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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8일 월요일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수도회] 삯꾼과 착한 목자의 차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1,1-18
† 복음 요한 10,11-18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밝히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자기 탐욕의 도구로 삼거나, 늑대와 이리의 공격에 나 몰라라 하며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나쁜 목자와는 다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과 소통하는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서로를 안다는
말은 성경에서 자신의 목숨까지 맡길 수 있는 신뢰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착한 목자는 양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양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의
관계를 예표하시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받는 새로운 생명의 권한을 강조하십니다. 그 권한이란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까지 데려오려고 하시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일로 질타를 받자, 환시를 통해 깨우쳐 주신 하느님의 새로운 뜻, 곧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이 유다인만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도 펼쳐졌음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인간의 잣대로
가로막은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목자와 양의 비유는 넓게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 좁게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 자주 쓰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세상에 선포하며, 모든 민족들에게 열린 하느님의 구원을 전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도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며, 같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고유한 소명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펼쳐야
합니다. 그것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의식하며
2017년 가해 5월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8
복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지하철을 탔는데 운 좋게 빈자리가 하나 보여서 ‘오늘 참으로 운이 좋은
날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그 자리에 앉은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분명히 양 옆 자리에는 누가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누군가가 내
옆에 앉아 있었는데 누군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의식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빈자리가 하나 있어서 얼른 앉았는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유명
연예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선은 대놓고 보기는
힘들더라도 곁눈질을 하면서 연예인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말 한 마디라도 같이 해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잊어버릴까요? 아마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할 때 이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글쎄 지하철을 탔는데 연예인 누구를 봤어.”
이 연예인을 두 번 다시 같은 지하철에서 볼 일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 안에는 계속해서 남아 있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아보았기 때문에 의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기억 안에 남아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실제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을 의식하고 있을까요? 늘 함께
하시기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그
만남 안에서 우리는 항상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고
그냥 눈을 감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한 주님께 대한 관심보다는 세상
것에 대한 관심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분명히 주님을 느낄 수도 체험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자기의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은 내놓을 정도의 큰 사랑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큰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의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마음으로
만날 수 있고, 의식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의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만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일상 삶 전체
안에서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이루어질 때 분명히 주님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 수가 있게 됩니다.
이제는 기도를 통해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멀리 계신 분이 아닌, 바로 내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슬프도다! 부모는 나를 낳았기 때문에 평생 고생만 했다(시경).
목자와 양.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행복찾기’ 중에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독일의 문학자 한스 카롯사는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입니다.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많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을 통해서 결정됩니다.
여자는 좋은 남편을 만나야 행복하고 남자는 좋은 아내를 만나야
행복합니다.
학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실력이 생기고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만나야 가르치는 보람을 누리게 됩니다.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잘 만나야 합니다.
씨앗은 땅을 잘 만나야 하고 땅은 씨앗을 잘 만나야 합니다.
백성은 왕을 잘 만나야하고 왕은 백성을 잘 만나야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인생에서 만남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우연한 만남이든 섭리적
만남이든.. 만남은 중요합니다.
인생의 변화는 만남을 통해 시작됩니다. 만남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만남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만남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부모님 건강하세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삯꾼과 착한 목자의 차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
삯꾼과 착한 목자의 차이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와 삯꾼을 대조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착한
목자처럼 살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10,11).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삯꾼은 자신의
생계와 유익을 위해 양을 돌봅니다.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기에 조건
없이 양들과 운명을 같이 하지만, 삯꾼은 일 때문에 곁에 있을 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존재하고 양들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10,11.14). 그러나 성과와 효율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인 삯꾼은 자신을 위해 일할 뿐이므로, 위험이 닥치면
양들이 죽든 말든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10,12-13). 착한 목자는
중심에 늘 양을 두고 살며, 변함없이 이타적인 자기 투신을 지향합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애정 깊은 관심이 있어 양들을 잘 알고, 그 사랑 때문에
양들도 목자를 잘 압니다(10,14). ‘사랑의 인식’은 그렇게 양들을
생명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나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어(10,13)
양들과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양들의 목숨은 관심 밖의
일일 뿐입니다. 하여 삯꾼은 늘 낯선 자로 머물 뿐입니다.
착한 목자와 삯꾼의 관심의 범위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삯꾼은 자신이
보수를 받는데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맡겨진 양들과 양우리 속의 양들을
일로써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양들을 일로써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없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품는 따뜻한 가슴이요,
생명의 길을 열어주는 열린 문입니다. 그의 사랑은 보편적이고 차별
없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의 시선은 양우리 안에 있는 양들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의로움의 손길에서 벗어나 길을 헤매고
소외된, 양우리 밖의 양들 또한 하느님 사랑의 온돌방으로 데려오려
합니다(10,16). 그렇게 하지 않고는 참지 못하는 것이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편견도 차별도 없이 사랑의 경계를 한없이 넓혀가는 것이
목자의 소명입니다.
