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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7일 주일 [(백) 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 성소 주일)]
[수도회] 삶의 터를 하느님 나라로 바꿔주는 문이신 예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2,14ㄱ.36-41
○ 제2독서 1베드 2,20ㄴ-25
† 복음 요한 10,1-10
오늘은 부활 제4주일로 생명 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양들이 드나드는 구원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지혜를 주시어,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생명의 문화가
넘치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한마음으로 간절히 청합시다.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자주 쓰시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당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비유였습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은 그의 인도를 받아 낯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마침내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문’으로 비유하신 말씀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들어설 때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들어가야 할 공간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그분의
상처로 우리의 병이 나았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시기에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면, 우리가 설령
고난을 겪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와 지도자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서 열어 주시는 문으로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은 내 감각을 자극하고 장밋빛 희망으로 포장된 유혹의
손길이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라고 외친 베드로 사도의 경고가, 2천 년이 넘은 오늘에
더 절박하게 들리는 듯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소 주일인
오늘은, 스스로 거룩하게 살면서 세상에 복음의 참된 기쁨을 선포할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 교회는
거룩한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용기를 갖고 기쁘게 각자
받은 부르심에 따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착한 목자와 함께 착한 양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017년 가해 5월7일 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 성소 주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ㄱ.36-41
제2독서
<여러분은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2,20ㄴ-25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글 쓰는 것이 잘 안 될 때면 저는 커피숍에 갑니다. 커피숍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집중도
잘 되고 그래서 글도 훨씬 잘 써지는 것 같아서 종종 이용하곤 하지요.
며칠 전에도 혼자 커피숍에 가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
테이블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1시간 가까이 있었지만 둘이 서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싸우거나 다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싸운다면 서로를 노려보거나 화를 내는 말 등이 있어야겠지만, 둘은
서로 나란히 계속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 둘이 정말로 무엇을
하는지 살짝 쳐다보았습니다. 바빠서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이 둘은 나란히 앉아서 휴대전화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지요.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인으로 함께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관심어린 시선과 대화가 아니라,
스마트폰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튼 함께 있지만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올바를까요? 이는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스마트폰을
들고서 자기 좋아하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화도 나누면서 식사하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고 말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할 얘기도 없어요.”
왜 할 이야기가 없을까요?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순간적인
재미와 만족을 주는 스마트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들은 신앙인들 사이에서 그대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미사와 기도 생활 안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제의 강론 때문에? 기도 생활의 지루함 때문에?
어쩌면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따라가기보다 인도하며,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모아들입니다.
그리고 양들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주님과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전히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데, 우리들은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이 우리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불평불만 속에 살고 있을까요?
이러한 마음속에서 목자이신 주님과의 간격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로 성소주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해보는
날이지요. 성직자, 수도자로의 부르심도 있고, 가정을 이루는 결혼
성소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르심에 얼마나 잘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와 함께 하는 착한 양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착한 목자가 원하는 모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 공감할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보다 깊어진다(오쇼 라즈니쉬).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새로운 나를 만나기
결혼할 나이를 훌쩍 넘긴 어떤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청년에게 “이제는 너도 결혼해야지.”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집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그런데 다들 이 말에 공감하는 눈치인 것입니다.
집이 없는 것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지 않고 단 둘이 살고 있는
부부들은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아이를 갖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이런 식의 일반화로 자신의 미래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집이 없어서 겪는 힘든 상황이 결혼 후에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어려움을 대물림하기 싫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꼭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갈까요?
부정적인 생각이 무기력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력은
자기비하로 이어지면서,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의 무기력을
전달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피하려는 모습에서 벗어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쁜 목단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삶의 터를 하느님 나라로 바꿔주는 문이신 예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7일 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 성소 주일) 요한 10,1-10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삶의 터를 하느님 나라로 바꿔주는 문이신 예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먼저 목자는 문으로 들어갑니다(10,2).
그러나 도둑이나 강도는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10,1).
도둑은 담으로 상징되는 한계성이나 고유함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성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 전통주의자들이나 이방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선과 자비의 문을 드나드십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한 마리도 빠짐없이 양우리
밖으로 불러냅니다. 목자는 앞장서 양떼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따릅니다(10,3.4). 목자와 양들은 그렇게 깊은 사랑의 친교를
이룹니다.
양우리와 풀밭은 차별되지 않고 이어져 있습니다. 문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우리의 문을 드나드시며, 편견과
아집과 한계를 넘어 양우리와 풀밭을 사랑으로 이어주십니다. 그래서
양우리 안과 밖이 다 하느님 나라로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역과
성별, 문화와 인간관계, 신앙과 신념 등 수 없이 많은 인간적 잣대로
양우리 안팎으로 갈라, 여러 형태의 차별을 만들어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도둑처럼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담장을 넘음으로써
차별을 조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양들이 되어야겠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타락한 세대, 그릇된
사상, 온갖 우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이교사회, 속화된
사회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문으로 드나드는 목자와 도둑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 민감성과 식별력이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몰래
담장을 넘어오는 도둑을 착한 목자로 착각하거나 모른 채 하는 무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주님과 친밀성을 유지하기 위해 땀을 흘리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단맛에 길들여지도록 자신을 허용하고, 하느님 아닌
것들과 타협해버리는 까닭입니다.
