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7년 가해 7월24일 월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수도회] 회개하여 주님을 알아보고 표징이 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탈출 14,5-18
† 복음 마태 12,38-42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뒤쫓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위기를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불평하지요.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이런 모습을
계속하여 보여 주지 않습니까? 올곧은 신앙이 아쉽기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와 남방의 여왕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요나가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들은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단식하며 회개하였지요. 남방
여왕은 이방인인 스바 여왕을 뜻하는데, 솔로몬이 하느님의 지혜를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지혜를 얻고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합니까? 요나와 솔로몬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보이는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징표가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라고 청해야 할 기적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대단한 기적이 일어난다 하여도,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없다면 결코
기적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과 함께하는 삶, 진정한 행복
2017년 가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제1독서
"내가 파라오를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4,5-18
복음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2
최초의 자동차는 카를 벤츠가 공개한 세 바퀴가 달린
'모토르바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룬 사람은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 ‘포드’의
창설자 헨리 포드(Henry For)입니다. 사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운송
수단은 말을 이용한 ‘마차’였습니다. 그래서 헨리 포드는 빠르게
목적지에 갈 수 있도록 무엇인가가 필요한 지를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빠른 말”
그렇다면 헨리포드는 사람들의 요구를 따랐을까요? 그래서 빠른
말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조련 방법을 연구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동차’를 생각했고, 당시의 엄청난 크기와 비싼 가격이 아닌
지금 현재처럼 작은 차와 싼 가격의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 말이 틀릴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돈과
명예를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얻기 위해 살아야
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즉, 이 험한 세상 안에서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어떻게 살 수 있느냐면서 “틀렸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틀린 것일까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청합니다. 사실 이들은 마귀를 쫓는
모습을 보고서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고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깜짝 놀라울 표징을
일으키신다고 해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구세주로 믿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앞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해도,
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인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아마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라고 계속 말했겠지요.
문제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이들의 말을 보통 사람들은 모두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가르쳤고, 철저히 단식과
금욕의 생활을 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굳게 믿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지요. 만약에 예수님을 믿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틀렸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틀린 것은 반대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잘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설정한 것들이다
(나폴레온 힐).
인천 답동성당입니다.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말을 잘한다는 것, 그것은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 상대방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조윤제, ‘말공부’ 중에서)
이 글을 보면서 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말로
먹고 산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말을 많이 하거든요. 그렇다면
정말로 진심이 담긴 말, 상대방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있을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라고 하면서
크게 화를 내십니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자비롭고 사랑을 전하시는
분께서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말에
진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 바로 전에 예수님을
향해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는 마귀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는
‘스승님’이라면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꿍꿍이속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속여서 쫓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실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혼나지
않습니다.
답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가톨릭회관이 곧 철거된다고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회개하여 주님을 알아보고 표징이 되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마태 12,38-42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
회개하여 주님을 알아보고 표징이 되는 삶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수많은 징표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메시아임을 증명해줄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12,39)라 꾸짖으시며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요나의 표징밖에는 다른 표징을 받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갔던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요나 3장). 그런데 유다인들은
요나보다 훨씬 위대하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2,41). 또한 이방인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데서 찾아왔습니다(1열왕 10,1-13). 그런데 유다인들은
솔로몬보다 훨씬 위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12,42).
따라서 그들은 단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질책을 들으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심판 때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데서 찾아온 이방인 여인의 단죄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분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채 새로운 표징을 요구한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의 징표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믿지 않을 때 스스로를 단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좀 더 능동적인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에서
멀어진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절박한 것은 느네베 사람들과 같은
회개입니다. 따뜻한 사랑이 없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열정도
진실한 마음도 없이 다른 이들에게 설교하고 하느님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모릅니다. 회개하여 만나고 체험한
하느님을 선포할 때에만 복음이 선포되겠지요.
사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을 바라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리는 과연 어디인지 자못 의심스럽습니다.
한마디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하는 교회, 아픔을 함께 겪어내는 신앙인, 언행이
일치된 사목자들, 정의를 위해 연대하여 투신하는 실천하는
신앙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같습니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위대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과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나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까? 또 혹시
율법에 안주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무디고 독선적인 틀에 갇혀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두 죄에 대한 무감각과 회개를 미루려는 게으름의 잠에서
깨어나, 영(靈)의 눈을 뜨고 ‘지금’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피조물, 그리고 세상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제 표징을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이웃에게 사랑과 생명을 쏟아 붓는 ‘살아있는
표징’이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리더로서의 고충
2017년 가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리더로서의 고충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한 단체의 리더로 봉사하면서
지도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고독한 것인지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의 십자가도 이렇게 큰데 대한민국 전체의
리더이신 문대통령, 가톨릭교회 전체의 리더이신 교황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크겠는지 상상이 갑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분들을 위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기도를 하게 됩니다.
리더로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힘겨움은 아무래도 조직 내의
다양한 구성원들의 목소리와 바람들을 어떻게 조화 있게 수용하고
조율하며 통합해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입니다.
조직 안에 보면 별의 별 구성원들이 다 있습니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노선에 소리 없이, 그러나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구성원들도 있습니다. 더불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는 마치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존재여야 될
것 같습니다. 다양한 악기와 다양한 음감들을 하나의 선율에
일치시키고 통합시키는 그런 예술가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영도자였던 모세가 한 민족의 리더로서 겪었던
고충을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부르심에 흔쾌히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충실성과 우직함과
굳은 신앙을 보시고 그를 백성들의 리더로 뽑으셨습니다.
