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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11일 목요일 [(백)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수도회] 생명의 숨결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섬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3,13-25
† 복음 요한 13,16-20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은, 공관 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 새로운 계약의 성사인 성찬례를 세워 주시는 장면을
대신하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요한 복음은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섬기는 삶이야말로 성찬례의 참뜻임을 풀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섬김의 삶이란 자신의 권력과 힘으로 상대를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천박한 욕구와는 다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파견한
이에 대한 신뢰를 갖고, 파견된 소명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역사에서부터 이집트 탈출과 광야의 수련을 거쳐 약속된
가나안 땅에 입성하고, 다윗 왕조를 통해 일으켜 주신 영광과 유배
생활 이후에 갈망해 온 메시아의 오심을 희망하는 유다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며 메시아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사실 선교를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른 종교의 성인들과 별 차이 없는
위대한 성인 정도로 알고 있거나, 노골적으로 ‘예수쟁이’라며 싫어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럴 때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 보면 좋습니다.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하느님의 섭리를 되짚어 주면, 어느 시점에 듣는 사람도 공감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섬김의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시는 순간입니다. 선교란 공감을 통해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 주는 섬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꼰대의 삶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017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13-25
복음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6-20
‘1 더하기 1’은 몇일까요? 당연히 ‘2’입니다. 그런데 난센스 문제로
생각하게 되면 답이 많이 달라집니다. 아마 어렸을 때 이러한 답을 많이
이야기했지요. 찰흙 한 개와 또 다른 찰흙 한 개를 더하면 찰흙 한 개가
된다면서 ‘1 더하기 1은 1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창문이라는 답도
있습니다. 1+1= 에서 =을 1과 1사이 위아래 그으면 창문 모양의
‘田’이 된다고 해서이지요. 이밖에도 발전, 중노동이라는 답도
있었습니다(왜 그런지는 아시겠죠? 일을 더하고 또 더하니까요).
이렇게 ‘1 더하기 1’도 여러 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산수에서는
정확하게 ‘2’로 떨어지지만, 우리의 인생에서는 예외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에 정답이 없고, 다만 다들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쫓아갈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분들은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정의를 내리기도 하고, 자신이 아는 세상이나
경험한 세상을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곤 합니다.
이런 분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꼰대’라고 말합니다. 고지식하고 본인
경험과 생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면서 불편한 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꼰대’ 같은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내가 왕년에~’, ‘요즘 젊은
애들은...’, ‘젊었을 때에는 고생도 좀 해봐야지.’, ‘애 참 버릇없네.’
등의 말을 하면서, 나이 먹은 티를 내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내 자신도 그렇지 않은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나잇값을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하지
않을까요?
종종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을 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훈계조나 명령조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시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로
빛나는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제자들 역시
무시하고 함부로 판단을 했었지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꼰대’의 모습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꼰대의 모습이 예수님을
함부로 판단했으며, 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꼰대의 삶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살아갈 때, 이러한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며
진정으로 나잇값을 해나가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제임스 M. 배리).
오랜만에 찾은 인천의 신포시장 입구.
나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는?
훌륭한 직장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직장에서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합니다. 또한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서 노력합니다.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도 참 노력을 많이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도 많은 만남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게 됩니다. 정신없는
삶의 속도 때문에 스트레스에 강타당하고 심신이 녹초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면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직장 안에서, 가정 안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들은 어쩌면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보다 더 노력하고, 지금보다 더 고통을 감수한다면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혹시 목표를 잘못 잡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직장, 가정,
이웃과의 관계 등은 물론 아주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의
최종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더 큰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직장, 가정, 이웃과의 관계 등은 목표가 아닌
목표를 향한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과정 안에서의 아픔과 상처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겪어야 할 하나의 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것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쉽게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쉽게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
목표를 한 번 멋지게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이런 배려 역시 사람들을 힘내게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생명의 숨결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섬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요한 13,16-20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생명의 숨결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섬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제자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3,16-17) 오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성급한 우리는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늘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하려
듭니다.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계획하고 행동하곤 합니다. 이런 것들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실행에 앞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의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이요, 주님의 파견을 받은 도구라는 의식 없이
행하는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자신에 하느님께 속한
예수님의 제자라는 의식 없이 행동한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한 사업이지 하느님 나라의 선포라고 할 수 없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행하든 주님의 종이라는 주제파악을 하고,
겸손하게 선행하고 섬겨야 합니다. 낮추지 않고는 서로의 존엄성이
되살아날 수 없으며,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불의와 고통, 차별과 어둠에 빛과 생명을
불어넣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내어주며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13,17)고 하십니다. 또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을 맞아들임으로써 실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낮추어 맞아들여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요,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 맞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3,20).
우리도 늘 주님의 종이요, 사랑을 위해 파견 받은 존재임을 잊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서로를 섬겨야겠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온갖 병리 현상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신자 개인, 교회지도자들,
국가의 지도자들이 바로 이런 ‘혼’과 ‘섬김의 리더십’을 망각한 때문이
아닐까요? 국민을 아끼고 주인으로 섬기는 정치지도자, 서로를
주님처럼 받들며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사랑하는 신앙인과
교회지도자가 절실한 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어떤 형제도 다른 형제에게 악한 짓을
하거나 악한 말을 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영(靈)의 사랑으로
자진해서 서로 봉사하고 순종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거룩한 순종입니다.”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5,13-15) 이런 주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한 마땅히 국가도 바뀌어야겠지만,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 자신부터, 자신을 낮추어 서로의
발을 씻겨주도록 해야겠습니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 일면식도 없는
사람, 사회적 약자들,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지성을 다해 맞아들여야 할 오늘의 예수님임을 기억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파견(소명)과 행복과 계시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복음: 요한 13,16-20
파견(소명)과 행복과 계시
헨리 나우엔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톨릭 영성가입니다.
