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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1일 월요일 [(백) 노동자 성 요셉 기념 미사]
[수도회] 예수님이 계시는 호수 건너편에서 찾는 행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1,26─2,3
† 복음 마태 13,54-58
◈ 오늘의 묵상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손수 만드시고, “보시니 ……
참 좋았다.”고 전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모습과 비슷하게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다스리시는 당신의 권한을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쉼터로 창조된 세상은 이제 하느님
손에서 우리 손으로 넘겨져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에게 공동의 집으로 내어 주신 이 세상을 돌보아야
할 소명에 대해 말하면서, 이 세상이 결코 우리가 남용하고, 지배하며,
훼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이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소중하며, 따라서 내 이웃은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편견과 오해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미움과 불신의 벽이 세워집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태초의 손길을
외면합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왜곡된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시고자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외면하고, 자신들보다 뛰어난 능력과 기적의 힘을 지닌 예수님을
한낱 ‘목수의 아들’, 자신들과 별 차이 없이 살아온 ‘동네 사람’으로
낮잡아 봅니다. 예언자가 유독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능력을 외면하고,
인간의 잣대로 세상을 평가하는 우리의 죄를 일깨워 줍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노동자 성 요셉
2017년 가해 5월1일 월요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 미사
제1독서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6─2,3<또는 콜로 3,14-15.17.23-24>
복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저는 책을 많이 구입합니다. 구입한 책을 다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책을 구입해야 어떻게든 읽게 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책을
직접 사서 읽습니다. 얼마 전에도 인터넷 서점을 이용해서 책을
검색해서 읽고 싶은 책들을 주문했습니다. 다음 날 주문했던 책이
배달되어 왔는데, 여러 권의 책 중에서 한 권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기대와 달리 별로 유익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문한 책 중에서
너무나도 얇고 조그만 책 한 권이 있는 것입니다. 주문 목록을 보니
제가 주문한 것이 맞습니다. 10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고 책의
크기도 일반적인 책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미니북인데 가격은 다른
책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모두
읽고서는 잘 구입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조그만 책이고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이 책을 통해서 참 많은 것들을 얻을 수가
있었고 많은 여운을 제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책 겉장만으로 그 책의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만을 보고서 얼마나
쉽게 판단하고 있을까요? 그 사람이 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판단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노동자 성 요셉’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요셉 성인은
특별한 기적도 없었고, 믿음이 드러나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예수님과 성모님 뒤에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실하지만 극히 평범한 한
가장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분의
행적과 말씀이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평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겸손하셨고 정결하셨으며 성실한
아버지이셨습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성모님과 예수님을 보호하고 부양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뒤에서
철저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에 따라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고, 해산할 때가 임박한 성모님과 함께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해야 했고, 헤로데 임금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고향 나자렛에
돌아와서는 목수 일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셨습니다.
성가정을 돌보셨던 그 모든 노력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장 큰 일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이 하셨던 모든 노동 역시
가장 거룩한 큰 일이 되기 때문에, 오늘을 ‘노동자 성 요셉’ 미사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에 하느님의 아버지의 뜻을 담는다면
어떨까요? 별 볼 일 없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을 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헬렌 켈러).
오늘부터 갑곶성지에서 사진 전시회가 있습니다. 많이 보러오세요.
세 가지 질문(최천호)
톨스토이 단편소설 '세 가지 질문'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한 왕이
인생에서 풀지 못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두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왕은 이 세 가지 질문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늘
자신이 없었습니다. 많은 학자와 신하들이 갖가지 해답을 제시하였으나
마음을 흡족하게 할 답은 없었습니다. 급기야 왕은 지혜롭다고 널리
알려진 한 성자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밭을 일구고 있는 그 성자에게
다가가서 이 세 가지 질문을 말했지만 성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숲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청년이 성자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왕은 다친 그를 외면할 수 없어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왕에게 가족들이 죽임을 당해
복수하고자 왕을 시해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궁으로
쳐들어갔다가 병사들에게 다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정을 들은 왕은
그를 용서했습니다.
왕은 궁으로 돌아가기 전, 성자에게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이미 답은 나왔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갑곶성지에서 매달 발행하는 묵상집. 쓰담쓰담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예수님이 계시는 호수 건너편에서 찾는 행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1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요한 6,22-29
“너희는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예수님이 계시는 호수 건너편에서 찾는 행복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날,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배불리
먹여주셨던 그곳에서 그분을 찾으려 합니다(6,21-24). 그러나 거기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6,25)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6,26) 하시며, 그들의 속셈을 들추어내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던 호수 이쪽과 예수님을 찾아낸 호수 건너편은
우리가 찾아가는 '삶의 광야'입니다. 왜 군중들은 호수 이쪽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했을까요? ‘호수 이쪽’은 자신들의 배고품이
충족되었던 과거에 대한 애착이 있는 곳이요, 기대를 충족시켜줄
메시아, 현세적 욕구, 고정관념 등으로 꽉 차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누구든 목마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눈에 보이는 것,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시선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지 못한 채, 그분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주길 바랐던 것이지요.
