 ‘아버지,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성가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본인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존심,
편견, 욕심, 교만’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면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번째 말씀은 ‘어머니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입니다.’였습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성모님과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제자를 부탁하였고, 제자에게는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셨고,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유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재물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저는 아니겠지요?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4월12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26,14-25)
저는 아니겠지요?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입니다.
"혀로 예수님을 팔지 마십시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짓을 합니다. 서로 험담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험담할 때 그 사람은 하나의 물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유다가 한 짓입니다. 험담할 때,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길
때에 바로 유다가 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유다는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이해심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우정이 없었어요. 우리도 역시 남들에 대해
쓸데 없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으며 모든 것이
시장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친구와 친지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합시다. 친구에게 용서를 청하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껍질을 벗기지 말고, 아무도 험담하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어떤
사람에게 결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입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를 위해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그를
도와주십시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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