목자는 극진한 사랑으로 늘 양들 곁에 머물고 위험과 수고를 감수하면서,
양들을 좋은 목초지로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 착한 목자이십니다(10,10). 우리는
사랑으로만 이런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만이 도둑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문으로 드나드는 목자이실 뿐 아니라,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십니다(10,9). 예수님을 문으로 삼는다는 것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넓히고, 삶의 터를 하느님 나라로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기만 하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되는”
(10,10) 행복에 이를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요,
온갖 문제의 답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선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을 품고, 서로를 양우리에서
풀밭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탐욕과 교만, 거짓과
폭력의 담을 넘는 도둑과 같은 가짜 목자, 인간의 존엄함을 무시하고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거짓 통치자를 결코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거짓 목자와 통치자들이 판을 치는 이때에, 모두가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될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짐으로써 사랑과 정의의
길로 나아가는 ‘하늘 문’이 되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7일 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 성소주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오늘은 저마다의 성소와 저마다의 생명에 감사의 물을 주는 날입니다.
뜨거웠던 부르심의 시작 그 첫마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제 첫마음의 가슴뛰는 역사의 풀밭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관령을 넘었습니다.
아프고 아름다운 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빛나는 시간들또한 모두
하느님사랑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길을 가셨기에 부끄러운 제 역사의
발걸음도 실망하지 않으며 감사하게됩니다.
햇빛없이 자랄 수 없듯이 은총없이
나아갈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다시금 무엇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지 묻게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살리시듯 저를 살려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살기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무게는 봉헌의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건네진 예수님의 생명이 참된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도 바뀔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없이는 진정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여정입니다.
부르심의 시작과 마침표 사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부르심은 축제가 되고 생명은 잔치가됩니다.
부르심에 감사하는 건 생명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은 부르신대로 살아야지 부르심이 될 것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분명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양들의 문이 있습니다.
들어가고 투신해야 문은 문으로 되살아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성소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7일 부활 제4주일: 가해: 성소주일
오늘은 착한 목자의 형상이 주제이다. 유대인들은 이 목자의 형상에서
안정과 번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느낀다. 목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을 갖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또한 사랑과 더불어 힘과 용기의
사상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의 화답송으로 노래하는 시편 22의
내용에 나타나고 있다.
제2독서: 1베드 2,20-25: 목자이신 그분께로 돌아왔습니다.
제2독서의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길을
잃은’ 양들까지도 구원하실 보다 큰 능력을 갖게 되는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목자가 이제는 하느님께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여러 번 당신을 목자에 비유함으로써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목자’(시편 79,2; 에제 34,1; 예레 23,1-3 등)로
묘사되고 있는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이
목자라는 명칭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적 신분을 드러내신다.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이 드러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수난기(13장)가 시작되기 전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절정의 순간을 맞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여간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 우리에서 있는 일을 말씀하신다.
목자들은 한 양 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래서
목자가 부르면 그들은 목자를 따라 나서고, 다른 양들은 자기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문지기’ 역시 목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나 ‘도둑들’은 ‘딴 데로’
몰래 들어가 양들을 훔친다. 잡히지 않은 양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5절). 이것은 ‘참
목자’와 ‘도둑’과 ‘강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누가
‘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고,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도둑’이며 ‘강도’인가? 이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들은 ‘눈이 잘 보인다.’고 하지만, ‘눈이 먼’ 사람들로서
(9,4041), 스스로도 보지 못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보지
못한다. 안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전해지는 순간부터 그 의미를 상실한다. 오히려 폭력으로
그리스도를 없애려 한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10절). 그러나
양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없애려 한다. 그래야 양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마태 26,3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모든 양떼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10절)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참되고 유일한 목자이심을 주장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의 문”(7-9절)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항상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요구를 존중하고
따름으로써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할 ‘문’이시며,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보여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참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태어날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할 증명의 ‘문’이시다.
이것이 오늘 성소주일의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으려 준비된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실천해야할 그 봉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그 마음에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목자는 항상 그분뿐이시며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오늘,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 하는데,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참으로 봉사하는,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일
2017년 가해 5월7일 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 성소 주일)
제가 담당하고 있는 복음화 학교에서는 ‘기도에로의 초대’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시간이 되면 미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피정 중에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삶을 깊이 체험하는 것을 봅니다. 저도 10여
년간 신학생들과 30일 피정을 함께 하였습니다. 피정 지도자가 너무
깊게 개입을 하면 학생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기보다는 피정
지도자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묵상을 찾으려 합니다. 피정 지도자가
아무런 조언을 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묵상을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피정 중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피정 중에 ‘겸손의 3단계’를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겸손의 1단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10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대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준법운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신호등 위반, 차선 위반, 과속, 중앙선 침범, 불법 유턴 등이
있습니다. 교통법규 위반은 교통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교통법규만 잘 지켜도 운전을 잘하는 것이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2단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10계명은 물론이고,
교회의 가르침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대죄는 물론이고 소죄까지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안전운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운전하기 전날은 과음하거나 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경우에는 적당한 시간에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큰 트럭이나, 버스는 먼저 보내거나 추월하는 것입니다. 뒤에 오는 차와
앞에 가는 차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습관을 가지면 운전이 즐거움이 되기
마련입니다.
겸손의 3단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박해시기에 조선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양보운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짐을 지고 가는 어르신이 있으면 가는 길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봉성체를 가시면 기쁜 마음으로 차량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운전이 교통수단이기도 하지만 운전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욕심과
교만함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겸손과 희생으로 타인을 위해서
살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어진 능력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능력과 재능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회개’했는지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지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타인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신학생 때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음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사리에 맞지 않는 독선을 피우지 않으며, 평신도와 함께 본당을 이끌어
가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
평신도들에게 적절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
검소하게 물질에 마음 쓰지 않으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웃어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과 행동에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성사 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교구장과 장상에게 순명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교우에게 매이지 않는, 양쪽 귀를 모두 여는 사제”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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