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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14일 주일 [(백) 부활 제5주일]
[수도회] 내 삶의 길이요 목적이신 예수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6,1-7
○ 제2독서 1베드 2,4-9
† 복음 요한 14,1-12
◈ 오늘의 묵상
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영원한 가치로 삼지 않은 초기 신자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행복의 가치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은 언제나 드러납니
분배가 공정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내 불평을 터뜨렸는데, 믿는
이들도 팔이 안으로 굽는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려고 일곱 부제를 뽑고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영적 교회와 제도 교회의
양면성이 엿보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할 사회적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제도가
영적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는 살아 있는 돌로 만드신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지만, 불신은 사람들을
편견과 오해의 걸림돌이 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려면, 내 인간적인 약점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야 한다.
2017년 가해 5월14일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1-7
제2독서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입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2,4-9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저는 시간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종종 여행을 다닙니다. 차는 너무
빨라서 주변을 바라볼 수 없고, 반면에 걷는 것은 너무 느려서
힘들지요. 그 중간이 바로 자전거이기 때문에 자전거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꽤 먼 거리를 달려온 것 같은데 생각했던
목적지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맞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달렸지만,
원하는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형제님께 여쭈어보았지요.
“제가 ***를 가려고 하는데, 이 길이 맞습니까?”
그 형제님께서는 “아니요. 방향이 틀렸어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요?
제가 원래 가고 있었던 방향으로 계속 갔을까요? 아니면 가르쳐주신
길인 정반대의 길로 갔을까요? 당연히 가르쳐주신 길인 제가 가던 길과
정반대의 길로 갔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을 안 순간
바로 방향을 돌려야 목적지에 가장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신 분의 말을 무시하고 제가 생각했던
길로만 계속 갔다면 목적지에는 절대로 도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과 판단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을 좀처럼 버리지 못할까요?
특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길만을 박박 우기면서 가려고 할까요?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역시 가장 겸손한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보여주신 이런 겸손의 삶을 간직하지
않고, 주님의 길보다는 세상의 길을 선호하다보니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삶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만을 믿고 세상의 길만을 믿으려고 하면 마음이 산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 주님의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최종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 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은 못 보곤
한다(헬렌 켈러).
제대로 된 길을 향해 가고 계신가요?
예수님은 어디에?
어느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하느님을 그리고 있었지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나 성당 마당에 있는 예수성심상의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그린 그림이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아이가 그렸다는 예수님은 뒤에 십자가도 없고, 성당 마당에
있는 예수 성심상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대신 양복과 넥타이를 맨
그리고 안경까지 낀 어떤 남자를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우리 친구는 누구를 그린 거예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모습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아빠를 그렸어요.”
이 아이의 눈에는 아빠가 예수님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한없는 사랑을 주면서 잘 키워주시는 아빠가 예수님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이제 나의 이웃들에게 주님을 보여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막연히 하늘에만 계시고, 성당에 있는 성상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내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제 피정 받으신 춘천교구 퇴계성당의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내 삶의 길이요 목적이신 예수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14일 부활 제5주일
사도 6,1-7; 1베드 2,4-9; 요한 14,1-12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내 삶의 길이요 목적이신 예수님
우리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길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길도 목적지도 알지만 왜 그 길을 가야하는지를 몰라서 불안해하는
경우도 있지요. 한편 자기 생각과 탐욕에 매여 엉뚱한 길을 가면서도,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결과 두려움과
근심걱정 속에 심란한 상태에 떨어지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초대교회가 직면해야 했던 예수님 부재(不在)의 불안한
상황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선언하신(13,21-30) 뒤, 당신 자신의
죽음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13,31-35). 나아가 베드로가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13,36-38)까지 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14,1-2) 이 말씀은 당신이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이자, 믿음을 가지라는 충고입니다. 살아서 함께 계실 때뿐만
아니라 죽으시어 계시지 않게 되더라도 늘 ‘함께 있을 것’임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
하시자,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하고 여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십니다(14,6).
길이신 예수님의 목적지는 진리이며, 진리의 내용은 생명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길이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목적지와 길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목적이자 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예수님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어디에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여기서' 길이 되고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길이신
그분과 ‘함께 걸으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의 길이요 삶의 목적입니다.
누구든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할 때만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나 ‘그분만이 주시는 참 평화’ 가운데 머물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평화, 기쁨, 행복에로 나아갈 수
있음을 다시 기억하면서...
우리도 제자들처럼 마음이 산란해져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쯤 가고 있는지,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불안하고, 지니지 못한 것을 손에 넣지 못해
조바심이 날 때,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우리 삶의 목적이자 길
자체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겠지요.
불안할 때, 이해받지 못할 때, 고통과 절망 중에,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들 때, 배반당했을 때, 따돌림을 당했을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호흡하며, 다시 일어서야겠습니다.
길이신 예수님은 충만한 삶, 해방된 삶의 의미이신 진리이시며, 새로운
삶의 질을 선물로 주시는 생명이시며, “살아 있는 돌”(1베드 2,4)이신
까닭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2017년 가해 5월14일 부활 제5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1-12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요즘 우리 불쌍한 젊은이들! 이 지상에서 두 다리 쭉 뻗고 마음 편히
거처할 작은 둥지 하나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집값, 전세 값으로 인해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은 참으로 귀가
솔깃하게 만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복음 14장 2절)
언젠가 이 지상생활이 마무리되면 우리 모두 아버지의 집으로 집결할
텐데, 그 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니, 참 다행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
청년들이 이 지상에서 겪고 있는 전월세나 원룸 유랑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니...참으로 다행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함께 머물게 될 아버지 집이 어떤 곳인지 벌써 기대가
큽니다. 그곳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풍요로움이요, 넉넉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이리 저리 쫓겨 다니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왕따 당하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홀로 돌아서서
피눈물 흘리지 않는 곳일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차별대우 당하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고공단식하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천막농성하지 않는 곳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모두가 그분께서 차리신 풍성한 식탁에 앉아 마음껏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곳일 것입니다.
