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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19일 금요일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수도회] 행복의 길로 이끄는 예수님의 사랑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5,22-31
† 복음 요한 15,12-17
◈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종’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하며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약의 세례자 요한도, 가브리엘의 잉태 예고 앞에서
성모님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모든 종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부의 뜻에 순명하시며
자신을 바치시는 희생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구원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종의 비천한 모습이 아니라 친구로 예수님
곁에 머물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 살과 피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는 영광을 거저 얻은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래서일까요? 가끔은 우리가 뽑혔다는 사실이 두렵고 싫어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싶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만, 우리는 힘겹게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걸으시는 예수님 곁에 잠시도 머물러 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참된 믿음은 사랑할 용기에서 자라납니다. 소유를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가치 있게 인정해 주고,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랑을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모든 것이 다 내 가까이에서 시작됩니다.
2017년 가해 5월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성령과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22-31
복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2-17
어떤 책을 보다가 이러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특정한 한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일이 훨씬 더
쉽다.’
큰 공감을 갖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구체적이 아닌 모호한 외침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등을 우리는
당연히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 이야기 한 번 나눠보지
않았던 사람, 나와는 연관이 전혀 없는 사람을 향해서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라고 진정을 담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늘 나와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내 가족일 때도
있고, 성당이나 직장 안에서의 가까운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내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특정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대신 내가 잘 모르는 사람, 어쩌면 뭉뚱그려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
등은 가까운 이웃인데도 사랑하기 힘든 것은 왜 일까요?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그 과정 안에서 부정적인
마음들이 점점 쌓여지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았지만 이제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남편이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미움의
대상이라는 말씀에 그러면 어떻게 30년을 같이 살았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그냥 같이 살았을 뿐이고, 이 30년
동안이 정말로 지옥 같았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30년 전체가 단
1분 1초도 예외 없이 지옥이었을까요? 어쩌면 부정적인 마음들이
더해지고 더해져서 모든 시간이 지옥같이 괴로운 시간처럼 여겨졌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셨고 또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냥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즉,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관되고 가까운 사람을 향해서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일까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이웃을 향해,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 등을 향한
사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지 않을까요?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내 가까이에서
시작됩니다.
한 사람을 파악할 때 그 사람의 현재 모습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모두 고려해야 올바른 이해에 도달한다(김동규).
서로 사랑하십시오.
삶은 가꾸는 자의 것
어느 젊은 집배원이 있었습니다. 그의 업무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것입니다. 매일 똑같은 일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늘 불만이 많았었지요.
어느 날, 작은 마을로 가는 길에 뿌연 모래먼지만 날리고 황량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우울해졌지요. 늘 정해진 길을
왔다 갔다 하는 일에 짜증이 났습니다. 이 우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그는 마을로 갈 때마다 꽃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 꽃들은 활짝 피어났고 향기는 그윽하게 퍼졌습니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꽃 잔치는 계속 되었습니다. 꽃길을 걸으며
콧노래도 부르고... 그 때부터 그는 삶이 즐거워졌습니다.
어떤 삶도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스스로가 의미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모든 삶이 기쁘고 즐거운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은 스스로 가꾸는
자의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행복의 길로 이끄는 예수님의 사랑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5,12-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행복의 길로 이끄는 예수님의 사랑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2-13)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사랑
때문에 존재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인간다워지며, 사랑만이 참 행복의
길임을 잘 압니다.
어떻게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추구할 사랑은
하느님과 무관한 인간적 사랑이나 현세물질을 향하는 사랑이 아님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나를 ‘참 나’로 있게 하고, 다른 이를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신적인 사랑이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명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려면, 먼저 사랑이신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혀, 사랑으로
말하고 생각하며 사랑으로 걸어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할 사랑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을 망각하면, 내가 원하는 사랑, 내 방식대로의
사랑을 하면서 그것이 참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착각하게
되고, 영혼은 피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법은 자신을 떠나 자신을 잊어버린 채 오직 우리에게
집중하는 철저히 이타적인 사랑이며, 타자몰입적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라, 먼저 찾아가고
다가가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면서 함께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요. 마음과 영혼, 슬픔과 기쁨을, 고통과 시련,
억울함과 외로움을 함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셨습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눈높이를 맞추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법은 눈높이를 맞추며 공감, 공생, 공유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살을 취하신 하느님의 강생은 시간과 공간, 육체적 한계라는
인간 조건에 자신을 맡기신 내리사랑의 절정이지요. 우리 또한 ‘낮추는
사랑’, ‘아래로의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은 양떼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는 착한
목자의 사랑이며, 십자가 위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전적인
내어놓음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아낌없이’, ‘남김없이’ 되돌리는 사랑이지요.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나 혼자만의 사랑’이 아니라 ‘상호간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생명과 죽음, 고통과 기쁨, 생각과 느낌을
포함한 모든 삶을 ‘서로’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과 자비와 정의를, ‘서로 나누고 받아들이며’
‘끝까지’ 사랑하라 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처럼, 모든 이에게 먼저 다가가 연민의 마음으로
함께하고, 끝까지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고 아낌없이 내놓으며, 서로의
좋음과 아픔과 슬픔을 주고받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행복 가운데
머물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인간의 삶이 다시금 무엇인지를 묻게됩니다.
