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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6월7일 수요일 [(녹)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수도회] 지금 여기서 찾는 영원한 생명의 보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토빗 3,1-11ㄱ.16-17ㄱ
† 복음 마르 12,18-27
◈ 오늘의 묵상
말은 사람의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 주기도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그
표현의 틀 안에 가두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일도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틀과 뜻이 달라집니다. 같은 일도 철학적 표현,
심리학적 표현, 문학적 표현 등 어떤 색을 칠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과
기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양한 표현들은 때로는 우리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채색해 주기도 하지만, 교묘하게 그 뜻을 변절시켜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함정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져
나가는 것은 조잡한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은 스스로
이러한 함정에 빠져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적인 논리로 하느님의 나라를 재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이 지상의 삶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에 속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곧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열려 있는
분이시고, 그분의 생명은 사랑과 빛과 진리의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우리 자신도 인간적, 논리적 창살에 갇혀
있지 않고, 온전히 부활의 삶을 향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
2017년 가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제1독서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 3,1-11ㄱ.16-17ㄱ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27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해초가 많아서 고기를 잡는데 크게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오늘 왜 이렇게 해초가 많은 거야? 도대체 고기를
잡을 수가 없네.”라면서 투덜거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그렇게 투덜거릴 일은 아니지 않니? 조금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바다에 해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이 해초를 먹고
자라는 새우가 없어지겠지. 그리고 새우가 없으면, 새우를 먹는
물고기도 없어지지 않을까?”
분명히 고기를 잡는데 큰 방해가 되는 해초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이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해초가 오히려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기를 기쁘게 잡지
못하는 것은 해초 때문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안고 살아갑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나’ 자신이었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스스로 갖게 되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더 큰 부정으로 이끕니다. 바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올바른 판단을 갖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그냥 끝나는 것이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맞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곱
형제 이야기를 합니다. 맏이부터 후사를 남기지 못해서 막내까지
차례로 형수를 맞이했는데도 자녀를 낫지 못했다면, 부활했을 때 일곱
형제와 한 번씩 결혼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냐는 것이지요. 누구의
아내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인 것입니다.
과연 맞는 말일까요? 부활은 인간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불가능한 일이 과연 있을까요?
특히 부활에 대한 언급은 성경 안에 이미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인정하지 않음은 결국 하느님의 능력도 믿지 않는 것이지요.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적인 측면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교만과
착각이 그들을 더욱 더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말도 안 되는 자기주장을 펼치게
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품을수록 점점 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어디에나 기적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은 수첩의 맨 앞에 적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보고 싶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 생일이 기다려지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의 생일이 기다려집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들과 어울려도 즐거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나하고만 있어야 기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살피고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서 자신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정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느낌표지만, 사랑은
곁에 있을수록 확인하고픈 물음표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글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제1독서의 토빗. 사진은 렘브란트의 토빗과 염소를 든 안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지금 여기서 찾는 영원한 생명의 보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 12,18-2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 12,27)
지금 여기서 찾는 영원한 생명의 보화
사두가이들이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력화 하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한 여인이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었다면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12,25)
부활은 현세의 연장이나 육신 생명의 재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변화를 말합니다. 부활은 시간과 공간, 인간의 지식과 감각
세계, 그리고 세상의 질서에 갇혀 있지 않은 하느님의 신비요
은총이지요. 부활의 신비는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오직 성경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12,24) ‘카이로스의 선물’이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이며, 부활의 때는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가는 절대적인 시간입니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 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총의 현재’인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여정도, 나의 인생길도
그렇게 하느님의 얼과 호흡 안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연속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12,27) 따라서 나의 물리적 조건과 시간,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어, 내 안에 변함없이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요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육신을 지니고 시간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사두가이들처럼 거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알게 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까닭이지요.
사두가이처럼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연연하고 애착을 두게 되겠지요. 나아가 육신의
죽음은 곧 끝이라는 생각과 믿음을 지니게 됨으로써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 너머로 이어지는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도 갈망도 사라져버립니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과 근심걱정과 동거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즐기고 욕구 충족을 하는데 몰두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심각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때에도,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절망하거나 체험해버립니다. 그 안에 보화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신 주님을 추방해버린 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내가
살아가는 순간마다, 내 삶의 모든 계기에 의미가 되어주시고 희망이
되어주시며, 생명을 혼을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내 마음과 혼에 모시고, 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고 체험하여,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보화를 찾아 나누는 희망의
축제, 사랑의 축제를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겠습니다. 영원의 선물이
지금 나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 27)
모든 것은 스치고 지나가지만 영원하신 분은 오직
산 이들의 하느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산 이들의 하느님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말씀을 들어도 늘 나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심한 저를 봅니다.
단 한번도 나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련한 저를
기다려주시고 도와주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을 조금씩 알게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배웁니다.
사랑의 역사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우리의 자아속에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며 죽음이 아닌 생명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어둡고 캄캄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십니다.
마음이 살아나야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후벼파고 서로의 마음을 찌르는 죽은 마음에서 벗어나
되살아나는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안에서 모든 것은 언제나 감사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롭게 해주실 겸손되이 청합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마음을 들어높이는 연중시기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 12,18-27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에서 성령의 은사를 뽑으셨는지요? 저는 용기의
은사와 온유의 열매를 뽑았습니다. 제게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결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온유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입니다. 우리가 뽑은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그러한 은사가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믿고, 성자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화하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송가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중에 성령송가를 읽는다면
성령의 은사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면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고정관념은 다른 생명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고정관념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다른
생명들은 인간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상상
이상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수많은 생명들이 멸종했습니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많은 자원들이
사라졌습니다. 미세먼지는 숨쉬기 어렵게 합니다. 오염된 물 때문에
물을 사먹어야 합니다. 지구별을 보호하는 오존층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야만 우리는 이웃 생명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에는 형이 사망을 하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7형제가 형들이 먼저 사망해서 형수와 살았다면
부활해서 형수는 누구와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였습니다. 이 또한
고정관념에 갇힌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원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애벌레는 2차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비가
되면 3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원의 삶에서는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것만 볼 수 있고, 느린
속도로 기어야 하는 애벌레와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나비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 번째 의미는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즐거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는 부활의 의미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기에 불의한 죽음을 당한 이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마카베오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티아티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제사를
거부하고 순교를 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의 충실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민족과 계층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으로 지금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들 또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을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진리는 언제나 살아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6월7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12,18-27)
진리는 언제나 살아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있었는가 봅니다. 그리고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세월이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틀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까?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행복하시고 그것이 영생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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