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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7월30일 주일[(녹) 연중 제17주일]
[수도회] 기쁨을 살기 위한 선택과 결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열왕 3,5-6ㄱ.7-12
○ 제2독서 로마 8,28-30
† 복음 마태 13,44-52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 말씀은 숨겨진 보물과 진주로 비유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불필요한 것을 모두 버려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려면 다른 무엇을 포기해야만 하지요. 세상 삶을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를 추구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필요한 것을 모두
버리는 결단과 끝없는 노력만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이고, 무엇이 필요 없는 것인지를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제1독서에 나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지혜를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말을 잘하려면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야고 1,19). 그러므로 제대로 말하려면 제대로 들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고요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만 하지요.
고요한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지요. 그리고 나에게 하느님 나라가 왜
필요한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늘 나라를
위해 불필요한 것을 자연스럽게 버리게 될 것이며, 참으로 투자할
곳에 투자하는 신앙인이 되어 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이 바로 보물이고 최고의 진주
2017년 가해 7월30일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
<너는 분별력을 청하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3,5-6ㄱ.7-12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28-30
복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44-52<또는 13,44-46>
제게 학창시절에 제일 싫었던 것을 뽑으라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공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억지로 공부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특히 고등학생 때까지 수학, 과학 등의 이과(理科)에
관심 많았던 저로써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철학, 신학 등의 공부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힘들다고 신학교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지요.
신부가 되기 위해서 억지로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공부했던
저였기 때문에, 신부가 된 후에 “유학 한 번 가보면 어때?”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말도 안 된다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40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 저는 공부가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공부가 제일 쉬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이상한 취급했는데,
지금 제게 공부는 너무 좋고 또 제일 쉬운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제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는데 스스로 찾아서 공부를 합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이제야 생긴 것이지요. 이 열정이 왜 이제야
찾아왔을까요?
전에는 성적이나 진학 그리고 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였지만, 이제는
하느님과 나 그리고 세상과 나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공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공부가 너무나
즐겁습니다.
즐기는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아프지 않기 위해서? 이런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의 참 만남을
위해 그리고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면 분명히 신앙생활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 그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물론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서
보물을 발견했으니 주인에게 먼저 알려야 하겠지요. 또한 세속적인
욕심에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진주를 구입하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부분을 강조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밭의 보물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기쁨, 좋은 진주를 구입해서 바라보는 기쁨, 이러한
기쁨으로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보물이고 최고의 진주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모두 팔아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으며 또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행복에 관해 전 세계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결론은 ‘정해진
행복은 없다’라는 것이다(레오 보만스).
여행가고 싶어요. 안식년 때 갔던 Salzkammergut입니다.
재미있는 삶
안식년 때에 저는 인천 송도 국제도시에 살았었습니다. 새롭게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에 높은 빌딩이 많고 또한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공원은 산책하기에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곳에 사는 것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고
살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재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빌딩이 촘촘하게 세워져 있는 서울의 도심지를 가면
재미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이고, 오래된 마을입니다. 실제로 신생
도시보다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오래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탈리아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탈리아의 도시를
다녀왔지만 그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도시는 베니스였습니다.
연극이나 영화 그리고 책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도시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도시에서 살 수 있을까 싶더군요. 아드리아 해의
황량한 갯벌 위에 수백만 개의 말뚝과 돌을 박아 기반을 다진 뒤에
도시로 건설한 곳이 바로 베니스입니다.
물 위에 있다 보니 걸핏하면 집들이 물에 잠깁니다. 오래된 도시의
집이라서 재건축을 하려해도 절차가 복잡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차가 아닌 배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도
큽니다. 그러나 베니스는 삶에 대한 개개인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불편함도 많고 볼거리도 그리 많지 않은
곳입니다. 압도적인 건축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도시입니다.
어렵고 힘든 삶이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뻔한 삶을 재미없지 않을까요?
또한 지금의 내 모습이 초창기의 베니스와 같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뒤에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모습을 떠올리면 어떻습니까?
