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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8월29일 화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수도회] 가난한 자 되어 정의를 선포하는 선구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1,17-19
† 복음 마르 6,17-29
◈ 오늘의 묵상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였을 때, 유다의 온 산악 지방 사람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하고 말하였습니다.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사명은 그분을 이스라엘에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헤로데 영주에게 바른말을 하여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한에게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는
그를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그녀의 딸 살로메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있는 잔치에서 춤을 잘 춰 헤로데의 환심을 사자, 상으로 요한의
목을 청합니다. 물론 이는 헤로디아의 간계입니다.
헤로데 임금의 명으로 참수당한 요한의 목을 본 헤로디아는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수난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미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메시아를 어떻게 다룰지
예언하였습니다. 요한의 수난은 우리에게 회개의 세례와 수난의
세례를 받도록 초대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겸손함
2017년 가해 8월29일 화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7-19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니?”
그러자 “저는 오른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정작은 본인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하긴 전에 어떤 책을 보니,
우리 몸의 좌우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컴퓨터를 이용해서 몸을 반으로 나눈 뒤에 좌측이나 우측의 한
부분을 복사해서 반대쪽으로 붙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더 예쁜 부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저는 아무리 거울을 봐도 왼쪽이 더 나은지,
오른쪽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기 힘들까요?
이 친구는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 오랫동안 계속 자신이 찍힌
사진이나 화면을 보고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마음이 드는 부분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얼굴도 이렇게 계속 보고 고민해야 겨우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본 것도 아니면서 함부로 말하고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하느님께서도 벌하실 거야.”
우리 주변에서, 또 스스로도 자주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더 큰
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왕실
가족의 타락한 윤리 행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사실 그를 감옥에 가둔 헤로데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춰서 헤로데 본인과 손님들을 기쁘게 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이렇게 맹세를 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이 맹세에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지요. 헤로데는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 청을 들어줍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라는
작은 죄가 더 큰 죄인 살인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섣부르게 함부로
말한 판단이라는 작은 죄가 더 큰 죄인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섣부른
작은 죄가 더 큰 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좀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늘 부족한 것은 성실이다(벤자민 디즈레일리).
세례자 요한과 헤로디아의 딸.
손나무(‘좋은 생각’ 중에서)
제자가 물었다.
“가장 값진 열매를 맺는 나무는 무엇입니까?”
스승이 답했다.
“한 그루에 가지가 다섯 개씩 달린 나무가 있는데, 그걸 부지런히
흔들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네. 바로 자네의 손이지.”
가장 값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남의 나무에 달린 열매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세례자 요한이 순교했던 마케루스 요새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가난한 자 되어 정의를 선포하는 선구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8월29일 화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마르 6,17-29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마르 6,27)
가난한 자 되어 정의를 선포하는 선구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8)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 생애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미리 닦아
준비해드림으로써 구원의 길을 연 선구자였지요.
당시 요한은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많았고 명망이 높았음에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믿음 때문에 희생 제물이 되어 헤로데의 손에
죽음을 맞았지요.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휴양지인
마케론트 성채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직접 들으셨습니다(마르 6,17-29).
요한 세례자는 고행과 순교의 성덕을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들꿀을 먹으며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고행과 극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사람으로 변모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고,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의 띠를 두르고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세상의 불의에 맞선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던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는 여덟 번이나 결혼하여 열 명의 부인을 거느린
헤로데의 잘못을 서슴없이 지적함으로써 그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과 비굴한 타협을 하지 않고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순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탄생과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고, 피를
흘려 주님께 대한 최상의 증거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겸손과 희생을
통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선구자 요한은 정의를 위해 헌신하다가 죽음으로써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고행과 극기, 그리고 순교는 현실과 동떨어진 고리탑탑한 옛
시대 신앙언어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언행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본질적인 신앙의 동기를 제공합니다.
자기학대나 억압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고행과 극기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행위임을 기억해야겠지요.