그 누군가를 바꾸려는 노력이 인간의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안간의 삶임을 믿습니다.
공동체를 살게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는
서로 사랑하라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창조의 본질은 서로 사랑하는 진실된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이 참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지켜주고 감싸주어야 할 우리의 생명입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삶에 충실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완성이며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나와 너 사이가 서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진정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사랑없이는 우리자신도 우리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높음과 낮음이 아닌 동등한 친구가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처럼 더 깊어지는
성모성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의미는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그대의 눈물이 곧 내 눈물입니다!
2017년 가해 5월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 15,12-17
그대의 눈물이 곧 내 눈물입니다!
발길 닿는 곳 마다 큰 파격과 감동, 치유의 눈물과 기쁨을 선사하시는
문대통령님의 모습에 국민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게 대체 나라냐?”고 탄식하던
사람들이 “이게 바로 나라다!”라고 흡족해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너무
막막해 이민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쌌던 짐을 도로 풀고 있습니다.
중년기를 넘어 노년기를 향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어쩌면 이다지도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근
문대통령님께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보를 보며 어찌 그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보와 꼭 빼닮았는지?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오늘 광주에서 개최된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보여준
문대통령님의 모습은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피해자 따님 김소형씨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눈물로 낭독하자, 함께 눈물 흘리던
문대통령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치 아버지가 딸을 안 듯이 꼭
안아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일이자 자신의 생일을 맞이한 따님은 “마치 아빠가
안아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38년간의 깊은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문대통령님의 얼굴에서 저는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대의 눈물이 곧 내 눈물입니다. 그대의 아픔이 곧 내
아픔입니다. 그대의 상처가 곧 내 상처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문대통령님의 행보 하나 하나에는 서민들을 깊이
사랑하는 배려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기념식이 끝난 후 들른 점심식사
장소는 민주화 운동 희생자 가족이 운영하는 평범한 식당이었답니다.
메뉴는 8천 원짜리 육회 비빔밥이었고, 아주 맛있게 드셨답니다.
오래전 수많은 경호 병력을 대동하고 광주 오셔서 식사하셨던 분, 전
재산 29만원밖에 없다고 하셨던 그분께서는 당시 들었던 소문에,
혹시나 해서 수저와 식기까지 다 챙겨오셨다고 했는데, 어찌 그리 크게
비교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장병여러분”,
“존경하는 광주시민 여러분”...상투적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사람!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우리는 지금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도 또 다른 그 대단한 한 사람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총칼로 내리누르던 군림의 완전히 지나갔습니다. 드디어 섬김과
봉사의 시대, 겸손과 배려의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이 시대의 대세,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막아설 수 없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도 이런 사회 분위기 앞에 나 몰라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앞 다투어 더 밑으로 내려서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더 많은 감동과 기쁨을 사람들에게
선사해야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2~13절)
◈ [수원] 사랑의 열매를 맺어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랑의 열매를 맺어라.
복음: 요한 15,12-17: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이라고 하였다. 악마는 믿지만(야고 2,19 참조)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계명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1티모 1,5)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원칙을
말씀하셨다. 이 원칙에 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를 위하여 죽어야
하겠는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로마 5,10)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라고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교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친구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되는
것도, 원수가 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율법 때문에 종이 되었지만,
당신의 말씀으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종이 아니라 자녀로 만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ㄱ절)
이 말씀은 우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은총을 받도록 정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나아가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우리는 선하게 되도록
사악했던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 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것을 행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열매로 잘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에 지극히 바람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지명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지키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부활 제5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5월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 15,12-17
요즘은 ‘이메일, 카카오 톡, 트위터, 페이스 북’을 통해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가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됩니다.
시대의 흐름이기 때문에 저 역시도 그런 소통의 도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사용했던 손 편지가 그리울 때도 있고, 생각
날 때도 있습니다. 정성을 기울여서 쓴 편지, 예쁜 꽃잎을 함께 넣어서
보내온 편지는 마음을 따뜻하게 했고, 며칠 동안 기분 좋은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3년간 군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고마운 이웃들이 보내준
편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편지를 보내 주었고, 본당의
젊은이들이 편지를 보내 주었고, 제가 봉사를 갔었던 마을의 학생들이
편지를 보내 주었습니다. 내무반에 배달된 편지를 보면서 고된 훈련의
피곤함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고참도 부러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편지를 며칠씩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편지는 무엇일까요?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편지는 무엇일까요? 가장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 편지는 무엇일까요? 저는 바오로 사도가 공동체에
보낸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공동체에게
용기를 주었고, 사랑을 주었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견책을 하였습니다.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함께 읽었고,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편지입니다.
매일 복음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옥중 편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5년 동안
별일이 없으면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힘들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도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 것입니다. 사랑을 관념으로만 가지고 있다면, 사랑을
머리로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어 줄 수 있다면, 실천할 수 있다면 사랑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러분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친구라고
부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뭉클했을 것 같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처음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를 기억합니다. 사제 서품을 받고 첫미사를 봉헌했을 때를
떠올립니다. 300명의 작은 본당이지만 첫 본당신부로 부임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었을 때의 기분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오늘 아침,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후회없이 사랑하여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5월19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요한15,12-17)
후회 없이 사랑하여라.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 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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