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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8월16일 수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수도회] 영혼의 병자를 사랑으로 품으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신명 34,1-12
† 복음 마태 18,15-20
◈ 오늘의 묵상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이 가득 차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게 됩니다.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공동체가 아니라 은총의
공동체입니다. 잘못한 이웃을 단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이끄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말고 상대방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신적
지혜와 온유로 이웃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인이 질투심에 아벨을 죽였을 때, 시치미를 떼며 아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변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탓을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그러한 변명을 이해하고 눈감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교회는 매정한 종이 아니라 자비로운 종의 모습으로 움직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성사입니다. 교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은 진리에 충실하고 은총 안에 머물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진실을 이야기하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웃의 잘못에 너그러운 ‘화해의
사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겸손
2017년 가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4,1-12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겸손함이야말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눈에 장막을 쳐버리는 거만함을 내쫓는 것이 바로
겸손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한지를 알아내는
방법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또 그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를 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후에 외국을 참으로 많이 다녔습니다. 성지순례,
개인 여행, 또는 강의를 위한 목적으로 외국을 많이 다녔습니다.
처음 외국을 나갈 때에는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걱정은 한국말만 익숙한 저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외국 나가는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손짓발짓 모두 동원해서야 저의 필요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불편한 조건이지만 그리 힘들지 않은 이유는
오히려 좋은 장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저에게 불리한 일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온전히 집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 제가 평소에 지향하고 있었던
겸손의 모습인데 이를 외국에 나가면 저절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며칠을 생활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감사해지고, 외국에서 보였던 경청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도
쉽게 펼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말을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설득시키라고 하지요. 이렇게
해서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기준이기 때문에 여기에 겸손함이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설득하기도 힘듭니다. 교회가 나서서 말을
해도 무시합니다. 그만큼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죄를 짓는 형제를
위해서 몇 단계에 걸친 계속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나의 조그만 노력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는 식으로, 그래서 곧바로 당시의 유다인들이 이방인이나
세리들에게 했던 것처럼 나쁜 사람으로 판단하고 무시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진정으로 이웃을 잘 관찰하고 경청할 수 있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형제가 죄를 지었다 해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역시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생활의 위대함을 절감한다. 평범함이 진리로 다가오는
까닭은 겸손해졌기 때문이다. 평범한 생활에 대한 기억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소노 아야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저절로 겸손해지지 않습니까?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원한다(‘좋은 글’ 중에서)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꼽은 것은 "날마다 반성하는 삶"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자신의 시간들을 후회 하는
것입니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듭니다.
둘째는 "용기 있는 삶 "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지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이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셋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
자신들의 삶이 아무것도 남기지 몾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없어지지 않을 것들, 참된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대답에서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훌쩍 떠나고 싶네요. 그러나 갑곶을 지켜야죠?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영혼의 병자를 사랑으로 품으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영혼의 병자를 사랑으로 품으며
살다보면 사랑의 질서를 교란시켜 공동체에 어려움을 주거나
(18,15-20)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불화를 일으키는(18,21-35)
이들을 만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용서와 화해로 이끄시고자 하십니다. 오늘의 대목은
공동체가 죄지은 형제자매를 어떻게 죄를 뉘우치고 화해하여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인지 알려줍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공동체, 수도공동체 등 교회 공동체에서 공동체 내부
생활에 심각한 어려움과 혼란을 준다든가, 스캔들처럼 공적으로
공동체의 신용을 손상시키는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기쁘게 살아야 할
텐데 ‘눈총’을 받고 사는 이들이 늘 있지요. 수도자들 가운데도
‘저 사람의 성소는 악표양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며 사는 이들도 있지요. 어디로 가도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며 분란을 일으키니, 십자가도 그런 십자가가 없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를 교란시키는 형제자매에 대해 다음 세 단계의
과정을 알려줍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죄지은 형제자매를 조용히
타이르고(18,15), 그가 말을 듣지 않거든 둘 혹은 셋이서 다시
대화하라는 것입니다(18,16). 그조차 받아들지 않거든 교회
공동체에 알리고, 그래도 별도리가 없으면 그가 회개할 때까지
공동체에서 격리하라 합니다(18,17).
이러한 절차는 일차적으로 죄인에 대한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화해와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고, 죄를 지은
형제자매가 주님의 심판에 놓이지 않도록 이끄는 사랑과 화해의
초대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맺고 푸는 권한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권이지요. 그러나 이 권위는 공동체를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화해의 장소입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이런 과정을 진행함에 있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18,19-20). 왜냐하면 죄인과 어려운 대화를 할 때에
공동체는 인간적 생각과 지혜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랑의 결핍이기에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로 죄인의 마음을 듣고
그가 잘못을 뉘우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 참으로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는
형제자매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이런 ‘형제적 교정’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랑의 십자가’이기도 함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런 경우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오신 주님께
기도하며, 사랑을 품고 또 사랑을 위해 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하면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사랑의 상처를 입은 영혼의 병자’이지 않습니까? 영혼의
병자를 사랑으로 다시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형제 하나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권고를 거부한 죄인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영원한 이방인’이 아니기에, 그의 회개를 위해 더 큰 사랑을
품고 ‘한마음으로’ 기도해야겠지요. 단죄에는 빠르나
‘영혼의 병자’를 사랑하는 데는 무딘 자신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한다 /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신명기 34,1-12
복 음 : 마태오 18,15-20
얼마 전에 한 혼인한 자매님이 조용히 상담을 요청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 자매님 딴에는 매우
심각한 고민이었습니다.