신기루와 같은 거짓 희망의 끈을 붙들고 헛수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현세적인 욕구를 충족하려는 군중들의 갈망은 끝을 모르고 매우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호수 이쪽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한 그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작은 배들에 나누어 타고 노를 저어, 그분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6,24). 우리도
많은 순간 내 판단에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몰두하고 땀을
쏟아 붓기도 하지요. 방향착오로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찾아온 군중들을 향하여,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호수 건너편’은, 인간적 기대와 욕망, 현세 애착과
고정관념 덩어리인 ‘호수 이쪽’과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요, 영원한 생명의 빵이며, 죽음을 이기는 희망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호수 건너편’은,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해 선물로 주시는 ‘길이 남아 있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있는
‘생명의 땅’, ‘행복의 땅’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왜 무엇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나와 우리, 이 사회가 찾아가 머물 곳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호수
건너편’입니다. 호수 건너편에서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해야겠습니다(6,29).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믿는 인간의 행위와 태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요청과
부르심에, 사랑과 정의와 선을 실행하는 행동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혹시 나는 하느님과 무관하고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가득 찬 땅, 호수 이편에서 헛되이 땀을
흘리며, 자기만족에 젖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렇다면
호수를 건너 예수님과 함께 하며, 내 영혼 뿐 아니라 내 가정과 사회,
교회를 되살리는 ‘썩어 없어지지 않을 생명의 빵’을 찾기 위해 투신하고
헌신해야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2017년 가해 5월1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 미사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오늘은 노동절이자 법적으로는 근로자의 날입니다. 오늘은 이 땅의
모든 근로자들을 향해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려야 하는 날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내 사업체에도 수많은 근로자들이 저희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직원이라는 호칭대신 함께 돈 보스코의
사명과 정신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동역자’라고 칭합니다.
언젠가 한 사업체를 방문했을 때 한 동역자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안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해요. 살레시안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좋고 아이들 무럭무럭
커가는 것 바라보는 것이 너무 보람 되요.”
쪼들리는 살림이라 좀 더 챙겨드리지 못하는 것에 늘 송구한
마음이었는데,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 노동, 근로라는 것이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더군요. 눈만 뜨면 매일, 그리고 평생토록 되풀이해야 하는 일, 그
일이 정말 가치 있고 동시에 재미있으며, 더불어 동료 인간과 세상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면, 또한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쁘겠습니까?
인간은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일을 통해 한 존재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낍니다. 일로
인해 한 존재가 활짝 꽃피어나며 충만한 인생을 엮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의 노동 현실을 살펴보면 너무나 암담하다 못해
참담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안에서 점점 고착화되어가는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 그로 인한 극도의 차별대우와 상실감! 틈만 나면
자행되는 대량해고! 살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
뿐만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러 측면의 계측에서 불명예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을 따지면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률은 1위입니다. 반면에
전체 고용률은 고작 60%에 불과합니다. 이토록 참혹한 현실이 우리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더 우리를 힘겹게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취직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면접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벼랑길의 끝에
서있는지 모릅니다.
고통과 슬픔은 취직하고 나서도 끊이지 않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직장,
모든 구성원들이 존중받는 직장을 꿈꿨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근로자들은 경영인들의 부속품처럼 쉴 세 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칭찬과 격려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고용주들의 몰상식과 막말과,
언어폭력과 갑질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이제는 귀천하신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대선이라는 범국가적인 대사를 앞둔 우리들입니다. 연이은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파탄 직전입니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선택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는 적어도
한 인간 존재로서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을 우리의 지도자로
뽑아야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애써 일하는 근로자들을 향한 감사의
정을 듬뿍 지닌 후보를 지도자로 선출해야겠습니다.
뱉어내는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서민들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안겨주는 후보를 바라보며 솔직히 제 내면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정책이요 노선이라고
자랑스럽게 펼쳐놓은 제안들이 어찌 그리 파렴치하고 몰상식한지 할
말을 잃습니다.
입만 열만 국민들을 우롱하는 막말이요, 틈만 나면 폐쇄요 대량해고인
후보는 절대 뽑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인간이 어찌 그리 후안무치한지,
한 인간이 어찌 그리 뻔뻔한지,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훤히 들여다보게
되는 선거판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디 우리 민족을 굽어보시고 자비를 베푸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번만큼은 상식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고, 남부끄럽지
않은 그런 지도자를 보내주시길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5월1일 월요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 미사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마태 13,54-58
지하철 충정로 역에서 좋은 시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가고 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예전에 알던 수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십니다. 수녀님과 대화를 하면서 사제들에 대한 말을 함께
하였습니다. 강론을 잘 준비하시는 신부님, 영적으로 충만한 신부님,
건강관리를 잘 하시는 신부님을 보면 기쁘고,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강론 준비를 소홀히 하는 신부님, 외로움을 사람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푸는 신부님, 건강관리를 잘못하셔서 병원을 찾는
신부님을 보면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도 술 조금만 마시고,
건강관리를 잘 하시라고 애정 어린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의
이야기가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산보를 가면 새롭게 문을 여는 가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가게는
처음에는 가격을 할인하기도 하고, 사은품을 주기도 하고, 도우미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인을 하고, 사은품을
준다고 해도 가게는 물건의 질이 좋아야 합니다. 음식점은 맛이 있어야
합니다. 물건의 질이 나쁘고, 음식의 맛이 없으면 손님이 잘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베어나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면 그것은
이름만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12년 전, 캐나다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길도 모르고, 은행
일, 슈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차가 없이는 모든 것이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나중에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었지만, 처음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을 시작부터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누군가에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곧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시오. 네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한모금의 물이 되어 주는 것,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쉼터가 되어 주는 것, 가난 한 이웃에게 빵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이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오늘 스테파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박해를 받기도 하고, 그 길은 모욕을 받기도하고, 그
길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
하십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성모 성월을 시작하는 5월의 첫날입니다.
곧 없어질 음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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