많은 책을 썼고 예수회 신부로서 예일대학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교수로서의 소명을 살아가던 도중, 그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열망으로
페루 빈민가 사목을 하기 위해 떠납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요청이 들어와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또 다른 하느님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프랑스
한 장애인 공동체에서 피정에 참여해 달라는 편지가 온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강사로 초빙된 줄 알고 갔으나 알고 보니 대침묵
피정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장애인들을 돌보며 지낸 시간은 그의 나머지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단체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교수님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우리 같은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얼마나 커다란
하느님의 선물일까요.”
하버드대학으로부터 이제 막 교수가 되어 일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는 갈등하기 시작하였지만 결국 그 부르심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캐나다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커뮤니티
(Day Break Community)’라는 정신지체아 새 공동체의 지도자로 가게
됩니다.
공동체 식구는 6명, 그는 그 6명을 위해 하버드대학교 교수자리를
물리치고 그 공동체를 선택했고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그
공동체에서 일했습니다.
그가 대학교에서 선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을까요?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씁니다.
“이상하다. 이것은 희생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나의
새로운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가! 이상한 마음의 평화가...
이 놀라운 평화여, 자유여, 자유여.”
그리고 그는 그 정신지체아들로부터 자신이 치유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통해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새롭게 경험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우리는 헨리 나우엔 신부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학에서 강의했다면 더 큰 일을 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신부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판단할 때, 자신 안에 느껴지는
‘평화와 자유’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는 내 자신의 성소가 무엇인지 헛갈릴 때, 그 판단 기준으로 내
마음의 평화와 자유, 행복을 따라가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외적인 성취가 아닌 마음의 행복을 기준으로
성소를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은
그 이유로 그것을 존재하게 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막에서 시계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막 같은 이 세상에 시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더 복잡하고 더 유용한 우리 각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힘든 삶과 상처, 청소년기의 방황을 극복하고 미국을
들었다 놨다 한 인물이 되었던 오프라 윈프리는 그의 마지막 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세요.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이유, 소명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만이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내가 가장 완전하게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이유이고 소명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 소명이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판단의 기준을 항상 ‘마음의 평화, 자유, 행복함’에 두십시오.
나를 만드신 분이 나의 길을 가장 잘 아실 텐데 그 길을 가면 반드시
내가 더 행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녀를 낳았을 때 그
자녀가 세상에서 사랑받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행복하도록 우리 모두를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분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종으로서 당신 부르심대로 살게 되면
결국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희생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복하게 못 박히셨고, 이태석
신부님도 마더 데레사도 당신들이 더 행복한 길을 찾은 것이었고
헨리 나우엔 신부님도 그러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새 성인이 되신 교황님도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행복한 분이 성소를 찾은 분이고 성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이유는 참 행복을 찾는 방법을
세상에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참 행복을 찾기
위해 그 소명을 주신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만남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만남
복음: 요한 13,16-20: 나와 함께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6절)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은 겸손하게, 온건하게, 조용히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는 주님의 말씀대로 더
낮은 사람일수록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로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아버지의 선과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면서도 우리 모든 죄인들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부를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주시어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우리는 ‘아들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7절) 이것은 우리가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사랑과 열정에 어울리는 것은
덕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의 지식이 실천으로 드러나게
될 때, 항상 생각지 못한 큰 결과를 얻게 된다. 실천이 없으면 지식도
심각한 불구가 된다.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라고 쓰여 있다. 믿음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고백을
모두 포함하지만, 실천으로 나오는 빛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이들을
아시고 발꿈치를 치켜든 자들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다
아시면서 유다는 왜 뽑으셨을까?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창조하셨고, 사울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 유다를 뽑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분명히
제자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는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담도 하와도 사울도 유다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한 결과이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19절)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신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생각을 몰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따라온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주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2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이는 바로 파견된 자 ‘사도’들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이는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파견된 이에게는 보내신 분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파견된 그리스도를 맞아들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 아버지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사도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사도들을 가르치신
분을 발견할 것이며, 우리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찾는다면, 아들
안에서 그분을 낳으신 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요한 13,16-20)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였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행정부를 대표하고,
경호원들로부터 경호를 받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통령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신중해야 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통합의 시대를 열어 가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호칭이 바뀝니다. 교우 분들은
‘신부님’이라고 부르십니다. 처음에는 호칭이 어색하고, 꼭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호칭이 익숙해지고, 사제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자리의 변화가 있습니다. 교우 분들은 사제의
자리를 만들어 주십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가운데에서 찍도록 배려를
해 주십니다. 처음에는 부담이 되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아가곤 합니다. 한 말씀할 기회가 자주 주어집니다. 본당 단체의
회합에 가면 훈화를 하기도 하고, 축하의 말을 하기도 하고, 덕담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한 마디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거리를 만들게 됩니다. 정말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고, 쌍날칼 보다 예리합니다. 그러기에 말은 신중해야 합니다.
교우 분들은 사제에게 존중과 배려 그리고 사랑을 듬뿍 주십니다.
사제는 주님을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간 곳은 신자 분들이 작았습니다.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기도 했고, 주일 미사 후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성당에서는
주보를 정리했습니다. 넓은 마당에서 휴지를 줍고, 쓰레기를 모아서
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고마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사제와
신자들은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만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도 있고, 다시 잘못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언쟁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은총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우리의 부족함도 우리의 허물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허물을 씻어내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겸손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을 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모와 능력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그분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분들을 주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우리들의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5월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요한 13,16-20)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아는데 있어서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식으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도구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
안에는 주인이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그보다 높지 않은 종은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주어진 몫에 더욱 충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알면 안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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