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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4월28일 금요일 [(백)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수도회] 있는 그대로를 나누는 생명의 기적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5,34-42
† 복음 요한 6,1-15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웠을 때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빵의 기적으로 최후 만찬을 통해 이루어질 성체성사를
미리 보여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에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든지 시간이 없어 하느님께 기도할 여유가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외진 곳까지 찾아간 군중은 자기가 처한
어려움에도 용기 있게 하느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하느님께서 쓰시도록 맡기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은총을
받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성만 있으면 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먹이고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굶주리지 않게 먹이실 뿐 아니라 차고 넘치게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군중이 먹고 남긴 열두 광주리의 빵 조각은 풍요로운 은총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적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은
결코 굶주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슴 벅찬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풀밭에 자리 잡은 군중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 풀밭에 우리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자.”
2017년 가해 4월28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인도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계셨을 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성녀께서 계신 인도 캘커타를
방문했습니다. 성녀께서 길가에 쓰러진 병자들을 정성껏 간호하며,
가난하고 실의에 빠져 살다가 가는 사람들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주는
모습을 직접 본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녀님, 백만 파운드를 준다고 해도 저는 못하겠어요.”
그러자 성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자신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고, 성녀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을 벗어나는 삶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많은 군중이 따랐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기적에 이끌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자리가 얼마나
시끄럽고 복잡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환호하는 그 장면에 서 있는 제자들은 나름 어깨가 으쓱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의 제자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많은 사람들로 인해 시끄럽고 복잡했지만
행복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소란스러움을 떠나 제자들만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십니다.
기적과 같은 표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지요. 뒤이어 나오는
빵의 기적 역시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군중들이 빵의
기적을 보고는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는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이는 영광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심을 갖게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고 존경과 사랑 속에 살고만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끄럽고 복잡한 삶의 한 가운데에 있고
싶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자.”
이 조용한 곳은 세상의 관점을 따르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주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착한 아들을 원하면 좋은 아빠가 되고, 좋은 아빠를 원하면 좋은 아들이
되어야겠지. 세상을 바꾸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자신을 바꾸는 거야.
(A.G.로엠메르스)
성녀 마더 데레사의 삶을 기억하고 함께 동참하면 어떨까요?
망하면 됩니다.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가정방문을 했던 적이 떠올려집니다. 이
집안은 유난히 화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님과 자녀와의 관계가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인 형제님에게
물었지요.
“가족이 너무나 화목해 보여요. 형제님께서 정말로 잘 하시나봅니다.
그 비결이 뭐에요?”
그러자 형제님께서는 웃으면서 “신부님, 망하면 돼요.”라는 것입니다.
망하면 된다면 말에 의아해하고 있으니 형제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사업을 크게 확장을 하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단칸방으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단칸방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족 간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자기
방을 가지고 있고 또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는데,
이때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잘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단칸방에서의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그동안 잊고 살던 소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형제님의 말씀이 참으로 인상 깊었지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더 큰 선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참고로 하버드대학 캐서린 스노우 박사 팀 연구에 따르면 만 3세
어린이가 책 읽기를 통해 학습하는 언어는 140개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과 밥을 먹으며 대화할 때에는 1,000여 개의 단어를
배운다고 하네요.
자녀의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이 많으시죠?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요? 좋은 학원을 보내는 것에 신경 쓰기보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더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새롭게 열은 갑곶성지의 상설 전시장입니다.5월 1일부터 첫 전시가
시작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있는 그대로를 나누는 생명의 기적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4월28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1-15(17.4.28)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있는 그대로를 나누는 생명의 기적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본 많은 군중이,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6,1-2). 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와 기대를 채워줄 수
있는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6,5-6).
이에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6,7)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사랑의
마음 대신 현실적인 계산력을 발동시킵니다. 한편 안드레아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지만, 그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합니다(6,9).
두 제자 모두 눈앞의 현상의 매여,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과 생선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6,11), 친히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먹던
보잘것없는 빵이, 많은 군중의 허기를 채워주는 생명의 양식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지닌 보잘것없는 보리빵과 물고기에
담긴 위대한 생명의 가치를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기적적으로 빵의 양을 늘리신 것이 아니라, 각자가 지니고 있던 것을
서로 나누는 ‘사랑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6,27)이신 예수께서는, 가난 가운데서도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연대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와 돈의 우상을 좇는 구조적 악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차별과 불평등, 빈곤과 소외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의 증인인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공감하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의 모두를 내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비록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기꺼이
나누어야겠습니다.
자신의 세계와 욕심에 갇혀 세상 재물과 현상, 인간의 업적에 휘둘리지
말고, 세상의 불의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눈을 돌리고
발길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이익과 안위에 집착하는 폐쇄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하느님의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소유를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 가족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을 으뜸가는 사명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소유에 매이면
소유하려는 대상의 노예가 되기 마련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돈을 닮게
되고, 음식을 탐하면 육적인 본능과 감각만이 발달하게 되겠지요.
하느님의 사람들은 소유에서 해방되어 어떻게 사랑으로 함께 있을지를
늘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연대는 현세 물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다
하여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의 시간과 재능을 오직 ‘사랑 때문에’
‘함께하기 위하여’ 다가가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세상적인 계산이나 잣대가 끼어들 틈이 없으며, 오직 사랑만이
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재현해야 할 생명의 기적이
아닐까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4월28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 12)
버릴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할 빵의 조각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모으고 나누는 가장 살아있는 빵의 삶이었습니다.
흩어진 것을 모으는 삶이 바로 구원의 삶입니다.
구원의 순간은 바로 지금 이순간입니다.
빵의 삶또한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구원을 모르고 살아가는 제삶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숨결을 모으니 감사 또 감사뿐입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하느님밖에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남은 것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구원은 빵이 되는 빵의 삶입니다.
이 부활시기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묻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눔을 모으니 또다른 나눔이 되어 열두 광주리 가득차 오릅니다.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나누고 감사해야 할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 (요한 6, 10)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4월28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복음: 요한 6,1-15: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르침보다 기적에
더 마음이 끌렸다. 기적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신다.
산에 오르시는 것은 우리에게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홀로 산으로
가신 적이 많다.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하셨다. 하느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는 모든 장애물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지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고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고
말한다. 여기서 보리빵 다섯 개는 모세오경, 즉 율법 전체를 나타내고
물고기 두 마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쓴 신약성경을 나타낸다. 즉
사도들의 설교와 복음사가들의 선포가 그것이다. 그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음식이 되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10절)고 하신다. 이때는 바로 파스카가 가까운 때임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그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자들에 이어
복음의 빵이 되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가 나누어진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루카 6,38)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 주시리라 기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14절)라고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기도를 바쳐 백성을
먹였듯이 그분께서 광야에서 자신들을 먹여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모세의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나와 같은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고, 물 위를 걸을 예언자고(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 가셨다. 예수님은 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는 그래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청주] 내어놓을 빵과 물고기|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4월28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요한6,1-15)
내어 놓을 빵과 물고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 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신명18,15).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으로 부터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 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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