또한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인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본분을 지키며
오로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드러내는데 몰두해야겠지요. 순교는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매순간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 것을 내놓는 결단이 바로
오늘의 순교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순교를 살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께 의지하여 세속의 불의한
권력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해나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불의와 불평등, 온갖 사회부조리에 눈감거나 묵시적 동의를 하는
어정쩡한 헤로데의 망상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다운 분명한
선택과 결단이 절실한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헤로데의 우유부단함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8월29일 화.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 마르코 6,17-29
헤로데의 우유부단함
어떤 분이 “죄를 계속 지으면서 고해성사를 계속 봐야 하는가요?
또 죄를 지을 텐데요. 당분간 성당을 쉬면서 죄를 짓고 나중에
나오면 안 될까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고해성사는 물론 미래에 또 죄를 짓더라도 지금은 그러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머리로 자꾸 생각하다보면 안 좋은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칸트는 한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도무지 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견디다 못해 칸트에게 청혼했습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칸트의 대답은 간단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는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결혼하기로 최종결론을 내렸습니다.
칸트는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여인의 아버지가 나와 말했습니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오.”
사람들은 종종 가슴으로 느낄 것을 머리로 인식하려 합니다.
가슴은 결단을 내리지만 머리는 숙고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숙고가 아니라 마음의 결단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순교 기념일입니다. 헤로데가 그의 이복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왕비로 맞아들이자 요한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와 살고 싶기도 하고 요한의 말을 따르기도
싶습니다. 마음의 결단이 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또 자신의 생일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잘 추어 그에게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조언을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청합니다.
헤로데는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은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머리는 약속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요한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헤로데의
책임은 없을까요? 아무리 요한을 지켜줄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명령을 내린 것은 헤로데 자신입니다.
우유부단함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경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결단이 없었었던 것에서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단을 내리는 것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했으니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삼국통일을 달성한 김유신이 청년시절 기녀인 천관을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유신이 천관에게 마음을 빼앗겨 학업을
게을리 하자 이를 걱정한 어머니가 꾸짖으매, 김유신은 다시는
천관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활쏘기 연습에 지쳐 말 등에서 꾸벅꾸벅 졸던
김유신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말이 천관녀의 집 앞에 서있는 것을
보자 화가 솟구쳐 그만 칼을 빼어들고 말의 목을 쳐버려 두 동강을
내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유신의 모습을 보고 반갑게 뛰어나오던 천관은 그만 피가 낭자한
말의 목을 보자 혼절하였고 다시는 유신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여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행위만이 자신을 증명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슨 핑계를 대던지 다 죽은 것만은 확실한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는 것도 결단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사막으로 나아가는 것도
결단이요,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아멘!’ 하신 것도
결단이고, 예수님께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한 것도 결단이고,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하다가 다시 교회를
위해 일하게 된 것도 그의 결단입니다.
결단 앞에서는 주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유부단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믿기로 했다면 세상과 죄를 완전히 끊기로 결심합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2017년 가해 8월29일 화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 6,17-29
시간이 되면 명동에서 광화문까지 걷곤 합니다. 중국 사람들도
다시금 명동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이번에 걸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출하자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청계천 광장에서는 의료보험의 전면 급여화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청계천 광장의 옆에서는 수능의
절대평가를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모임을 갖는
것도 자유이고, 자신들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솥을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솥을 뜨겁게 하는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빼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뜨거워진 솥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 이익, 성공, 권력, 욕망, 이기심, 원망,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의
불을 빼내야만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보, 희생,
사랑, 희망’이 있어야 뜨거워진 솥을 식힐 수 있습니다.
불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칫 뜨거운 불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였을까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섬김, 봉사, 희생, 나눔,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우리는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하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주님 앞에서 바보가 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8월29일 화요일.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
마르6,17-29
주님 앞에서 바보가 되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 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하지 못하고 바른 말을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은
빛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헤로데 왕은 똑똑하고 잘 난 것 같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진짜 바보였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와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함부로
맹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 다 주겠다는 헤로데의 호기는
사실 교만이었고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창세26,24) 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 결국은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마침내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했던 사람들은 헛
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길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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