물의 도시 베니스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기쁨을 살기 위한 선택과 결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7월30일 연중 제17주일
1열왕 3,5-6ㄱ.7-12; 로마 8,28-30; 마태 13,44-52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 13,44)
기쁨을 살기 위한 선택과 결단
오늘 복음은 세 가지 비유로 하늘 나라의 사정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13,44). 그것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기쁨
자체이시며, 온갖 기쁨의 샘인 하늘 나라를 발견하고 알아차리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습니다(13,45). 영원한
좋음이신 하느님을 찾는 상인은 이미 하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 또한 큰 기쁨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맛보고, 영원한 좋음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기쁨을 주는 분을 차지하려 합니다. 기쁨과
선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려 하지요. 그보다 더 좋고 가치 있으며
의미 있는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보물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음을 알기에 가진 것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렇게 기쁨과 선이신 하느님을 차지하고, 기쁨과 선의 나라인 하늘
나라를 차지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상의 하늘 나라인
교회에 속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영원한 행복
안에 머무는 사람은 그것을 결코 자기 것으로만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게 되지요.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기쁨을 선포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좋음을 나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큰 기쁨에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그렇게 모든 이를 사로잡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기쁨에 비할 수 없는 크고 영원한 기쁨을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기꺼이 따라야겠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안다면 얼마나 더 열정적으로 그 기쁨을
선포해야 할지 모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보고 맛 들이며
그분의 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신해야겠지요.
아울러 하늘 나라는 그물과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지만, 결국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릴 것입니다. 기쁨의 나라인 하늘 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의
기쁨을 찾고 선이 아닌 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거짓과 탐욕의 어둠을 즐기는
이들은 추려져 버림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선에 감사드리며, 그것을 기꺼이
선포하고 나누는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하느님의 진리와 기쁨을 살겠다는 선택과 결단이
요청됩니다. 일상의 매순간이 바로 그러한 결단의 기회입니다.
지금 여기 바로 내 눈앞에 마치 밭에 묻힌 보물과 좋은 진주처럼
영원한 기쁨을 주는 가장 값지고 의미 있는 것이 놓여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눈이 있습니까? 또 그것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기로 선택하고 결단하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다른 것들을 우선적으로 찾느라
‘눈뜬 봉사’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7월30일 연중 제17주일.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삶이라는 밭에 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보물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난다고 다 보물은 아닙니다.
보물이 소중한 것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겨진 보물처럼 하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숨겨 두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만이 전부인 나라입니다.
가진 시간이 모자라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진 시간을
모두 하느님께 바치지 않기에 참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보물같은 하느님 사랑이 우리또한 보물로 변화시킵니다.
보물을 숨기신 하느님 마음안에서 따뜻한 사랑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보물입니다.
하느님사랑보다 더 좋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쏟아부으시는
가장 맑은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게됩니다.
변명이 아니라 변명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우리네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
2017년 가해 7월30일 연중 제17주일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마태 13,44-52<또는 13,44-46>
우리네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
언젠가 ‘한 체력’하는 젊은 형제들과 산을 오를 때였습니다.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꼬리에 따라붙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자꾸만 뒤쳐졌습니다. 할 수 없이 ‘먼저들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벌써 다가온 ‘저질 체력!’ 은근히 자존심
상했지만 ‘이것이 인생이다.’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이리저리
눈길을 주며 걷던 제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습니다. 정상만
생각하며 정신없이 올라갈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멋진 산세에
위풍당당한 나무들, 다양한 종류의 야생화들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이 난 저는 키 작은 야생화의 순수한 자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췄습니다. 그랬더니 더 깜짝 놀랐습니다. 서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그 아래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대자연의 순환이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굉장히 멀리 있는듯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 하는 일상 안에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가 감춰져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가깝고도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보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너무 뻣뻣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커져버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짙은 색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삼대가 복을 지어야 맑게 갠 정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내놓으라하는 최고봉들은 웬만해서는
산정(山頂)의 신비로운 자태를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정점(頂點)에 위치해 있는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그 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매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영약이 성체성사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식에 불과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철저하게도 편협한 고정관념과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연세들도 지긋하셔서 깨달을 때가 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
인생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질이
하등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추구하고 얻어야 할 인생의 긍정적인
가치나 덕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자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께
귀의(歸依)하는 신앙이 있고, 인생이 가장 큰 선물인 가족과 친구가
있고, 그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사랑,
우정, 신의, 겸손, 온유, 친절, 배려...
그런 아름답고 의미 있는 가치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저 기를
쓰고 올라가려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손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공동선이나 이웃들의 유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뱃속, 자기 식솔들 챙기기에 하루해가
짧습니다. 야수(野獸)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복음 13장 44절)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여기 저기 우리 주변에 묻혀있는 인생의
보물들을 찾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불성실로 인해
아직도 찾지 못한 인생의 깨달음, 신앙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찾아나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생활에 참여하고 그런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갖가지 일들, 기쁨, 고통, 희망, 번뇌, 그 모든 것을 서로
나눠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인생의 보람이며 행복입니다.”