사랑 가득한 착한 목자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는 사랑’(10,17)입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죽음으로써 다시 목숨을 얻게 되는 사랑이 바로 목자가 지닌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아무도 착한
목자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가 내놓은 사랑이 이토록 강하고 크고 넓기에, 착한 목자의
돌봄 아래 있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이런
목자의 사랑을 지녀야겠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이는
사이라 해도,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느님의 존엄한 피조물이요
형제자매라는 사실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착한 목자의 모습보다는 삯꾼이 너무도
많은 듯합니다. 그래서 각자도 거룩하고 순수한 영을 지니고 하느님을
증거하려는 소명의식이 약해지고, 교회도 제 역할에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사회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삯꾼처럼
처신하며, 원치 않는 고통을 양산하고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찌들어가는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착한 목자, 품위 있고 예의바른 지도자
2017년 가해 5월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10,11-18
착한 목자, 품위 있고 예의바른 지도자
성소주일을 지내며 대견스럽게도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고민하는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세상의 넓고 편안한 길을 두고
좁디좁은 봉헌생활의 길을 찾고자 때로 갈등하고 때로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70년대 80년대 성소황금기를 거쳐 온 우리 한국 교회입니다. 넘쳐나던
입회자들로 인해 침실 걱정, 학비 걱정을 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소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
시대이지만 결코 비관적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때 한쪽 문을 닫으시는 듯하지만, 낙담하고 있는 우리 앞에 어느새
다른 쪽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총장이신 앙헬 페르난데스 신부님께서
살레시안들에게 틈만 나면 강조하시는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성소자들 숫자가 부족하다고 아무나 후보자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단 한명이라도 제대로 된 후보자, 양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서 있는 사람, 착한 목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후보자들을 잘 선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봉헌생활자로서의 양성에
최대한의 정성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들이 사목자로서
양떼 앞에 섰을 때 존경받는 착한 목자, 사랑받는 착한 목자, 양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도록 교육해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떼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떼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떼를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에도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어디 내놔도 남부끄럽지 않은 지도자이면 좋겠습니다. 지도자로서
기본인 인품과 상식을 어느 정도 갖추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거기다
백성들을 향한 따뜻한 배려의 마음과 겸손의 덕을 지닌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겠습니다.
특히 말을 사용하는데 예의바르고 기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또한 말은 그 사람이 지나온 삶의 여정과 철학,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질 새로운 지도자는 품위 있는
언어를 잘 구사하시는 분이어야겠습니다. 수많은 공약들 다 실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라도 덕스럽게 하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힘겨워하는 국민들과 백척간두에 서 있는 고위험군 서민들에게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건네는 그런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분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입만 열었다하면 막말이요 망언인 분, 마이크만 잡았다하면 국민들
상처 난 가슴에 굵은 소금을 사정없이 뿌려대는 분이 자신의 꿈을
이룬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할 것입니다. 사용하는
단어들도 어찌 그리 천박하고 경망스런 단어들인지 우리 청소년들이
따라할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안긴 막말들에
대해 유머와 해학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니 참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럼없이 뱉어내는 막말들을
들으며, ‘왜 지금 우리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국민을 무시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고통과 시련 속에 잠겨있는 우리 민족을 굽어보시어
부디 품위 있고 겸손한 지도자, 덕스럽고 예의 바른 지도자를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1절)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도둑들과는 반대이시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성사로 변화시키고
당신께서 구원하신 양들에게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자유의지로 자기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 놓으셨다. 그분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마르 10,45 참조)고 하신 분이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착한 목자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여기에 삯꾼이 나온다. 삯꾼은 세상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들로
목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곤 있으나 양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는 삯꾼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필리 2,21)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고 느끼면 도망을 가고 만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2ㄴ절) 그
이리는 악령이다. 그 악령은 사람의 마음을 유혹으로 찢어 놓고,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이리는
어떤 사람은 만취하도록 유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의 불을
붙이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치켜세우고, 어떤 이는 분노로
파멸시킴으로써 양들을 물어 가고 흩어 버린다. 삯꾼에게는 이런
이리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어떤 열의도 양들에 대한 사랑도 없다. 그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추구한다. 양떼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고 계신 친밀한 관계와 같은
가까운 관계에 있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고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두고 달아나지
않는다.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셨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 양들을 지키셨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16절)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양 우리 바깥에 있지 않고 한 양
우리에서 한 목자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 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7절) 아드님은 이미 하느님으로서
언제나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요한 3,16)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이시므로 그 뜻을 이루신 주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18ㄱ절)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이 자발적인 것이고, 그분은 당신이 내 놓으시고 다시 되찾을 수
있는 분이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임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또한 그분이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ㄴ절)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ㄷ절)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 뜻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절)는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5월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 10,11-18
내일은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저는 지인들과 함께
지난주에 사전투표를 하였습니다. 작년에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이루어졌고, 겨울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봄에 치르게 되었습니다.