언젠가 도래하게 될, 그리고 우리 모두 거기서 모이게 될 하느님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면서도 또 다른 한 가지 꿈을 가져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지닌 특징 중에 하나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순간,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장소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이나 직장 공동체, 본당과 수도공동체, 더
나아가서 국가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 방식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난 주말 저희 살레시오회는 춘천교구와 함께 아담한
청소년상담복지센터 하나를 개소했습니다. 잘 꾸며진 센터를 둘러보며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부디 이곳이 갈 곳 없는 청소년들, 마음의
독감이 걸린 청소년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따뜻한 둥지가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그리고 또 한 가지 지향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상처입고 방황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극진히 환대하고 섬기는
따뜻한 둥지들이 앞으로도 더 많이 생겨나기를...
새 정부가 그리고 있는 큰 밑그림 중에 대대적인 공공임대주택과
청년주택 공급 계획을 보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물론 재원 마련이나
사업 추진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들이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서민들과
청년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요 희망인지 모릅니다.
이런 구체적인 노력들이야말로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건설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고마운 사업 계획에 큰 성원과
박수를 보내며, 주님 은총과 섭리의 손길 아래 부디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하루하루 넘기기가 너무 힘겨운 분들, 매일 펼쳐지는 하늘이 짙은
회색빛인 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만나게 될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지상에서 겪었던 모든 고통과 시련, 눈물과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자비하신 아버지와 함께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한 14, 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14일 부활 제5주일.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 4)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고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를 묻고 또 묻게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당신 삶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이 오직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들이 다시금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부활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생명의 시간입니다.
생명의 흐름과 생명의 시간은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삶의 가치는 생활의 가치입니다.
생활하는 모든 방향이 하느님 중심에 방향을 두고
실천하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이것이 하느님께로 올바르게 가는
참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실 하느님깨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방향은 오직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부활 제5주일
2017년 가해 5월14일 부활 제5주일(요한 14,1-12)
신학교에서 졸업을 앞두고 ‘종합시험’을 보았습니다. 7년 동안 배운
것들을 ‘신학, 철학, 성서, 교회사, 심리학, 교회법’과 같은 것을
종합해서 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과목도 많고, 분량도 많기 때문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공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동료들은 각자가 맡은
부분을 요약해서 대표에게 제출하였고, 대표는 요약된 내용을 수정해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너무 자세하게 요약을
하였고, 어떤 친구는 너무 간단하게 요약을 하였습니다. 편집을 맡았던
친구는 다시 한 번 정리를 하여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한권의
책으로 요약된 자료를 가지고 공부를 하였고, 무사히 종합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종합시험은 그동안 배웠던 학문에 대한 정리의
효과도 있었지만 같은 반 동료들의 협력과 단합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삶이고,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5주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리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 제1주일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앙의 첫 번째 조건은 ‘갈망’입니다. 소경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방인인 여인은 강아지는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었고,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과
가족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망이 일구어낸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한 마을의
이야기입니다. 앞에는 거센 물결이 이는 큰 강이 있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었던 마을입니다. 사람들이 아프면 앞에 놓인 강 때문에, 뒤에
있는 산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의
노인이 손에 망치를 들고 산으로 향했습니다. 산에 터널을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무모한 일이라고 노인을 말렸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내가 하다가 못하면 자식들이 할
것이라고 하면서 묵묵히 터널을 만들어갔습니다. 60년이 지난다음
드디어 마을의 산에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터널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아프면 그 터널을 통과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역시 갈망이 만들어낸 일입니다. 과연 나의 삶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는지, 과연 나의 삶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부활 제2주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되다.’ 예수님의 부활은 물리적인 탐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논리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믿음만 있어도 능히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도, 중풍병자에게도, 소경에게도
단 한 가지만 요구하셨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서커스에서 공중 그네를
타는 사람은 자신을 받아 줄 사람을 믿어야만 그네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묘기를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신용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구조입니다. ‘화폐’는
신용이 없다면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각종카드는 신용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약속은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부활 제3주에서 우리는 ‘엠마오’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누었을 때 가슴이 떨렸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엠마오는 어느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하느님 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가 바로
오늘날의 엠마오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합니다. 사제의 손으로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바로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성체성사를 정성껏
집전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엠마오는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부활 제4주에서 우리는 ‘착한목자’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고, 양들의 이름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사제는 양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양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제가 세상의
것들에 취해 있으면 결코 착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강론을 성심껏
준비하고,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하고, 사제를 필요로 하는 신자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무엇보다 주일미사를 성심껏 지켜야
합니다. 교회에서 실시하는 교육, 피정에 적극적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 본당에서의 추억입니다. 신자들이 많지 않았던
본당입니다. 약수터에서 물을 떠서 신자들이 마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성당의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였습니다. 마당의
휴지도 줍고, 가끔은 봉고차로 신자들을 모시러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부활 제5주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권력의 길이 아닙니다. 명예의
길이 아닙니다. 성공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죄인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외로운 사람일지라도,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입니다.
진리는 남을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잘못된 신념과 가치를 진리인 것처럼 포장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나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였고, 사람들을 재판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의 삶의 이정표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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