(에디트 슈타인)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피노 신부 -
◈ [수원] 버려야 주지! /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7월30일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 : 열왕기 상권 3,5-6ㄱ.7-12
제2독서 : 로마서 8,28-30
복 음 : 마태오 13,44-52<또는 13,44-46>
아녜스 수녀님은 로마에 성서를 공부하러 나왔습니다. 학부
과정부터 밟아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진이 빠지는 힘든 과정이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철학과정 한 학기를 마치고는 완전히 풀이
죽어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여름 방학 때 또 다른 수녀님이 돌로미티(이태리 알프스 지역)로
등반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엔 거기 갈 힘도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바람도 쐴 겸 가기로 하였습니다. 가게 된 계기는 그
수녀님이 에델바이스(알프스의 별)를 좋아했는데 그 꽃을 한
번이라도 직접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왠지 그것을 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800미터 고지에 있는 숙소에 머물며 3일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에서 에델바이스 꽃만 찾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등반하고 있는데 수녀님은 제발
에델바이스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땅만 쳐다보고 다녔습니다.
결국 3일 만에 자신은 에델바이스를 꼭 찾기를 원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한 명은 같이 가자고 한 수녀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태리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태리 사람이 하는
말은, 그 꽃은 매우 험준한 곳에 피기 때문에 이런 낮은 산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채취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서 꿈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다음부터는 셋이 함께
에델바이스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일주일이 다 지나서 다음날 새벽 로마로 돌아와야 하는 한
밤중이었습니다. 에델바이스를 찾지 못해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짐을 차에 싣고 문고리를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태리
사람이 뒤에서 “아녜스, 위를 봐!” 하고 알프스가 떠나가라
외쳤습니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생전 처음 보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녀님은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그렇게 구했던 것이 에델바이스였습니다.
그런데 그 에델바이스는 ‘알프스의 별’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녀님에게 땅 바닥에 피는 에델바이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천상의 에델바이스를 선물로 주려고 하고 있었는데 수녀님은 땅만
바라보고 작은 꽃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녀님은 그 때 얻은
힘으로 9년 만에 성서 석사 과정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자기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한다는 주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사야만 합니다. 혹은
아주 귀한 진주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그것을
위해 내 자신을 비워낼 줄 알 때 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천상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찾아 헤매기 때문에 정작
그분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은 받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해지려면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율법을 잘 지켰지만 하느님 나라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재산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우울해 하며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부자는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재물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는 이상 그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다 팔아서
가난해 지는 사람이어야 보물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난해 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팔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친구를 사귈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버려진 술통을 집 삼아 살던
자유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자가 디오게네스를 초대하여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디오게네스가 말 할 시간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디오게네스가 그 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아까부터 침이 고여서... 근데 이 집은 너무 호화로워 침을
뱉을 수가 없네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과 평화와 정의로운 삶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나의 뜻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얻으려면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부자인 것이고 자기먼저
챙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뜻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바뀌어 주시기를 바랐던 사람이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꽃밭 길로 인도해 줄지 알았는데, 예수님은 계속 가시밭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팔아 가난해지고
겸손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아직까지 목숨은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묶여있는 만큼 그리스도를 딱
그만큼 따를 수 없고 딱 그만큼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가 현자의 제자가 되기로 하고 모든
것을 버린 하산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부와
권력을 누리던 때의 자존심과 명예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하산에게 마을 푸줏간에 가서 양의 내장 40킬로를
사서 등에 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산이 그것을 사서 등에
졌더니 거기서 흘러내리는 피와 오물로 온 몸이 젖게 되었습니다.
부와 권력을 누리던 그가 그렇게 마을을 지나오는 것은 진정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너무 많아서 큰 냄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스승은
하산에게 다른 마을 푸줏간에 가서 큰 냄비를 빌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억지로 순종하여 피 묻은 옷을 입고 얼굴을 숙인
채 냄비를 빌려왔습니다.
스승은 그가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린 뒤, 자신이
다녀왔던 두 마을로 가서 등에 양의 내장을 지고 가던 사람과 피
묻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사람을 보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가 돌아온 뒤, 스승이 물었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너를 보았던 것을 기억하느냐?”
“아닙니다. 아무도 제가 그렇게 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알았느냐?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만 관심 있지 남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다른 사람이 너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모든 제자들에게 양의 내장으로 만든 스프를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먹어라. 이 스프는 핫산이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로
만든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신을 따를 때는 집도 가족도
애정도 모두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꾸준히 고통과 멸시만을 청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 하나만을 위해
다 팔아버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한 것입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얼마가 들지 미리 생각해 보아야하고, 싸움터에
나가려면 지금의 병력으로 이길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선물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내가
얼마만큼 내어놓을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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