백성은 물과 같고, 군주는 배와 같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물은 배를
움직일 수 있게도 하지만 배를 가라앉게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과
같은 국민들이 부디 먼 길 잘 달릴 수 있는 배를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선택을 위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은 관심이 없다. 공약이란 후보들의
희망사항일 뿐 그 어떤 후보도 그들이 내어 놓은 공약 그대로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을 번지러하게 잘하거나 상대후보를
예리하게 잘 따지거나 또는 임기응변식 답변을 잘하는 것도 나는
후보로서 호감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론과 상대진영에서 쏟아 놓는 온갖 네거티브
공세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선거가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대통령 후보를 선택할 때 세 가지만
본다.
첫째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살펴본다. 특별히 70년대
80년대에 20대의 청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지금은 50-60대가 되어
대통령 후보로서 경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후보들에게 서슬이
퍼렇던 독재시절에, 당신의 젊은 시절에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그
불의와 맞서 싸웠는가를 묻는다. 동료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가고
최루탄에 쓰러질 때 이를 외면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출세하겠다고
공부나 하던 사람들이 지금 성공해서 후보가 된 사람들을 나는 일단
의심한다. 지금의 우리 정치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든 장본인들이
오로지 출세만을 위해 위만 바라보며 살아온 이런 고위 공직자, 언론인,
정치인들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후보로 나서서 번지러하게
말을 잘 할지라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그들은 제 살 궁리부터 찾을
사람일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가 위기일 때 그는 무엇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질문이 나에게는 후보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둘째는 ‘한평생 그의 삶이 변질되지 않고 한결 같은가?’하고 묻는다.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청년들 중에는 지금은 소시민으로
살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작은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으로
평생을 올 곧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는 이들을 누구보다
존경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결기와 아름다움을 잃고 현실과
타협하며 변질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질 때가
있었다. 특히 정치인들, 고위 공직을 맡은 사람들이 과거 젊은 시절의
결기는 잃어버리고 변절하거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연민과 슬픔마저 느껴진다. 따라서 한 평생 자신이
추구한 삶의 가치를 지키며 사는 한결같은 사람, 그가 운명처럼 정치를
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분명 눈에 보이는 큰
업적은 남기지 못할지 몰라도 긴 안목으로 볼 때 국가를 한층 성장시킬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나는 정치인으로서 실용주의자 보다 철학이 분명한 사람을
선호한다. ‘남북 분단의 문제를 풀어 가는데 있어서 평화적이며
주체적인가,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가, 인간생명은
물론이고 생태환경에 대한 보호 의식이 있는가.’와 같이 복음적 태도를
살펴본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대통령이 선출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서 다친 이웃을 도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웃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고서 기뻐하는 목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잘못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고,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셨고, 배고픈 이들은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고,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모든 것을 감당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5월8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요한10,11-18)
모든 것을 감당하라.
“도모시용(道謀是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가에 집을 짓는데, 길
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짓는 것이 좋을까 상의하면 구구한 의견으로
제대로 완성할 수 없는 것처럼 주견(主見) 없이 남의 의견만 쫓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소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거나
이사람, 저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10,16).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앎,
인격적인 일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목자와 양인 우리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잘 아는 관계이기를 희망합니다.
한편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순명을 의미 합니다.
마찬가지로 “안 듣는다.”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이가
‘저놈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고 말한다면 귀로 듣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한
목자에 한 양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명은 강압에 의하여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목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신 것이지 결코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랑의 응답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인식한다면 자신을 내어 맡기신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 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10,17).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사건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아들은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참 사랑을 깨우치면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한 집에 살고 있는 개들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였답니다. ‘우리
주인은 나를 좋아해!.’ ‘아니야 나를 좋아해!.’ 옆에서 듣고 있던 늙은
개가 말했습니다. ‘이봐, 주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나야, 나는 내일
주인 뱃속으로 들어가거든!’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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