리더로 선택되고 난 후에도 모세의 삶을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일단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탈출 후의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행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오랜 노예생활에 이미 적응이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의 박해와 차별대우가
자존심을 긁었지만, 적당히 눈감아주고, 적당히 순응하면서
편안하게 살아왔던 이집트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 땅 정착을 위한 여행을 시작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시 여기저기서 갖은 불평불만들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앞쪽에는 홍해라는
거대한 장벽이, 뒤쪽에는 엄청난 숫자의 파라오 기병과 보병들이
가로막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탈출기 14장 11절)
때로 언변도 부족하고, 때로 우유부단했던 모세가 처했던 난감한
상황을 동업자로서 120%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로 리더로
살다보면 이런 정말 개념 없는, 무지막지한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보여준 반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저 같았으면,
화를 벼락같이 내면서,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는 다들
희희낙락하더니, 이제 와서 내게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대체
어쩌자는 거요? 나도 더 이상은 못하겠소. 이집트로 돌아가든지
말든지, 당신들 알아서 하시오!”라고 딱딱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독거립니다.
“두려워들 하지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고 있기만 하여라.”(탈출기 14장 13~14절)
그리고 모세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립니다.
주님 섭리의 손길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명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압제 하에서 해방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참 지도자는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말도 경청하지만 하느님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참 지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달합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인 것입니다.
몇몇 정신 나간 지도자들의 기행과 언어폭력으로 수많은 서민들이
크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들쥐 떼로 비유하지 않나?
가난한 우리 이웃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예의인 최저 임금
안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지 않나? 참으로 대책 없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일을 좀 해봐서 속속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최저임금 안이
못마땅한 분들, 단 하루라도 섭씨 40도에, 귀청을 찢는 듯 요란스런
공장 안에서,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가면서 일해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대단하신 그분들, 단 하루라도 별의 별 진상 손님들
앞에서도 활짝 미소 지으면서 하루 온종일 서서 일해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가난한 우리 이웃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 그저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을 엄청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리더들이, 이번 기회에 우리 눈앞에서 말끔히
사라져줬으면 참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오 12,38-42
예전에 천자문을 배울 때입니다. 노트 맨 위에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적힌 글을 따라서 쓰면서 글을 외우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영어 알파벳을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대문자와 소문자가
적혀있는 노트가 있었고, 글의 모양을 따라서 거의 그리는 수준으로
적었습니다. 노트 한 권을 다 쓸 정도가 되면 이제 알파벳을 조금씩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연습한 친구들은 노트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글을 씁니다. 처음에는 어설프지만 나중에는 곧잘 쓰게
됩니다. 성격이 급한 친구들은 노트를 다 채우지 못하곤 합니다.
처음 한두 장만 쓰고는 이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당연히 글을
외우지도 못하고, 예쁘게 쓰지 못하게 됩니다.
요즘은 글을 쓰기보다는 컴퓨터의 자판을 이용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을 빨리 쓰는 사람들은 자판의 위치를 다
외우기 마련입니다. 영어도 자판을 다 외우면 글을 쓰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습니다. 자판을 외우는 것이 힘은 들지만 한번 외우고
자꾸 연습하면 속도는 당연히 빨라집니다. 역시 노력을 하는 사람과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운동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스키는 속도감을 즐길 수 있는
운동입니다. 속도를 즐기기 위해서는 상급자 코스에서 스키를 타야
합니다. 그러나 초보자는 쉬운 코스에서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초보자 코스에서 넘어지는 법, 속도를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급한 마음에 속도를 즐기고 싶어서 상급자 코스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어쩌다 상급자 코스에서
무사히 내려왔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인들은 노력하지 않고, 표징만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표징도 여러분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마치 예전에 읽었던 글과 같습니다.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에 있는 산입니다. 사람이 오르지 않으면서 산만
높다고 합니다.’
‘Easy come easy go'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얻는 것들은 쉽게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사기를 당하기
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표징을 이미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새날의 시작입니다. 붉은 노을은 하루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예쁜 꽃과 하늘을 나는 새, 흘러가는
구름과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좋은 표징을 보여주었던 현인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들도 있습니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진리를 향한 표징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공자는 ‘인의예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는 ‘자비’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분들도 좋은
표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아무리 좋은 표징도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특별한 비법은 없었습니다. 벼락치기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의무감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가치와 보람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은 나의 꿈을
이루는 발판임을 아는 것이 좋습니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처럼
‘예습과 복습’ 그리고 반복되는 연습이 성적향상의 지름길입니다.
고되고 외로운 길이지만 그 길만이 시험이라는 벽을 넘는
방법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문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표징은 또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니느웨의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전하여라.’ 요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이 싫어서
도망을 갔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병자들,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수많은 번제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신기한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볼 수도 있겠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거센 비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거든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마음의 문을 열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마태12,38-42)
마음의 문을 열어라.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이 성장하고 굳게 다져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표징을 요구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한 때는 표징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는 주님의 강한 음성을 가슴에
담고 이제는 초연해 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 합니다. 보여 주실 때는 보십시오. 그리고 삶을 바꾸어
증인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믿음이 성장하였고, 성령을
체험한 후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행할 때 표징을 넘어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하는 한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거나 기적을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터를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신다면 어디서나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내 삶의 깊은 곳에 주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즐길 것 다 즐기고 시간이 남아야 겨우 미사참례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 만큼 성장 과정 안에서의 진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쉽게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성장을 오히려
더디게 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표징을 요구하고 그 틀에 꿰맞추려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완고한 마음을 돌려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