자매님은 느닷없이 “봉헌 생활이 어떤 의미에요?”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 자매님이 혼인하기 전에 수녀님이 되고자 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자녀의 어머니입니다. 한 번은 성령
세미나에 가서 한 유명한 예언 은사를 받은 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은사를 받은 분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었고 그 분은 그 자매님께,
“혼인하기 전해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을 지키세요. 봉헌생활을
하세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있는 것도 알고 있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고 또 자신도
결혼 전에 봉헌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봉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저에게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봉헌 생활은 넓은 의미로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랑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사랑하여 그 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봉헌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을 굳이 그 자매에게 하라고 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수도자가 되라는 뜻인데, 그 분은 이미 모 수도회
삼회 회원으로 가정이 있는 분으로서는 최대한 수도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만약 가족을 떠나서 정말 수도자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행한 혼인성사의 의무를 소홀히 하라는 뜻이기
때문에 교회에 어긋나는 것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예언 은사를 지니신 분이 하신 권고는 이
자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분이 교회에서 공인되지
않은 한 평신도라는 것을 알고, 그냥 “무시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꼭 먼저 사제에게 면담을 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카리스마(성령의 선물)라고
하더라도 교회 전체에 성령 강림 때 내리신 성령님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권위가 곧 당신의 권위와 같음을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지금의 주교단입니다.
땅에서 매고 푸는 하늘나라 열쇠란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쫓아내신 것도 하느님이고 다시 받아들일 권한이
있으신 분도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의 권한을 바로 베드로와
주교단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일치하는 사도들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교황과 일치된 각 지역교회의 주교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제가 ‘강론정지’를 당했다고 하여 주교가 사제의
고유권한인 강론을 정지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사제의
모든 권한은 주교로부터 오고 주교의 모든 권한은 교황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가 미사를 거행할 권한이나 고해성사를
거행할 권한을 포함하여 모든 권한을 그 지역의 주교가 제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가 지닌 ‘고유권한’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열쇠를 단 한 명의 베드로에게만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든 혼자 찾아가서 이야기 해
주고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데려가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마지막으로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거든 이방인으로 취급해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권위가 가장 최종적인 최고권위임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면 당신이
꼭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교회, 즉 ‘믿는 이들의 모임’이
개인의 영성보다 항상 우선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인들의 영성이 옳다고 주장하며 얼마나 많은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도 세상에 오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결코 혼자가
아니셨습니다. 혼자 계실 때는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니 그 분은
결코 혼자가 아니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있으니 결코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닙니다. 나라는 혼자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곧 믿는 이들의 집단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개인적인 영성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께서 세워 놓으신
당신의 대리자, 교회와 함께 끝까지 가야겠습니다. 교회는 가장
안전한 구원의 통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경지까지 도달하셨던
영성의 대가 아빌라의 데레사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합니다.
“저는 교회의 한 딸로 죽는 것이 행복합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2017년 가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 18,15-20
도림동 성당을 방문했었습니다. 성소후원회 모임과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도림동 성당은 1936년에 설립이 되었으니 81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당의 복도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역이 재개발 되면서 성당도 아름답게 변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사진을 보니 꼭 이어달리기를 하신 것 같습니다. 사진
속의 신부님들 중에는 하느님 품으로 가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의 능력과 재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의 사진도
두 곳의 본당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조금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용도 모르면서, 툭 던지는 말 때문에 공들인 일들이 잘 안되곤
합니다. 당사자는 별 말이 없는데 옆에서 끼어들어서 일을 힘들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저도 남의 잔치에 재를 뿌린 적이
있었습니다. 비판과 지적은 정말 신중해야하고, 그럼에도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성격이 다르고, 품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자란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역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소통하려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틀리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것들은 잘못된 것이고,
고쳐야 하고,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신과 분노가
생겨나고 분쟁과 갈등이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승자와 패자’의 패러다임을 없애고자
하십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그에게 가서 잘못을
지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승, 패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모두가 승리하는 ‘승,승’의
패러다임이라고 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틀린 사람을 쫓아내고 격리시키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찾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도 용서하시고,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도
용서하십니다.’ 용서와 포용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은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셨지만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주님께서는 군사와 권력으로 하나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공존을 모색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同化’가
아니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없애는 힘의 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들 역시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입니다.
평화와 공존은 인류 지성이 추구했던 삶의 가치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마태18,15-20)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도 마음한 번 돌아서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성무일도 찬미가에서“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둠을 알고
인정하면 밝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시집「수평선 너머」(한길,2009)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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